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이라는 이름으로 새 폴더를 만들었다. 새 폴더에 새 문서를 담아야 하건만 나는 어째서 지난해에 쓰다만 글들을 복사해서 넣고 있는지. 미완성으로 두기에는 그동안 들인 시간이 아깝고, 완성하기에는 더 들어갈 시간이 고민스러운 글. 여기저기 흩어진 메모와 기록을 모아 정리해보기로 한 건 부족하게나마 『시간의 각인』에 대해 나름의 인상을 적고 싶어서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쓴 『시간의 각인』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의 작품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요작을 봐야 할 텐데 나는 극히 일부만 보았다. (『시간의 각인』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는 시간까지 포함하므로) 『시간의 각인』은 타르콥스키가 직접 쓴 영화론을 담은 책으로 1991년 독일어 번역본을 중역한 『봉인된 시간』의 첫 러시아 원고 번역본이다. 영화감독이 작품세계와 예술론을 직접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 감독은 대개 책보다는 영화로 말하니까.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파이아키아, 이야기가 남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내게 영화의 첫사랑 같은 인물이다. 그 이전에도 물론 영화를 즐겨 보았지만 타르콥스키 작품들을 접하면서 영화를 완전히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세계의 발견이었다.’
다시 말하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시네필들의 첫사랑.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타르콥스키 영화를 본적 없고 전설처럼 이름만 들었던 나는 그의 실체를 만나고 싶어 『봉인된 시간』을 읽으려 했지만 그동안 절판되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이다. 시네필들의 첫사랑이 『봉인된 시간』이었으니 새 번역으로 나온 『시간의 각인』은 돌아온 첫사랑인가? ‘봉인된 시간’과 ‘시간의 각인’ 제목이 주는 느낌이 달라서 번역 차이가 궁금했는데 이현우 선생님의 시간의 각인 강의에서 두 책을 비교해서 들을 수 있었다. 『책을 읽을 자유』에는 ‘봉인된 시간’ 버전 일부가 실려 있다.
그(타르콥스키)가 말하는 영화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다.
마치 조각가가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자신이 만들어낼 조각품의 윤곽을 보고 이에 걸맞게 대리석 덩어리의 모든 필요 없는 부분을 쪼아버리는 것고 흡사하게 영화예술가 역시 삶의 사실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정리되지 않은 혼합물들 속에서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예술적인 전체 형상의 없어서는 안 될 모든 순간들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책을 읽을 자유』, 253쪽)
같은 대목, 『시간의 각인』 버전
영화에서 감독이 하는 작업의 본질은 무엇일까?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조각가가 대리석 덩어리를 붙들고서 완성된 작품의 특징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군더기를 제거하듯이, 영화인은 생생한 사실들의 거대하고 불가분한 집합체로 이루어진 시간 덩어리에서 앞으로 나올 영화의 요소가 되어야 하는 것, 영화 이미지의 구성 성분으로 판명되는 것만 남겨두고 불필요한 것을 모두 잘라내서 던져버린다. 모든 예술 장르에 존재하는 예술적 선별 작업은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시간의 각인』, 87쪽)
시간을 빚어내는 것,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 감독의 의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영화의 요소가 되는 것만 남겨둔다. 감독은 시간을 조각하는 조각가가 되어 무엇을 담고 무엇을 제거할지 결정한다.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감독론이다.
영화에서 나를 굉장히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적 연결, 시의 논리이다. 내가 볼 때 시의 논리는 예술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시적인 예술인 영화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시간의 각인』,29쪽) 시적 연결, 시의 논리가 시간을 조각하는 조각가로서 염두하는 마음이자 시선이다. 시적인 영화. 시詩처럼 여백이 많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 시가 단번에 이해되지 않듯이 그의 영화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시의 문장을 곱씹듯이 오래 머물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시의 논리로 만든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되는가.
타르콥스키에게 시는 ‘문학 장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현실을 보는 특별한 성격의 태도’여서 시가 영화에 스며든다. 영화 속 전쟁 다큐 장면과 함께 등장하는 목소리, 영화 화면과 같이 흐르는 목소리는 타르콥스키 아버지의 시. 시인이였던 아버지를 시적인 영화를 만드는 아들의 영화에서 만난다.
