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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Aug 15. 2021

영혼의 눈물

다시 시작하는 인어공주 이야기



 바다 세계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기억의 책>이 있다. 어린 인어들은 <기억의 책>을 읽으면서 자란다. 바다 왕의 막내 인어공주의 이야기다. 인간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마녀와 거래 후 물 위 세상으로 나간 용감한 인어공주. 200년 전 일이다. 인어공주 이후 다시 물 위 세상으로 올라간 인어는 없었다. 인어들에게 인어공주의 삶은 제각각 이해되었다. 어떤 인어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느니 광활한 바다에서 하는 모험만으로도 충분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인어는 두려운 마음으로 동경했다. 불멸의 영혼을. 


 영혼이 없는 인어들은 삼백 살이라는 영원의 삶을 살다가 바다의 거품이 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하얀 포말은 인어들의 흔적이다. 영혼이 무엇이길래 인어공주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신비롭게 빛나는 지느러미를 바친 것일까. 영혼에 대해서는 그동안 무수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명확하게 규정된 적은 없다. 그럼에도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인간의 사랑으로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영원을 약속하지 않고도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증거가 바로 <기억의 책>. 불멸의 영혼은 불변의 기억이다.      


“우리 인어들은 지금까지 인어공주를 기억하고 있지. 그러니까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을 얻은 거야. 물론 그전에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엄마 인어가 말한다. 

“영혼의 눈물을 흘렸죠! 저는 그 부분이 제일 좋아요. 어서 읽어주세요.”

어린 인어가 조른다. 

“그래 어디 보자. 네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지. 그러면 여기서부터 읽어볼까?”      





인어공주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네리오 왕자와 베리타 공주의 결혼이 성사되어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인어공주는 목숨을 잃고 바다 거품이 될 운명이었다. 상심한 인어공주가 갑판 위에 힘없이 앉아있을 때 언니들이 나타났다. 곱고 긴 머리카락이 몽땅 잘려나간 모습으로. 인어공주를 살릴 방법을 얻기 위해 머리카락을 마녀에게 준 것이었다. “자, 이 칼을 받아. 이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 뜨거운 피를 발에 적시면 다시 인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수 있어. 어서 서둘러!”     

 

칼을 받아 든 인어공주는 왕자가 잠들어 있는 천막으로 향하다가 불현듯 방향을 틀어 베리타 공주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왕자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공주를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보라색 천막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가 공주의 침대로 가까이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잠든 줄 알았던 공주가 눈을 뜨고 있던 것이다. 놀라움에 몸을 일으키며 공주가 소리쳤다. 


“아니, 이 밤에 갑자기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죠? 당신은 대체... 아, ‘길에서 찾은 여인’이군요! 

인어공주는 공주의 목소리에 놀라 칼을 떨어뜨렸다. 

“칼이라니! 나를 죽이려고 했나요?!”


인어공주는 고개를 있는 힘껏 좌우로 흔들었다. 당신을 그저 가까이서 보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내가 모든 것을 바치고 얻으려는 사랑을 단 한 순간에 얻은 당신을 보고 싶었다고. 공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인어공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깊은 바다의 파란빛을 지닌 눈빛을 보자 서서히 경계가 풀어졌다. 그리고 이내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혼란스럽네요. 정말...네리오 왕자는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던데. 그에게 물었어요. 왜 이 아가씨를 두고 나와 결혼하는지. 처음에는 부모님이 원해서 나를 만났지만, 나의 모습을 보고 결심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당신을 만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왕자는 어쩌면 나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당신은 나와 많이 닮은 것 같거든요.” 


인어공주는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처럼 두 다리를 가지게 되어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네리오 왕자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는 오해하고 있죠. 하지만 내가 아니라고 밝히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왕자와 결혼해야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혼란스러워져요. 그가 나를 오해하고 내가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 말이죠.” 


