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녀랑 비슷하지만
저자 이름이 '조남주'였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누구였더라? 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하면서 읽었던 책, <82년생 김지영>의 작가였다.
국민학교 때 우리 반 남자애가 자꾸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집까지 쫓아오고, 내 이름 부르면서 소리를 질러대서 너무 괴로웠었다. 그 남자애한테 나는 울면서 제발 쫓아다니지 말라고,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과 우리 아빠는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었다.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보다 공부 못한 남동생은 서울로 대학을 보내고, 시험을 훨씬 잘 봤던 나에게는 지방교대에 가라고 권했다. 이것도 성차별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 부모님은 여전히 그게 뭔 소리냐고 하실 것 같긴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 청소년소설도 새 책이 많아 종종 빌려 읽고 있다. <네가 되어 줄게>는 조남주라는 작가 이름만 믿고 빌렸다. 무슨 내용인가 떠들러 보거나 뒤표지를 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나! 재밌었다. 우리 모녀와 딱 1살씩 차이나는 또 다른 모녀의 이야기였다. 2023년에 중1이었던 딸 강윤슬, 1993년에 중1이었던 엄마 최수일. 24년에 중1이었던 땡글이, 94년에 중1이었던 나, 현재 땡글이 엄마.
단 1주일이라도 서로의 입장에서 살아본다면 우리도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음... 조금 나아지긴 하겠지만 큰 효과는 없을 것 같다. 책에서도 그렇다. 조금 다정해진 사이는 금방 다시 전투모드로 돌아간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한 일주일 사이좋았나? 좋은 마음은 정말 잠깐이고, 지금은 예전과 비슷한 이유들로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다시 문을 쾅쾅 닫고 엄마는 내가 너무 금세 돌아왔다고 악담을 퍼붓는다.
192쪽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최수일, 강윤슬이 부러웠다. 특히 최수일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에는 냉정했던 엄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 엄마랑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다. 동생을 아끼고 감싸주는 언니가 있다. 강윤슬 때문에 힘들고 지치고 괴롭다고 하지만 책 속의 윤슬이 정도면 양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 하나다. 자식 한 명이란 말이다. 한 명은 어찌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무려 애가 세명 아닌가! 세 명이 돌아가면서, 또는 세명과 내가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가며 겪는 갈등은 정말 지치고 또 지친다. 어제 챗지피티한테 물어보니 나는 지금 '정서적 자원이 고갈된 상태'라고 했다. '살아남는 엄마', '지치지 않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지치지 않고 이 시절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딸이 하나든, 셋이든 어쨌든 다들 힘들구나.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 하고 위로받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최수일이 나보다 조금 나은 것 같다. 게다가 최수일은 시간여행 같기도 하고, 유체이탈 같기도 한 신비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나. 나는 오늘도 더워죽겠는데 먹은 그릇 식세기에 넣고 부엌 바닥 닦고 싱크대 닦고 음쓰 버리다가 결국 애들한테 화를 냈다. 현실은 이렇다. 아이고, 자업자득이지 뭐.
이 책도 땡글이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우리랑 딱 한 살씩 차이는, 나이차가 같은 모녀의 이야기라고 했다. 지난번 <브릿지>를 읽고 땡글이가 말했다. "제가 좀 감동을 받았거든요" 네~네~제발요.
땡글이가 이번에도 뭔가를 느끼기를 바란다. 내가 그 아이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듯이.
나는 작은 실수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곱씹고 자책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는 건지, 어쩐 건지 실수를 하고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되레 나는 윤슬이도 아닌데, 딱 하루 연습했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점점 실수가 줄고 자신감이 생겼다.
138쪽
"떡볶이는 왜 항상 맛있을까? 마흔이 넘도록 떡볶이를 좋아할 줄은 몰랐지 뭐야."
동감. 마흔이 넘도록 운동화만 신을 줄도 몰랐고, 아이돌을 들을 줄도 몰랐고,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할 줄도 몰랐다. 돌이켜 보면 엄마는 우리 나이 때 분명 우리 같지 않았다. 취향도 스타일도 생각도 훨씬 어른스러웠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며 사람들이 점점 늦게 철드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냥 계속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윤슬이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겠지.
180쪽
... 언젠가 나를 진짜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길까 궁금했다. 내가 먼저인 사람, 아니 전부인 사람,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내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내 간절한 바람이 2023년의 윤슬이를 1993년으로 불러왔던 걸까. 그럼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윤슬이인가.
186쪽
... 때로 실망하고 후회하고 도망가고 싶던 내 마음을 윤슬이는 짐작도 못 하겠지. 내가 먼저인 사람, 내가 전부인 사람, 나로 인해 존재하고 내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 윤슬이였구나.
187쪽
아무리 엄마와 딸이라도 매일 매 순간 좋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믿게 됐다. 그거면 됐지.
1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