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된 영상
정후의 일뿐만 아니라 세상엔 이런저런 잣대에 맞춰 편집된 세계가 얼마나 많을까. 당장 내 곁의 미호부터도 자신 같은 사람을 잘라 내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금이작가 소설을 읽고 싶어서 골랐다. A컷을 위해 잘려나간 B컷의 얘기라... 궁금했다. 나도 어딘가에 글이나 영상을 올릴 때,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상당히 편집을 하는 것 같다. 스스로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허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허영 같은 것이 섞여서 가능하면 '있어 보이게' 포장한다. 내 잘못은 쏙 빼고 남이 잘못한 것만 부풀려서 말하기도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SNS 속의 사람들은 다 잘나보인다. 걱정도 딱히 없어 보인다.
<정희원의 저속노화>를 즐겨 듣는데(보지 않고 듣는다) 정희원 님이 '스트레스가 많다'며 술도 마시고 잠도 잘 못 잤다고 했다. 현재는 안 그러신 것 같긴 한데, 그 말을 듣고 의아했다. 아니, 책 내는 것마다 잘되고 의사고, 유튜브도 잘되고, 의사 그만두고도 라디오도 맡고 서로 모셔가려고 하던데 뭐가? 뭐가 스트레스일까? 피곤하기야 하겠지만 스트레스받을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겉으로는 다들 멋있고 잘나 보여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는 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람만의 걱정거리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특별한 문제없고, 어떤 집은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당장 나와 우리 가족도 잘만 포장하면 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학교선생님, 아빠는 대기업 부장, 첫째는 영재학교에 다니는 발레 전공생, 둘째는 뭐든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 막내는 책 많이 읽고 공부도 안 하는데 매번 받아쓰기 100점 맡는 뽀얀 얼굴의 귀염둥이, 알콩달콩 행복한 가족. 이런 식으로 보여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일단 나는 건강검진 때마다 여성기관에서 예사롭지 않은 혹이 발견되고 잔잔한 걱정거리가 항상 대여섯 개 있다. 남편은 회사 언제 짤릴 지 모르고 키도 작고 얼굴은 납작가오리처럼 생겼다. 첫째는 지금 학교에서 쫓겨날 판이고, 둘째는 첫째 못지않게 돈을 많이 뜯어가며, 막내는 불안과 강박이 심하다. 여기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가족을 내 입으로 너무 까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줄이기로 한다.
이렇듯, 걱정 없는 집안이 있겠나. 괌여행 가서 딸하나 아들하나 엄마 아빠 네 식구가 활짝 웃으며 찍는 사진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안다(화목한 가정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당장 스파게티 사진 한 장을 찍어도 옆에 떨어진 김조각은 잘라내 버리는 걸. 잘 편집된 유튜브는 말해 뭐 해.
이 책의 주인공 선우는 학교에서 잘 나가는 무리인, 서빈이와 친구들의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정을 받기도 하고, 그들 사이에 은근히 끼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그림자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잘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군림과 따돌림이 있었다. 영상에 그 모습이 드러났지만 그것은 선우에 의해 착착 편집된다. 막상 선우는 그 내막을 알지 못한 채로.
이야기가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잠을 참아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읽고 잤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많아서 좋겠다. 부럽다. 다만 안 읽어서 문제. 책을 왜 안 읽는 거야. 이렇게 재밌는데?! 유튜브보다 더 재밌다. 이금이작가님 책이 학교도서관에도 있고, 밀리의 서재에도 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읽어봐야겠다.
학교 일정은 코로나 상황에 따라 언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아무리 변동이 잦아도 확실한 건 우리의 삶은 진행된다는 거다. 멈춰 선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도 우리는 살아가고, 변하고, 자라는 중이다. 그 사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편집할 수 없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