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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엔진 Jan 01. 2020

시간은 평등한가?

시간이 서비스가 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하여

 2020년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38살이 되었다. 이제 2년만 더 지나면 불혹(不惑)이 된다. 현혹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식견과 지혜라는 How to 가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측할 수 없게 갑자기 다가오는 행운과 불행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인생 전체를 통해 계속 갈고닦아나가야 하는 신념체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갑자기 2020년의 첫째 날. 지금도 틱톡으로 흘러가는 무심한 시간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내 인생에서 항상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는 좋은 영화 중 하나가 "인타임" 이다. 커피 1잔 4분, 권총 1정 3년, 스포츠카 1대는 59년. 화폐가 아니라 시간이 거래의 대상이 된 세상. 그 세상에서 시간을 다 쓴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타임존의 가장 하급 체계에서는 출근길에 누군가의 시간이 정지되어 죽어있어도 "또 한놈 갔군" 이라는 한마디로 상황이 정리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시간은 한낱 도박장에서 유희를 즐기기 위한 수단에 불가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생긴다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더 이상 내 남은 시간을 보지 않는 것" 이라고 대답할 만큼 극단적 재화로 작동한다.


 성실하게 그날의 일을 하고 대출이자를 상환한 주인공의 어머니는 갑자기 평소 1시간을 받던 버스비가 당일 2배로 오를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1시간 30분만 남겨놨던 그녀는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지 1초가 모자라서 그녀는 지독히도 고난했던 삶을 자신의 아들의 눈 앞에서 내려놓았다.

갑자기 폭등한 버스비로 인하여 정시에 도착하지 못해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어머니...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많은 차별적 구조 속에서 살지만 유독 시간에 대해서만은 평등한 재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언제나 냉철하고 명확하며 그 흐름은 물리적으로조차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많은 차별을 얘기하는 TV 프로그램, 도서, 강연 등에서 세상에 많은 차별은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지 않은가요?" 


 그리면서 보통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밀도 있게 사용하느냐에 당신의 인생이 결정된다" 는 진부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쉽게 정의해보기 위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A와 B라는 2명의 실무자가 있다. A의 회사는 업무 생산성을 위해서 실무에 필요한 통계수치나 자료들이 제공되는 유료사이트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B의 회사는 그런 것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개인의 실무적 역량은 유사하다고 가정하면 동일한 퀄리티의 인사이트와 업무 성과에 도달할 "확률" 은 A가 높을까, B가 높을까?
 C와 D라는 2명의 통근자가 있다. C는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할 수 있는 돈이 없어서 1시간이 넘는 시간을 2번의 환승과 도보 10분 이상으로 매일 대중교통 이용만으로 에너지 소모가 극심하지만, D는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할 수 있었고 택시도 기본료 수준으로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해도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 없다. C와 D가 더 나은 성장을 위해 자기 계발에 자신의 인생을 투입할 "확률" 은 C가 높을까, D가 높을까?
 E와 F라는 2명의 엄마가 있다. E는 아이를 낳았지만 육아휴직을 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월 220만원에 아이를 잘 봐주시는 아주머니를 구할 수 있었기에 다행히 일은 계속할 수 있었지만 일하고 나면 손에 쥐는 게 없다. F는 똑같은 시기에 출산을 했지만 바로 옆에 친정이 있어서 평일에는 매일 아이가 매일 친정에 있다. 용돈을 따로 챙겨드리기는 하지만 내가 어려울 때는 사정을 말씀드리고 굳이 드리지 않아도 된다. 10년 후에 경제적으로 유복할 "확률" 은 E가 높을까, F가 높을까? 


 이러한 예시를 보고 나서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모두에게 시간이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가? "돈" 을 통해서 서비스/공간을 소비함으로써 시간을 살 수 있는 B, D 에게는 똑같은 하루의 시간이 A, C와 비교해도 구조적으로 밀도 있게 돌아간다. 동일한 서비스를 더 안정적이고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F 에게는 똑같은 시간의 근로소득의 차액이 E 보다 역시 구조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나와 완전히 동일한 환경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그렇게 밖에 활용하지 못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말이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흐르고 있을지 몰라도 상대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불평등하게 흐르고 있다.

  

 모두의 출발선이 완전히 동일한 상태라면 그 출발선에서 시작한 모든 이들의 시간의 밀도 있는 사용과 결과에 대한 차등을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명제도 현대 사회에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의 대표적인 트렌드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2020년 트렌드 코리아에서 선정한 1가지 트렌드가 편리미엄이다. 편리미엄의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돈이 있는 개인에게는 시간의 밀도는 구조적으로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VIP에서 그린 것처럼 상위 1% 를 위한 극한 수준의 서비스는 나머지 99% 시간을 구조적으로 저밀도로 만들어버린다. 

가격이 낮아지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이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계층은 존재한다.

 이 정도 지점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명확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지점이 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수많은 편의가 가격적인 혁신을 만들어갈 때 과연 어떤 구조를 통해서 가능한 것인지 인식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한다는 것. 지금 세상은 인터넷의 출현 이후 모바일이라는 최적의 전달 매체를 통해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고 정보의 전달 비용이 기존과 대비하여 거의 무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소비자가 가격을 지불했을 때 사회 공동체의 한 파트인 기업으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으면서, 그리고 기존에 기득권을 잡고 있는 기업과 경쟁하고 시장을 재편하려면 혁신이라고 외치며 최소한 아래의 3가지는 실행해야 한다. 


1) 생산비용 절감 / 2) 생산성 증가 추진 / 3) 인건비 절감 

  

인건비 절감은 나머지 2가지 요인보다 더 낮은 비용으로 쉽게 달성이 가능하니 이 방향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매우 자연스럽다

 생산비용 절감이나 생산성 증가의 추진은 이를 위해서 연관 생태계와의 고려사항, 내부적인 투자 집행 등이(예를 들어, 오프쇼어링을 결정하더라도 공장 건설부터 모든 운영 시스템의 신규 구축이라는 투자가 들어간다)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지만 근로자를 구조조정 및 해고하거나 비정규직화, 도급화하거나 이런 모든 용어의 완결판인 긱 이코노미와 플랫폼 노동을 주장하면서 법적인 규제만 피하면 상대적으로 가장 쉽고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걸 추진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세상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혁신가로 착각하거나 자기 합리화를 하기 좋은 구조라는 것이 이 구조의 가장 악랄한 지점이다. 누군가의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악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 어렵다는 것.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내가 누리는 편의가 누군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노동 및 분배의 구조를 흔들어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다시 부메랑이 되어 나의 삶에 어떻게 돌아올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산수단의 양극화는 부의 양극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결국 물리적으로 평등한 시간마저도 구조적으로 밀도의 차이를 만들어 이러한 양극화를 가속화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시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소수의 편에 서서 영생을 누릴 것인지,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막을 것인지.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2020년이 밝았다. 모두가 새로운 1년을 맞이하여 작년을 회고하고 올해 더 나은 개인과 가족의 삶을 계획한다. 계획에 매몰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량적인 목표는 수립하지 않고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서만 점검한다. 올해는 그 뱡향성에 하나의 가치 판단 기준을 조금 더 다듬고 발전시켜보려고 한다.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고, 반대로 양보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가 복직 이후 나의 회사가 지금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회사의 발전이 곧 공동체의 발전이 되도록 작동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2020년의 첫째 날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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