감사 통장

감사한 마음을 적금들면 생기는 이자는 또 다른 고마움

by 들샘

나이를 먹다보면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습관이 생긴다.

습관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것으로 여긴다. 안좋은 습관은 대체로 버릇이 든다고 하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 자기 전에 책 읽는 습관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시작하는 습관.


그런데 때때로 좋은 습관으로 생각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감사하는 습관'이 그랬다.

주간 일정을 안내해주는 메시지에도 '감사합니다.'

업무 상 필요한 안내를 받아도 '감사합니다.'

안내를 해 주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한 것이지만, 그 수고가 안내를 받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진정으로 그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했는가에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항상 대화의 끝에 '감사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뇌가 그것을 낯선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낯섦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익숙함이 채운다.

정보 처리 시간이 빨라지는 만큼 고마움을 느낄 시간도 짧아진다.

그렇게 나는 감사함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표현한 감사의 말에는

나의 감사함이 얼마나 담겨있을까.


최근 우리학교 사서선생님께서 감사통장이라는 것을 소개해주셨다.

학생들 대상으로 진행하려고 한 행사였지만 선생님들도 참여하실 수 있고, 감사통장에 감사한 일 100가지를 적어서 제출하면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다.

선물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감사통장에 감사한 일을 매일 하나씩 적는 것이 일기를 쓰고 싶다는, 수없이 실패한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감사통장을 적기 시작했다.

매일마다 업무 메신저로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하는데... 100개 쯤이야 금방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 직접 맞아보기 전까지는 누구나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감사통장을 적으려고 폈더니, 이게 웬걸...감사하다고 분명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저찌 기억 저편에서 끌어올려서 떠올린 감사의 이유는 곱씹어보니 감사할만한 내용이 아니었음에도 '감사합니다.'라고 보낸 것도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감사했던 거지?

감사통장을 처음 쓸 때는 이런 이유로 잘 쓰지 못 했다. 그러다 감사통장 제출이 두달 앞으로 다가오자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감사할 때, 어떤 점이 감사한지 알려주기 시작했고, 업무상 당연히 해야 하는 일도 감사한 점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 씩 감사통장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감사통장을 쓴지 한 달이 지나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어떤 점이 감사한지 알려주기 시작하자 감사한 일이 생기면 잊지 않게 되었다.

업무상 당연히 해야 하는 일에도 감사한 점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감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고마움을 느끼는 감각의 스펙트럼이 확대되자,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감사함을 표현하는 즐거움이 생기자, 하루하루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워지자 자존감이 높아졌고,

그런 변화는 내게 또 다른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감사통장을 어느덧 다 써 간다.

적금 통장을 만들고 꾸준히 저금하는 이유는 모은 돈에 이자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듯,

감사 통장에 꾸준히 감사함을 모으면 붙는 이자는 또 다른 고마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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