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육아는 공감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
82년생 김지영의 영화 개봉을 통해 다시 한번 젠더 논쟁이 극심해지고 있다. 남성 vs 여성의 기본적인 갈등은 물론이고 해당 내용을 보고 나서 남성 vs 남성, 여성 vs 여성까지도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민주당 청년위원회의 남성도 차별받는다는 논평에는 여성들의 차별 경험을 축소한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김나정 아나운서의 여성이라서 좋은 점도 있었다는 얘기에는 엄청난 악플이 쏟아지며 심지어 고소장 접수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왜 여성과 남성의 갈등 구조는 해결되지 못하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일까? 다른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사회와 더 나아가 아직 인류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관행처럼 받아들여지던 남성과 여성의 위계 관계에 대해서 청산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역할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차이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고정된 자연적 역할(예를 들면, 성별)과 사회적으로 부여된 사회적 역할(예를 들면, 아빠와 엄마)로 구분할 수 있는데 주로 사회적 역할을 고려해야 하는 것조차 자연적 역할의 차이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사회적 역할을 생각할 때는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따른 사람의 차이"라는 고정 불변이 아닌 사회의 진보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우리가 한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데, 자연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권리 삼아 무기화하기도 하고 이를 당연하기 때문에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대하는 미성숙한 시민의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선언하고 싶다.
징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한국은 특히 이런 문제를 혼선해서 보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남성은 남성이라는 자연적 역할에 의해서 국방의 의무라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기 때문에, 여성이 자연적 역할에 의해서 부여받은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 등에 대해서조차도 사회적 역할과 연계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을 맞추기 위해 양성평등제 기반의 여성 쿼터제 등이 실시되며 자연적 역할로 부여된 성별에 사회적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기회 제공을 해주는 것은 여성의 사회진출의 증가와 더불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폐지될지라도 성별에 의해 기회를 제한받는다는 생각을 실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 입장에서 당연하게 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 임용을 넘어서 여성 인력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사회 전방위적으로 기업에서 진급에서조차 특히 현재의 30~40대는 남성은 역차별이라고 느끼고, 여성은 아직도 부족하며 그런 생각은 여성에 대한 전방위적 차별에 대한 축소적인 생각이라는 갈등은 실재할 수밖에 없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느끼는 지점들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보고 있는데, 40일 정도를 지나가는 시점에 가장 크게 느끼게 된 점은 역할에 대한 공감을 조금 더 넓게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육아휴직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자율성"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 역시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빨래를 어떻게 할지, 설거지를 어떻게 할지, 집안 환기는 어떻게 할지, 청소를 어떻게 할지, 요리를 어떻게 할지, 육아는 어떻게 할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오퍼레이션 속에서도 어쨌든 배우자와 어느 정도만 상의를 하고 나면 그에 대한 실행과 책임은 나에게 주어진다. 내 자유시간을 보장받고 싶으면 내가 생산적으로 움직이면 되고, 딱 그 정도만 하고 싶으면 어느 정도 비생산적으로 움직여도 된다.
그런데 생산적으로 움직이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인생은 기회비용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합리적으로 살고자 했던 내가 도대체 그 합리성의 단 1%도 이해하지 못하는 2명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뭐라도 하나 더 보거나 쉬려고 점심시간에도 특별한 약속 아니면 15분 만에 혼자서 식사하고 자유시간으로 쓰던 사람이 준비하는 것 빼고 단순히 "밥을 먹이는 행위" 에만 1~2시간을 써보면 우울증이 안 걸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실무 할 때 주변 동료가, 팀장님이, 회사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공감하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속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진짜 끝이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노동을 수행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인정해주는 사람이 1명도 없는 가사와 육아를 하면서 속상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백날 예쁘고 귀여운 옷 챙겨서 입혀 보내려고 노력하고, 나는 남은 밥 먹어도 애들은 좋은 거 찾아서 먹이려고 챙기도 누가 나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나 역시 실무 할 때는 "실무"에 대해서는 모든 일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중요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오히려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단순 반복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에 대한 업무 생산성 개선과 효율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고 자부하지만, "가사/육아"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실제 경험해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항상 배우자에게 궤변처럼 얘기하던 것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분명히 아빠보다는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가족의 미래 하나씩 준비하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나는 밖에서 더 열심히 하고, 너는 안을 챙겨줘야 한다. 아이들이 5~7세 정도가 되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이고, 조금 더 크고 나면 내가 더 많은 역할을 할 테니 그때까지는 도와달라(다른 말로 희생해달라)"는 것이다.
막상 내가 휴직을 해보니, 우리 가족이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저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희생을 강요한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공감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게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가사와 육아에 대해서 어떤 것도 제대로 공감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돈을 잘 벌어오면 그것으로 모든 의무에서 해방된다는 비겁한 자기변명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나의 세대는 국민 연금 수급도 불확실하고, 오랜 세월 형성된 가치관과 사회 구조적 인식의 문제의 굴레 때문에라도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최선봉에 서야 하는 것은 그것의 불합리성을 떠나서 자연스러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남성들이 국가에서 보장된 육아휴직을 쓰면서 온전히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해봤으면 좋겠다. 그게 어떤 면에서는 이 사회가 젠더 갈등을 넘어서기 위하여 "경험"에서 오는 공감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회적 방법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는 젠더 갈등은 사전에서조차 사라지는 사회, 오직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기 위해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온전히 집중하고 공감을 기반으로 공동체의 올바른 방향과 인류애를 실천해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성에 대한 평등과 인권이 지금도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도 가까운 시절까지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해 준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이 영화는 모두가 꼭 봐야 되는 영화다. 남녀평등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의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의 실제 주인공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우리에게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사람들은 종종 제게 묻습니다.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이렇게 답합니다. 9명 모두요.
미국 역사에서 대부분 대법관 9명이 모두 남자였어요.
그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적 역할로서 주어진 성별에 고정관념을 통해 차별을 조장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그러한 차별적 시선에 의해 세상을 이해하여 인위적/고정적을 배분하고자 하는 경향과 수치적 평등이 절대적 평등이라고 착각하는 모든 인식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역할과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방 대법관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거기에 성별은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얘기한다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내가 40일 정도 육아휴직을 통해서 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아마 생각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아빠의 육아휴직은 남성이 세상을 조금 더 공감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