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는 종종 마주치지만, 막상 읽으려면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이름이었다. 정치와 문학, 미학의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언젠가 마주하며 (책으로) 인사하고 싶었던 자크 랑시에르. 그를 <위대한 수업>에서 만났다.
‘봉쥬르 ebs’라는 인사와 함께 시작하는 강연의 주제는 <민주주의 리부트>로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을 밝히고 민주주의를 재정의한다. 오랜 시간 민주주의를 연구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역설적이고 모순적이서 어렵다고 말한다. 그 어려운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들려주기까지 그가 얼마나 이 주제에 대해 천착하며 반복적으로 이야기했을지 생각하며 들었다. 민주주의가 지닌 모순이 민주주의를 외면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보아야 할 이유이며 똑바로 볼 때 진짜 민주주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말,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현재를 위한 유일한 무기라는 그의 확신이 견고하게 들렸다.
1991년 소련 체제 붕괴로 민주주의 승리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으나 30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 심장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대선 결과에 불복종하는 일이 있었다. 민주주의 붕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도 온다. 민주주의는 선거제와 동일시 되었고 선거로 개인의 의사를 표현한다고 알고 있지만, 소수에게 권력이 독점될 때 선거는 무의미해진다. 민주주의 위기란, 대의제(선거제)의 위기이며 대의제가 아닌 진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진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떤 국가 형태도 사회형태도 아니다. (그러니 민주주의 국가, 민주주의 사회라는 말은 랑시에르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국가 형태가 아니라 시민이나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가 거부된 사람들의 집단 행동이다. 그 예는 프랑스 혁명 때부터 시작된다. 돈이 없어서 선거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 당시 소수로 여겨진 여성은 거부된 권리를 쟁취하기 투쟁에 참여했다. 민주주의는 대의제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집단행동으로 발전했다. 모두의 능력을 부정하는 국가와 사회의 온갖 논리와 끊임없이 싸우는 행위다. 민주주의는 우월성으로 통치자 피통치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시민의 능력, 아무나의 권력을 인정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역설의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시민이란 지배하는 자요 지배받는 자다.
시민의 능력을 증명하는 방법은 발화 행위에서 온다. 랑시에르는 1830년 프랑스 작가가 쓴 우화에서 예시를 가져온다. 과거 로마에서 지배자에게 이름 없는 피지배자 존재들의 말은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말로 여겨지지 않는다. 지배자가 거절할 필요도 없다. 그냥 듣지 않으면 되었다. 평민들이 다양한 발화 행위를 시작할 때, 즉 말하는 존재가 될 때 귀족들은 이들이 말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한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말을 소음으로 여기는 국가에 대항하여 자신들이 말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광장에 나온 말은 위계가 없고 모두의 말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자신의 말이 말로 들리느냐 아니면 소음으로 들리느냐. 소음이 아닌 말로 들리기 위하여, 평민들은 자신들에게 생각이 있으며 그런 능력이 있다고 입증하려 애썼다. 발화함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증명하며 스스로를 해방 시켰다. 해방은 비단 민주주의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과 관계된다. 랑시에르는 해방을 가장 먼저 실천한 부류로 프롤레타리아를 지목한다. 행동함으로써 평등을 증명한 사례다. 여성의 참정권 운동, 흑인 운동도 그러한 예다.
‘합의’는 대개 긍정적으로 인식되지만 민주주의에서 합의 논리는 민주주의 의미를 파괴했다.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합의에 이르는 것은 합치의 평등한 면이지만 선택한 동의란 뜻 외에 강요된 동의는 불평등하다. 불평등한 합의는 세계질서에 부합하는 유일한 방법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서는 대개 열강이 강요하는 질서다. 객관적 상황에서 하나의 해결책 밖에 없어서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필요다. ‘평화로운 합의의 세계’란 유일한 경제 형태로 단일화된 세계를 말한다. 똑같은 법을 강요받으며 자본가의 논리로 결정된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는 엄청난 결과가 일어났다. 노동력이 더 저렴한 국가로 산업활동 이동, 노동의가치를 높이고 집단적 저항을 막는 노동법 파괴, 공공 서비스 성격을 띠는 모든 사회적 기능을 경쟁에 내몰렸다. 그 결과 산업 조직, 사회조직이 대거 사라졌다. 사회연대망이 사라지고 세계에 새겨진 평등도 파괴되었다. 각 개인이 점점 홀로 서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결과로서의 국가유형을 낳았다.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후견인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가장 중요한 국가의 사명은 안보가 된다.
금융 위기, 이주 위기, 기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는 사회문제를 치료해야 할 악으로 규정한다. 치료사 역할을 하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소수 권력이 되었다. 공무 운영이 정치 계급에 의해 운영된다면, 인민의 선택이란 허구처럼 보인다.
엘리트에 의해 대표되지 못하는 민중은 극우 정당의 등장에 힘을 실어준다. 인민들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극우 정당은 세계화를 규탄하는 전문가가 된다. 이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합법적인 거주민 편이며 외국인 침범으로 위태로워진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논리가 역전된 상황을 마주한다. 표퓰리즘은 지배층과 언론이 퍼뜨린 논리로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가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이라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러한 표퓰리즘에 대항하여 형성된 조합과 사회망이 민주주의 전통을 이어간다.
오늘날 어떤 행위가 필요할까. 민주주의가 활력을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지구 착취가 한계에 다다라서다. 기술의 파괴적인 행진을 멈추어야 한다. 지구적 권력과 민주운동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운동에는 전 지구적 해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협력이 절실하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행동을 멈춘다. 그 예가 트럼프 정부의 파리 기후 변화 협약 탈퇴다. 세계화와 자본주의 논리는 모든 곳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그러한 논리가 초래한 재난을 해결할 유일한 무기다.
권력이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누군가는 지지한다. 민주주의가 모순적이고 역설적이어도 이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랑시에르. 민주주의의 근본적 핵심을 밝히는 일,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밝힌다. ‘행동의로서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랑시에르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진 힘을 신뢰한다. 민주주의는 모두의 것이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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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을 쓴 것은 놀랍지 않다. ‘랑시에르는 이 작업을 노동자의 말하기에 ‘사유의 지위’를 부여하는 시도였다고 규정하며 인민주의적 입론으로 곡해되는 것에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지배담론안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단적 주체들을 대신하거나 또는 대표해 이들의 목소리를 찾고 이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닌, 그들의 침묵하는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고, 이 목소리를 유통시키려는 것이 랑시에르의 기획이다.'
언론학과 학부 시절, voice to the voiceless라는 제목으로 어줍잖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래서 그랬나. 랑시에르의 기획이 몹시 와닿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