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알쓸신잡’에서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책으로 『안나 카레니나』를 골랐다. 이유는 ‘간단한 내용’과 ‘기가 막힌 심리묘사.’ 언제 구조될지 모르므로 오래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표면적인 이유라면 ‘기가 막힌 심리묘사’는 보다 심층적인 이유다. 안나가 바람이 나서 고민하고 괴로워 한다는 ‘간단한 내용’ 만으로 톨스토이가 상중하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썼을 리가 없고 그러한 내용만으로 세계적인 고전으로 남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안나 카레니나』가 그토록 많은 찬사를 받는 이유를 알기해서는 ‘기가 막힌 심리묘사’에 얼마나 공감하고 감응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처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때는 내용을 따라가느라 바빠서 감동을 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나의 이야기를 읽는데 다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다고 느껴졌고 특히 레빈의 이야기는 방해물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9년 만에 다시 읽은 『안나 카레니나』는 그때의 나는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인가! 할 정도로 새롭게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안나 카레니나』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목록’에 있다는 이유로 고등학생들에게도 읽힌다고 하는데 결혼 8년 차 안나가 겪는 심리를 얼마나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특히 초반에 등장하는 돌리의 분노와 절망, 레빈의 심리 갈등을 얼마나 가까이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경험치 만큼 느끼고 생각하는 나의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나에게는 소설 속 대사들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페이지 귀퉁이를 계속 접어가면서 읽게 되는 지금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안나의 이야기와 레빈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소설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서로 알고 있는지 불확실하게 그려지지만 레빈은 안나의 오라버니 오블론스키의 오랜 친구이며 안나와 사랑에 빠지는 브론스키의 라이벌(적)관계에 있다. 레빈의 이야기가 소설을 이루는 하나의 기둥이라면 레빈에 대한 이해는 안나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므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읽었다.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58p, 『여행의 이유』, 김영하)
감히 추측하건대 소설가 김영하는 『안나 카레니나』를 인물의 내면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교본으로 삼지 않았을까. 소설가로서의 고민이 인물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신념, 프로그램’을 어떻게 드러내고 설득적으로 보여주는데 있다면 『안나 카레니나』 속 인물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레빈과 브론스키
레빈과 브론스키의 공통점은 전통적인 가정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정생활과 어머니의 부재는 두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어머니의 부재가 레빈에게는 오히려 가정을 더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요인이 되지만 브론스키에게는 정 반대로 나타난다.
브론스키는 이제까지 한 번도 가정생활의 맛을 알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젊었을 적에는 사교계의 호프였으며 남편이 있을 때부터,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더욱 자주 온 사교계의 로맨스를 뿌렸던 부인이었다. (...) 결혼이라는 것은 그에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가정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지금껏 살아온 독신자 세계의 공통된 견해에서 가정이라는 것을, 특히 남편이라는 입장을 어쩐지 인연이 멀고 적대적인 것으로,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119p
브론스키의 안나를 향한 저돌적인 애정공세의 뿌리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교계의 호프로서 로맨스를 뿌린 전력이 있는 어머니를 둔 브론스키였으며 또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안나와의 염문을 처음에 은근히 반기기까지 했다. 러시아 정계 최고 정치가인 카레닌을 남편으로 둔 안나와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이 알면서도 브론스키는 그의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그의 대담한 행동은 안나가 거절하고 피했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반면 브론스키와 같은 행동은 레빈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소설가 김영하가 말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독자는 톨스토이가 만들어 놓은 레빈의 프로그램에 따라 그가 브론스키처럼 가정이 있는 여성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브론스키와 달리 가정을 신성하게 여기며 인생 최고의 행복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여긴다.
레빈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회상은 그에게는 신성한 것이었고, 그의 상상 속에 그려지는 미래의 아내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고 신성하고 이상적인 부인의 전형이 아니면 안 되었다. (...) 레빈에게 결혼은 인생 최대사로, 인생의 행복은 모두 이것에 달려 있었다. 191p
레빈은 키티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 (키티는 안나의 올케 돌리의 막내 동생이다.) 레빈은 누구보다 키티를 고귀하고 신성하게 여겼고 오랜 고민 끝에 청혼을 하지만 키티는 브론스키를 마음속에 두고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키티의 비극은 브론스키의 무의식, 내면을 몰랐다는데 있다. 그저 그의 풍기는 용모와 행동이 전부라고 믿었고 그 호감만으로 브론스키가 자신에게 청혼할 줄 알았던 것이다. 몰론 브론스키 역시 키티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건 순수한 즐거움이었을 뿐 결혼으로 이어지는 성격의 호감은 아니었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열여덟 살 숙녀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것일까. 브론스키의 세련됨과 매너, 보장된 미래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시골에서 농부들과 생활하는 레빈에게는 어딘지 ‘야만’적인 구석이 있었고 그 점이 브론스키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사람의 심리라면 키티의 심리는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그것이 키티의 비극이지만 진심, 내면을 보는 눈이 없었다고 열여덟살 키티를 나무랄 수는 없다...
키티를 향한 브론스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다만 그 진심에는 브론스키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는 신념,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건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한 사람에 관한 프로그램(텍스트)를 읽어내는 일이 아닐까. 한 사람에게는 무심한 행동이 상대에게는 마음을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라는 것. 한 사람의 의도가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는 텍스트는 시간을 두고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흐릿한 시야에 맞는 안경을 고르듯 시간을 통해 수정해나가며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갖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나간다. 키티에게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더라면 브론스키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무도회
키티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넣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무도회. 사교계 데뷔무대인 무도회에서 키티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지만 키티가 원하는 단 한 사람 브론스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당황한다. 무도회장면을 읽으며 무도회가 키티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여겨졌다. 키티의 눈은 브론스키에게 고정되고 브론스키의 눈은 안나를 쫒는다. 키티의 눈에 비친 안나와 브론스키. 오직 키티만이 읽어낼 수 있는 두 사람만의 눈빛교환과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고 키티는 절망한다.
왜 키티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을까. 브론스키와 춤을 출 때 안나의 감정은 생략되어 있고 브론스키의 내면도 묘사되지 되지 않는다. 오직 두 사람을 눈으로 쫓는 키티만이 있다. 덕분에 독자는 키티의 무너지는 마음을 보다 절절하게 알게 되고 키티의 관찰을 통해 순간의 불꽃처럼 숨길 수 없는 감정을 나누는 두 남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