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삶의 방향성과 공동체의 방향성에 대하여
밀리지 않고 쓰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50일 차의 생각의 단상을 67일 차에 적고 있다. 어느새 2개월의 시간이 지나가며 육아의 삶과 개인적 목표의 삶의 충돌되는 지점이 발생할 때 생기는 양가적인 감정은 모든 육아휴직을 선택한 사람들이 느끼는 굴레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나 역시 정신적인 혼돈 속에 있는 기분이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의미 있는 시간이자 행복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개인의 희망일 뿐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간은 모든 개인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아이의 밥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소모되는 시간만큼 내가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더 알차게 준비할수록 나를 위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아이가 좋아하는 곳을 가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들은 나의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들고 가족을 벗어난 또 다른 사람들과의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줄어들게 만든다.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균형점이 양쪽 모두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순간에 찾아오는 밑바닥 근처의 감정은 어떤 것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돈과 행복이 관련 없다는 말은 폭력적인 말'이라는 최인철 서울대 교수의 말을 빌려서 생각해보면 '육아와 부모의 불행한 감정이 관련 없다는 말' 역시 폭력적인 말일 수 있다.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행복한 시간에 불행이 끼어들 틈이 있느냐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은 크게 2가지 부류다. 아직 육아를 해본 경험이 없거나, 이미 육아를 졸업했거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없듯이, 육아의 모든 순간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나와 세상의 관계의 2차원적인 선택이 아니라 나와 아이와 세상이라는 3차원적인 복합적인 선택에서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면서도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군 중위로 근무하던 마지막 연차에 인생의 선배로서 전대장님께서 조언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본인이 이만큼 살아보니 아이는 2명 이상은 있는 것이 좋고, 이왕 낳을 것이면 절대 4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 가지지 말라는 것.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니 아이가 1명인 집은 아이들이 외로워하고 계속 부모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계속 힘듬이 이어지며, 4년 이상 편차를 두면 1번에 끝낼 기간을 다시 리셋해서 2번을 하게 되는 비효율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내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이 얘기에 공감했으나 가장 큰 1가지의 변수가 들어가니 모든 이야기는 달라졌다.
"부모 중 1명은 전담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회사가 배려해준 덕분에 육아휴직을 쓰고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여성도 아직까지는 육아휴직이 눈치 보이는 시점이고, 그래 봐야 1년이다. 2019년 10월 1일부터는 1년을 사용하고 1년은 단축근무를 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지만 이 역시도 부족하다. 이 상태에서 아이가 두 명이 되면 첫째와 둘째는 서로를 가족이 아니라 경쟁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육아의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게 되고 아빠, 엄마, 첫째, 둘째 모두가 준비되지 않은 갑자기 불행한 지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율은 지속해서 급감하고 있고 현금 지원 정책이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공동체의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체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의 인구 정책에 대한 대전략은 없고 지자체별로 중구난방으로 운영되는 출산장려금 제도는 먹튀 현상마저도 발생시키고 있고, 그마저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다. 이미 저출산의 문제를 넘어 지방 지역은 우리가 상당한 규모라고 알고 있던 소도시들마저도 인구 소멸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는 아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미 내가 경험한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보통 오후 4시까지지만 그 시간까지 절대 아이를 찾으러 갈 수 없는 부모들은 교육 목적보다 우선하여 학원 뺑뺑이를 돌릴 수밖에 없고 그보다 먼저 끝나는 초등학교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하다. 공동육아와 같은 움직임도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애들 노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놀이터 이용제한까지 운영하는 아파트가 있다는 웃픈 현실은 우리 공동체 스스로가 육아라는 것과 아이들의 성장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인구 초고령화 시대는 가속화될 것이고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투자해야 하는 국가적 재정여력은 결코 경제성장이나 노년층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재정여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라도 무언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개인이 자신이 추구하던 삶의 방향성에서 잠시 공동체를 위한 가치를 위해 그 속도를 늦췄을 때, 이때 우리 공동체가 그 개인에게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느냐가 그 공동체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
마치 이때가 기회인 것처럼 모든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기업이 더 많은 사회, 공동체의 방향성보다 쉬운 방식으로 현금 지원정책을 최우선으로 사용되는 재원 대비 오히려 개선점은 더 없어지는 정부 정책이 남발되는 사회, 이미 육아가 끝난 사람들은 놀이터 이용제한 시간이나 노키즈 존 논란을 들고 나오면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올가미 씌우는 공동체의 환경 속에서 낙오되는 개인들을 보며, 그 길에 진입해야 하는 예비 부모들마저 그 선택을 두려워하고 아예 포기하게 되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아닐까?
이런 현실 속에서 육아휴직 중에 퇴사 아닌 승진 통보한 회사가 기사화되는 것을 보며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 이것이 오히려 육아휴직 중에 퇴사를 강요당하거나 돌아가도 자리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가 좋은 사회가 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면서 보편타당하게 경험해야 하는 상황이고 오히려 아래와 같은 기사가 언론에 바이럴 되고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는 곳들이 철퇴를 맞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육아휴직 신청한 부모에게 퇴사 종용한 회사, 소비자들 뿔났다. 불매운동 시작"
"육아휴직 복귀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한 회사, B2B 거래선까지 끊겨"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향성이 공동체가 추구하는 왜곡된 방향성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개인 단위에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나 단일 조직/기업의 눈앞의 이익보다 더 나은 가치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먼저 고려할 줄 아는 주체들이 많은 세상,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는 주체들이 더 나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깊이 있는 철학과 전략으로 선거 일정 관계없이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정권과 관료사회, 이런 기반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의 철학이 있는 세상이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부모가 되는 시대에는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