인어공주는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었다. 나예요. 내가 바로 왕자를 구했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대신 밝혀줄 수 있나요? 터무니없는 생각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밝혀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인어공주는 자신의 찢어질 듯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보라색 천막 안으로 빛이 스며들고 신비로운 기운이 인어공주를 감쌌다. 인어공주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끝과 손끝이 맞닿으며 발끝으로 사뿐히 움직였다. 인어공주의 몸동작은 마치 깊은 바다를 유영하듯 자연스러웠다. 바다를 가를 때 힘으로 공기를 가르며 가녀린 팔과 다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공주는 한 번도 이렇게 아름다운 춤을 본 적이 없었다. 인어공주의 춤은 단순히 몸의 움직임이 아닌 하나의 언어였다. 인어공주는 춤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슬픈 언어를. 심연을 닮은 슬픔과 고통은 인어공주가 가진 아름다움에 오히려 깊이를 더했다. 인어공주의 발은 불에 덴 듯 아픔으로 불타고 있었다. 고통을 넘어서는 춤이었다. 단검으로 찌르는듯한 고통이 공주가 마음속 깊이 담아둔 고통에 닿았다. 


“당신의 춤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본 적이 없어요. 지상에서 만날 수 없는 신비로운 슬픔.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슬픔. ‘길에서 찾은 여인’이여. 당신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죠?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기 마련이죠. 몇 해 전 배가 난파되었을 때였어요. 엄마는 물에 빠졌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어요. 바다에 휩쓸려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죠. 이후로 나에게 바다는 두려운 곳이 되었어요. 생명을 삼켜 버리는, 검푸른 그곳... 나는 혼자가 되었어요. 아버지도 몹시 상심했지만 곧 새 왕비를 맞아들였고 나는 왕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갈등이 생겼죠.”


 인어공주는 공주에게 바다가 위험한 곳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바닷속은 물 위의 세상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인어공주는 공주에게 바다의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그곳을. 빨갛고 푸른 신비로운 바닷속 정원을. 


 인어공주는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공주는 몹시 놀랐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공주는 인어공주에게 손을 맡기고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했다.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는 듯, 바다는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결혼식 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어버릴 테니까. 베리타 공주는 인어공주의 손에 이끌려 바다 앞에 섰다. 그러자 인어공주의 언니들이 나타났다. 언니들은 우아하게 헤엄치며 긴 지느러미를 내보였다. 지느러미는 푸른빛을 가득 머금고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주는 생각했다. 바다는 어쩌면 무서운 곳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명이 사는 곳이라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놀라운 곳인지도 모른다고. 


베리타 공주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인어공주가 가진 슬픔의 근원을. 왕자를 구한 건 사실, 인어공주라는 것을.  “아아. 이제 나는 어떡하죠? 왕자를 구한 건 당신인데. ‘길에서 찾은 여인’이여. 나는 평생 거짓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공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인어공주는 공주의 우는 모습을 보자 처음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은 점점 커져 인어공주의 발등에 떨어졌다. 진실의 눈물이 인어공주를 살린 것일까. 날이 밝았지만, 인어공주 몸은 그대로였다. 거품으로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잠에서 깬 네리오 왕자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왕자의 검은 머리는 더욱 빛나고 그는 하룻밤 사이에 더 늠름해진 모습이었다. 다가온 네리오 왕자에게 베리타 공주는 모든 것을 말했다. 왕자는 혼란에 빠졌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베리타 공주는 인어공주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운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당신은 물속에서 왔으니까요. 물의 정령, 운딘. 신비로운 당신과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네리오 왕자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위에 햇살이 그린 빛무리가 세 사람을 비추며 커다랗게 떠 있었다. 인어공주 운딘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렀고 걸을 때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베리타 공주는 본국에 남아 새 왕비의 방해에도 왕위를 이어받는다고 했죠? 인어공주 운딘은 네리오 왕자의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희가 되고요. 발에서 피가 나지 않으니 훨훨 날아다녔겠어요. 아 상상만 해도 멋져요.” 어린 인어는 꿈꾸듯 말한다.


“그리고 왕자는 세계여행을 떠나지. 오래 여행했다고 해. 그런데 왕자는 누구와 결혼했느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왕자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인어공주는 사라졌다고 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는 말도 있고 공기의 딸들과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어. 인어공주가 지니게 된 영혼은 전에 갖고 있던 목소리처럼 영롱하고 찬란했거든. 영혼도 다 같은 모습이 아니야. 영혼을 어떻게 가꾸느냐가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 영혼을 갖고 있는 자의 의무라고 해야 할까? 영혼은 늘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아서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물건처럼 많은 관심을 요구하거든. ” 


엄마 인어는 <기억의 책>을 덮으며 어느새 잠든 어린 인어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기억은 영혼에 쓰인 말이다. <기억의 책>은 다시 말하면 영혼의 책이다. 그 책의 이름은 ‘인어공주 운딘’




mermaid, john william water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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