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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Dec 09. 2020

행복한 가정, 불행한 가정

『안나 카레니나』2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결혼 생활 십육년 차, 마흔 아홉 살의 톨스토이는 어떤 심정으로 저 문장을 썼을까. 그의 결혼생활이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결혼으로 이룬 가정덕분에 『전쟁과 평화』(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8)를 쓸 수 있었다. 실제로 아내 소피야는 수 천 쪽이나 되는 『전쟁과 평화』원고를 (네 권 분량에 이르는!) 정서해 주었다고 하니 ‘죽을 때까지 싸웠던 부부’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공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톨스토이는 가정을 못 견뎠기 때문에 가출했고 가출한지 열흘 만에 객사했다. 비극적인 죽음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가정을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불행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 둘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불행을 넘나드는 것이 아닐까. 결혼과 가정이라는 주제는 톨스토이가 소설과 실제 삶을 통해서 평생 추구했던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야는 그들의 결혼생활을 일기로 남겼다고 한다. 같은 결혼생활에 대해 각각의 버전이 있는 셈이다. 아내 버전과 남편버전...)     

 톨스토이는 ‘불행한 가정’의 나름나름의 사정을 오블론스키의 집안을 통해 보여준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는 아내 돌리와 다섯 아이들을 두고 젊은 프랑스 가정교사와 바람이 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돌리는 ‘남편에게 더 이상 한집에서 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내놓으면서 가정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한다. 안나는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모스크바행 기차를 탄다.      



그런데  바로 그 기차에서 안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브론스키를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 아이러니하다. 오빠의 가정을 지키러 가는 길에 자신의 가정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스티바와 안나     



안나와 안나의 오빠 스티바(오블론스키). 남매가 나란히 외도를 한다. 그런데 안나의 외도와 스티바의 외도를 다루는 톨스토이의 시선은 극과 극이다. 스티바는 아내 돌리에게 외도가 들통이 났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들켰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인물이다. 가정이 유지되고 비밀이 유지되는 한 그에게 외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지어 그는 ‘사랑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으며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 그러한 스티바의 생각은 오랜친구 레빈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스티바: 자네가 결혼을 했고 부인을 사랑하고 있어. 그런데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면.      



레빈: 잠깐 가만있어봐. 나는 그런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것은 마치...... 내가 지금 배가 부르면서도 빵집 앞을 지나가다가 빵을 훔친다는 것과 같은 얘기니까 말야.      



스티바: 왜 그래? 때로는 빵이 못 견딜 만큼 좋은 냄새를 풍기는 수도 있을 거 아냐.      



 ‘뭐니뭐니해도 먹는 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하는 스티바에게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못 견딜 만큼 좋은 냄새를 풍기는 빵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그리는 스티바의 외도는 어딘가 장난스럽고 가볍다. 즉 심각하지가 않다.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스스로 아무리 조심성 있는 아버지나 남편이 되려고 애써도, 자기는 처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도저히 기억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믿고 사는 스티바에게 외도는 그가 인생의 행복이라 여기는 음식이나 시가처럼 하나의 행복이자 삶의 활력이다. 외도로 아내 돌리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음에도 돌리가 안나의 회유와 다섯 아이들을 돌보느라 잠잠해지자 그는 다시 외도를 한다.      


반면에 안나의 외도는 목숨을 건 사생결단이다. 브론스키와 정사한 직후의 대목은 비장하고 혼란으로 점철된 어둠의 이미지다.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사랑.      



“하나님! 용서해주소서!” 그녀는 흐느끼면서 그의 손을 자기의 가슴에 갖다대고 말했다. (...) 한편 그는 살인자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체를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이 시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었고, 그들 사랑의 첫 단계였다. 부끄러움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은 것을 회상해보니, 거기에는 뭔가 무섭고 구역을 치밀게 하는 것이 있었다. (...) 그래서 살인자는 정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노를 가지고 그 시체에 달려들어 그것을 질질 끌기도 하고 난도질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그와 마찬가지로, 브론스키 역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키스로 덮었다. 그렇다, 이 키스, 이것이야말로 수치를 대가로 사들인 것이다.      



남매가 똑같이 외도를 저지르는데 한 쪽은 가볍고 한 쪽은 무겁다 못해 무너질 지경이다. 추측해보면, 스티바의 행동은 관습적이다. 사교계에서 정부를 두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 비밀을 서로 모른 척 하며 용인한다. 브론스키의 어머니가 처음에 안나와의 관계를 반겼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브론스키와 안나의 관계가 단순한 외도가 아니라 사랑, 로맨스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브론스키의 어머니는 아들의 행동을 몹시 불편해한다. 브론스키는 안나를 위해 그의 출세에 유리한 자리를 마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사교계의 룰은 곧, 가짜는 가짜로만 남길 것. 가짜를 진짜로 만들지 말 것.      



이 정사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것으로 미루어 그것이 장려할 만한, 화려한 우아한 사교계의 정사가 아니라 일종의 베르테르식 절망에 가까운 것이며, 그녀가 듣고 있는 바로는 어쩌면 아들을 어리석은 행동으로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정열이라는 점도 그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나는 남편 카레닌에게 브론스키와의 모든 관계를 고백한 후 극도의 혼란과 불안을 겪는다. 안나는 사교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진짜 속내가 궁금했다. 자신은 카레닌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떤지.      



‘그런 질문은 말예요. 먀흐카야 공작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예요. 그것은 무서운 어린애나 할 질문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벳시는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 웃을 때 나타나는 그 전염적인 웃음을 또다시 터뜨렸다.      



 그러나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경우에 남편 된 사람의 입장을.      



남편이라구요? 그들의 속사정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아요. 잘 알고 계시듯이 , 훌륭한 사교계에서는 화장의 비결에 대해서 조차 얘기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사교계의 허위, 이중성이다. 가짜를 행하는 공범자가 되지 않고 가짜를 진짜로 바꾼 죄(?)로  안나와 브론스키는 사교계에서 고립 당한다. 무엇이 더 나쁜가. 가짜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람들과  가짜를 진짜로 바꾼 사람들.  하지만 안나와 브론스키 역시 파멸에 이른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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