‘제2의 타르콥스키’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도 시간의 흐름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 소쿠로프의 영화관을 담은 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부제는 ‘폐허의 시간’이다. 그가 연출하여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사상을 수상한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각색한 작품.
‘시간의 각인’ ‘봉인된 시간’. 영화든 문학이든 시간을 어떻게 담느냐에 대한 고민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블로그에 올리는 글조차도. 모든 것을 글로 담을 수 없으니, 글의 요소가 될 만한 것만 남긴다. 무엇을 남길것인가 ? 봉인된 시간은 보존하고 싶은 기억이며 시간의 각인은 그 기억을 새겨 넣겠다는 의지. 지난해를 돌아볼 때 블로그에 올린 사진이나 글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걸 생각하면, ‘봉인된 시간’은 기억을 재창조하거나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1월1일 새해 첫날의 ‘시간의 기록’을 쓴다. 양력 설을 쇠기에 아침 일찍 부터 양가 인사. 친정에서는 동생 가족과 모여 세배를 하고 떡국으로 점심을.
기억을 편집하여 적는 봉인된 시간. 가령, 와인을 몇 잔 마시고 목소리를 높여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거나 사실은 조카가 나만 보면 운다는 건 적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일은 모처럼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것. 윷놀이가 끝나고 극장으로 향했다. <<스파이더맨:노웨이홈>>작년 이맘때쯤 영화 <<소울>>을 아이들과 같이 봤는데 스파이더맨도 아이들에게 요즘 인기라고 한다. 그동안 마블 시리즈를 봐왔다면 재밌는 포인트들을 발견했을 테지만, 나에겐 구체적인 맥락을 알지 못해도 영화자체만으로 흥미로웠다.
(스포가 있습니다...)
스파이더맨 피터파커는 자신의 정체성이 밝혀지자 대학입학이 불가해지고 이를 바로잡고자 우주 최고의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간다. 사람들이 내가 스파이더맨이라는 걸 알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될려주세요. 즉 '피터파커 = 스파이더맨'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만 대신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의 기억을. 애인, 베프, 큰엄마 가까운 사람들도 포함하여. 피터파커는 가까운 사람들의 기억은 제외해달라고 주문을 계속 바꾸다가, 그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주문이 틀어진다. 그렇게 스파이더맨을 아는 빌런들이 같은 시공간에 모이게 되는데..
‘너의 약점은 도덕성이야’ 빌런이 스파이더맨에게 하는 말.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빌런들에게 두번 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닥터 스트레인지 말대로 그들 운명대로 죽게 두었다면 대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호의와 선의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걸 뼈아프게 경험하는 17살 소년 피터파커.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혼란이 벌어지고 수습하는게 영화 줄거리. 그리고 노웨이홈의 볼거리, 세 명의 스파이더맨(삼스파)가 한자리에 모여서 빌런들과 맞서싸운다. 모든 혼란을 봉합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길은 닥터 스트레인지 손에 달려있다. 그의 틀어진 마법을 다시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닥터 스트레인지는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에게 초반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모든걸 제자리로 돌리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너는 지워질거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까지도. 괜찮겠어?
이번에 피터 파커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도 좋다고 동의한다.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 자신의 존재를 기꺼이 지울 수 있어도 좋다고 선택할 만큼 피터 파커는 그 사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을까 ?
인생의 전환점에 함께한 순간들을 기억에서 삭제하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면 특별한 누군가(somebody)에서 순식간에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이 되어버린다. 영영 잊힐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잊혀지기로 선택한다. 기억은 곧 시간의 결과이므로 기억을 지운다는 말은 '각인된 시간'을, 없애버린다는 말. 여백 없이 빼곡하게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은 여백과 은유로 가득한 영화 <<거울>>. 아무 관련없어 보이는 두 영화가 『시간의 각인』을 읽은 나에게 각인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