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모든 ‘최초’는 주목을 끈다. 그리고 그 ‘최초’는 성취한 사람의 영원한 수식어가 된다.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이디스 워튼. 1862년에 미국 뉴욕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워튼은 유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6세부터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 14세 때 중편소설을 습작했고 16세 때 지은 시를 모아 자비출판으로 시집을 냈다. 당시 상류층 유명 가문의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는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잘 꾸리는 것이었으므로 워튼의 어머니는 워튼이 글을 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가당찮은’ 문학적 열망을 꺾어버리기 위해서 어머니는 워튼을 일찍 사교계로 데뷔시켰다. 당시 나이 17세. 23세에 부모가 골라준 적당한 상대와 결혼했다. 13살이 많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과 여행을 좋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순수의 시대』는 워튼이 58세에 쓴 작품이다. 그 사이 워튼은 28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워튼의 일대기를 언급한 건 『순수의 시대』와 워튼의 삶이 자꾸만 겹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제도와 관습은 워튼이 속한 삶이었고 제도와 현실에서 갈등했던 인물이 곧 그녀였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 메이 웰랜드, 뉴랜드 아처, 엘렌 올렌스카에서 워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은방울처럼 청초하고 고운 신부 메이처럼 관습에 완벽하게 복무하는 인물은 어쩌면 워튼에게 기대되는 삶을 대변하고 있다. 뉴랜드 아처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현실을 따라가는 인물. 관습과 현실 사이 갈등이 곧 워튼의 고민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엘렌 올렌스카는 실제 워튼과 가장 흡사해 보이는데 유럽에서 오랜 생활을 했다는 점, 유럽문화에 익숙하다는 점이 그렇다. ‘보헤미안적’인 삶. 그리고 엘렌의 불행한 결혼생활도 워튼의 결혼과 닮았다.
어쩔 수 없이 나 같은 독자는 소설 속에서 작가의 흔적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한다. 워튼이 건축과 원예에 조예가 깊었기에 메이를 은방울 꽃이나 엘렌을 노랑장미라는 은유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의복과 장식에 대한 그토록 구체적인 묘사 역시 그렇다. 가문과 가문사이의 얽혀있는 복잡한 계산과 정치. 결혼 문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제도와 관습. 워튼이 직접 경험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메이 웰랜드와 뉴랜드 아처는 뉴욕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커플이다. 아처와 결혼할 뻔 했던 엘렌 올렌스카가 유럽 귀족과 결혼했다가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엘렌과 메이는 사촌지간이므로 메이와 아처가 결혼을 하면 엘렌과는 가족이 되는 셈이다. 변호사인 아처는 엘렌의 곤란한 상황(아직 이혼은 아니지만 이혼과 다름없는)을 법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만나게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메이와 엘렌 사이에서.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정숙하고 아름다운 약혼녀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이혼(할 예정인)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 라고 하면 갑자기 소설이 통속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전은 통속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마담 보바리』나 『안나 카레니나』처럼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이 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뉴랜드 아처』나 『엘렌 올렌스카』. . 소설의 제목은 『순수의 시대』다. ’순수의 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순수’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여기서 순수는 주어진 운명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순수함이다. (그는 메이가 그런 순수함을 갖는 게 싫었다. 상상력이 봉쇄된 정신과 다양한 경험을 느껴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만드는 그런 순수함은! 174p) 관습에 저항하거나 돌파하거나 변화를 꾀하기보다 관습을 인정하고 따르는 삶. 그래서 안정된 삶. 아처는 여자들도 모두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외치고 그러한 이유로 엘렌으로 하여금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지만 결국 그가 제시하는 건 함께 도망가자는 뜬 구름 잡는 낭만적인 제안일 뿐이다. 이미 도망쳐본 전력이 있는 엘렌은 그의 제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고 있기에 제안을 거절한다. 그들은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몸부림치고 괴로워했을지언정 결국 순수하게 따랐다.
이곳에 모인 상냥하고 냉혹한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믿는 것과 어긋나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생각한 적도 심지어 가능하다고 인정한 적도 없다고 여기는 가식의 행진에 굳건히 참여하고 있었다. (391p)
뉴욕은 세련됨에서 시작해서 세련됨으로 끝나고 품위에서 품위로 끝난다. 그리고 뉴욕의 세련됨과 품위를 지탱하는 건 위선과 가식이다. 아처와 엘렌은 가식에 환멸을 느끼지만 그들의 삶 역시 뉴욕적인 품위로 지탱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왔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관습을 버리지 못한다. 아처와 엘렌이 서로를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느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삶’을 택한다.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삶.
엘렌은 뉴욕을 떠나고 아처는 메이와의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시간은 결혼이 설령 지루한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의무와 위엄을 지키기만 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 위엄을 잃은 결혼은 추악한 취향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지난날을 명예롭게 추억했고 그것을 잃은 것을 애통해했다. 어쨌거나 옛 방식에도 좋은 것이 있었다.’
사실 그러한 삶을 지키는 것도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처는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냈다. ‘인생의 꽃’을 놓쳤다하더라도.
아처의 아들 댈러스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가 등장한다. 30년이 지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댈러스의 활기 넘치는 젊음은 단순한 젊음이 아닌 그 이상이다. 그들은 ‘운명을 자신의 지배자가 아니라 동급자로 보라보는 데서 오는 유연함과 자신감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모든 것과 대등하다고 생각’(413p) 했다. 운명에 따르는 순수함이 아니라 운명을 동급자로 보는 자신감. 운명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순수의 시대가 아니다.
순수의 시대 대표 격인 메이가 세상을 떠나고 아처는 이제 혼자 남았다. 그리고 아들 댈러스의 계획에 따라 엘렌의 집 근처에 오게 된다. 30년만의 해후가 될 수 있는 순간. 이제 엘렌 곁에서 ‘조용히 우정과 동료애를 수확’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 그러나 아처는 엘렌을 만나지 않고 발길을 돌린다. 그는 ‘순수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장면이 어찌나 쓸쓸한지... 구멍난 마음에 가을바람이 쏴 하고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