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레이디 수잔>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계획의 무력함을 동시에 떠올린다. 계획이 어그러져도 원래 그런거야, 라며 허탈히 웃어넘기거나 무계획을 계획으로 삼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계획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획을 세울 때 부푸는 기대와 희망이 소중해서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기본값으로 삼으면 기대가 터무니없이 커지지 않는다. 그것이 기대를 관리하는 방법이면서 인생의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한 안전판이 된다.
어쩌면 이것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지 않는 나의 어설픈 변명인지도 모른다. 강한 자기 확신과 상황 통제권이 있어야 가능한 철저함보다 조금 느슨한 계획이 나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 지난 팬데믹을 겪으며 불확실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생겨난 마음가짐일 수도 있겠다. 반면에,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이 그린 ‘레이디 수잔’은 계획이 어그러질 때 다시 새로운 계획으로 돌파하는 행동하는 인간이다. 철저한 계획가이면서 전략가. 삶의 여러 변수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아마도 레이디 수잔의 모토는 이것이리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계획을 세워라.
제인 오스틴이 열여덟 살 무렵에 쓴 『레이디 수잔』은 마흔 한통의 편지로 구성된 서간체 소설이다. 남편을 잃은 레이디 수잔이 시동생 집을 방문하는 편지를 시작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교계에서 소문난 인물 레이디 수잔의 방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보이는 반응과 심적 동요가 편지 내용이다. 특히 시동생 부인(수잔의 동서)은 레이디 수잔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긴장하며 방문을 경계하는데 형님 동서지간인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편지의 한 축을 이룬다. 대체 레이디 수잔이 어떤 인물이길래...파장을 일으키는가.
공식적으로 혼자 된 지 넉 달밖에 안 되었지만 레이디 수잔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고 미모와 매력으로 남성들을 휘어잡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그로 인해 가정을 파탄 나게 한 주범으로 비난을 의식한 레이디 수잔은 사교계와 거리를 두고 시동생 집에 머물며 ‘최대한 조용히 지내기’로 한 것이다. 슬프거나 상심해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자신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는 수잔은 이러한 모든 소문을 자신에 대한 ‘편견’이라 여긴다. 편견을 깨뜨리겠다는 일념으로 레이디 수잔은 더욱 예의와 품위를 지키며 사람들을 대한다.
‘나로서는 레이디 수전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거의 못 봤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어. (...) 균형미와 광휘, 우아함까지 겸비한 보기 드문 미인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어.’ 레이디 수잔의 최대 적인 동서 캐서린 버논의 말이다. 캐서린의 결혼에 레이디 수잔이 반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만약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을 몰랐다면, 아주 친한 친구라고 착각했을 지경이다. 그만큼 수잔의 태도는 동서 캐서린에게 다정했다. 다정함을 표현하는 수잔의 최대 무기는 화려한 언변. ‘검은색도 흰색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말솜씨이다.
나를 검은색으로 보았던 당신들은 나에 대해 착각했던 것이라고, 수잔은 작심하고 보여준다. 소문 속의 수잔은 요염한 요부였으나 실제로 만난 수잔은 점잖고 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캐서린의 동생 레지날드는 레이디 수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었다고 고백한다. ‘누나는 안타깝게도 지나친 편견으로 레이디 수전을 오해하고 있어요. (...) 저는 레이디 수전에게 편견을 갖고 찰스 스미스가 지어낸 비방을 그렇게 쉽게 믿었던 저 자신을 몹시 자책하고 있어요.’
사랑에 빠진 레지날드는 수잔과 결혼할 결심까지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누나 캐서린에게는 몹시 우려스럽다. 캐서린은 수잔을 여전히 경계하고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한 사람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은 어떻게 가능할까? 누군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시선은 그 사람에 대한 (비)호감도로 결정되지 않나. (비)호감이 눈을 멀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한다. 캐서린이 지닌 의심의 씨앗은 이미 뿌리를 내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한 의심을 공고히 하는 건 레이디 수잔의 딸, 프레데리카의 존재다.
열여섯 프레데리카는 엄마 레이디 수잔으로부터 재산 많은 남작 제임스 경과 결혼 하도록 종용받는다. 쾌활하지만 ‘뇌가 콩알만한’ 제임스 경이 싫어서 프레데리카는 학교에서 도망치기까지 한다. 자신이 세운 치밀한 계획으로 마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레이디 수잔은 딸의 행동에 몹시 분노한다.
‘나는 그 아이가 싫어하는 결혼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 가혹한 방법 대신 그 아이가 제임스 경의 청혼을 받아들일 때까지 아주 불편하게 만들어서 그 애 스스로가 선택하게 할거야.’ 품위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레이디 수잔은 혹처럼 붙은 딸을 떼어내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경제적 지원 수단이 되는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속물적 욕망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계산이 숨어있겠는가.
돈 걱정 없이 편안히 먹고 살만한 재산을 가진 (그리고 ‘솔로몬보다 덜 똑똑한’) 제임스 경은 레이디 수잔이 볼 때 더 없이 좋은 결혼 상대지만 프레데리카에게는 아니다. 돈 만으로 결혼이 성립하지 않는 입장은 엄마와 딸이 충돌하는 지점이면서 결혼에 대한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대사가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프레데리카에게 사랑 없는 결혼은 가능하지 않다. 반면 엄마 수잔에게는 ‘레이디’라는 지위와 품위를 지켜줄 금전적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결혼이라면 성립할 수 있다.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미모와 화술이라는 자원을 동원하여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레이디 수잔은 당당하고 뻔뻔하다. 자신의 계획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어그러진 계획을 수습할 다른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다. 플랜 A가 아니면, 플랜 B, 플랜 C로 간다. ‘계획은 아주 많아’. 부끄러움이나 불편은 주변 사람들 몫이고 갈등은 계획을 실천하는데 지불할 비용이다. 레이디 수잔을 영리하고 당차다고 볼지 영악하고 오만하다고 볼지는 독자의 몫이다. 남편을 잃은 여성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과 편견을 돌파하려면 그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담하게 묻는다.
복잡한 인간 내면을 계산하며 여러 계획을 세우는 레이디 수잔. 선택 당하는 여성이 아닌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레이디 수잔은 결혼에서 여성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연애와 결혼에서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제인 오스틴이 그린 세계는 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