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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엔진 Jan 09. 2020

진짜 꼰대스러움에 대하여

개인의 인성보다 제도적인 부분을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2019년을 강타했고 앞으로도 계속 트렌드로 사용될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꼰대" 라는 말을 선택할 것이다.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다. 

가장 유명해진 꼰대를 굳이 찾아보자면 이 분 아니겠는가

 이 은어는 권위를 이용해 부당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한 단어이고 지금은 밀레니얼, Z세대와 기성세대의 가치관 충돌로 인하여 직장상사부터 시작해 이제는 "젊꼰(젊은 꼰대)" 라고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즉시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용어로까지 그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심지어 BBC 방송국에서 2019년 9월 23일 자사 페이스북 페이지에 '오늘의 단어'로 'kkondae(꼰대)'를 소개하며,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다른 사람은 늘 잘못됐다고 여김)' 이라고 설명하며 글로벌 진출까지 하게됐다. 


뭐든지 글로벌로 진출하면 자랑스러워 하는 한국 문화;;;

 꼰대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간혹 꼰대들의 반격도 시작된다. 2019년 11월 어느날, 어느 아재의 반성문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요즘 것들의 무책임함을 지적하는 일갈이 많은 이들의 페북과 링크드인에 공유되면서 사이다 발언으로 뜨거운 반응이 일어났던 글이 아래와 같다. 

 가장 최근에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가 중 한사람이자 언젠가 반드시 함께 협업해서 일을 하고 싶은 박창선님까지도 페북에 이런 글을 올려주시며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다름을 꼰대스러움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사이다 발언을 해주신 내용이다. 

이 글도 싸이클링 40km 타고 지쳐있는 상태에서 얼음컵에 콜라 섞어서 마셨을 떄의 청량감을 준...

 다름이 인정되는 세상을 누구보다 바래왔던 우리 사회가 오히려 다름을 공격하고 나와 같은 진영이 아닌 경우 논리나 팩트와 관계없이 무차별적인 난사가 이뤄지는 최근의 분위기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개개인별로는 절대 정의할 수 없는 세대를 트렌드 키워드로 만들고, 이를 통해서 돈을 벌거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것들을 통해 프레임을 형성하며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갈등을 키워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기에 꼰대스러움에서 우리가 주의하고 한발 떨어져서 봐야하는 생각의 지점은 세대, 권력의 상하 관계가 아니라 어떤이가 누군가에게 부당한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능력과 자질이 없는데 오직 사회가 부여한 권위에 의존하여 행동했던 아버지, 선생님에 대한 비판에서 부터 출발한 단어가 꼰대인만큼 우리는 언제나 "부당한 권위" 에 대하여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 부당한 권위란 무엇일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리와 권한에 책임질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이 그것이 주는 권력에만 취하여 행동하는 것이 부당한 권위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시민에게 총질을 하고, 기업 대표라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는 의견을 개진한 아랫사람에게 재떨이나 물컵을 집어던지거나, 인사권을 가진 직장 상사가 능력과 성과에 관계 없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평가권을 행사하거나, 부모라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학대한다면 이는 모두 부당한 권위에 해당한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보면 그것을 포기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진성 꼰대들의 가장 안좋은 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후자를 선택한다는 것이고 그 선택의 괴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갑질 문화, 미투의 시발점도 큰 틀에서 보자면 이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모든 부당한 권위는 이러한 자기합리화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지점이 생긴다. 위계 관계가 낮은 사람에게는 어떤 권위도 없는 것인가? 그리고 권위의 하위 관계에 있는 사람은 무제한적인 까방권 기반의 공격권만 있는가? 


 권위가 부당함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나이의 많고 적음, 권력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타당해지고, 권위가 올바르게 세워질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떠한 권위도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은 영원히 불편만을 말하는 불만러는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의 축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미 무언가를 통해서 일정한 포지션을 얻은 사람은 그 권위를 부정하게 사용할 수 있다. 꼰대가 되기 전까지는 그 사람도 예전에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말로가 모두 새드 엔딩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말자. 확률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종국에는 비참해질 확률이 훨씬 높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지점을 공유하고 싶다. 꼰대스러움을 어떻게든 줄여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대 수메르인들도, 소크라테스도, 중세시대에도 "경험이 많은 자들이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자" 들에게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판, 판단)" 을 해왔다. 이 문제는 인류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경험차에서 오는 생각의 간극에 의한 개인의 개별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출처 : https://m.cafe.daum.net/ssaumjil/LnOm/2192066?svc=topRank
출처 : http://www.moi.so/web/moi_pg.aspx?moicd=MM000008259
출처 : 위키피디아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해결할 수 없는 개인 간의 생각이 차이를 가지고 갈등의 축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해있는 조직,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의 논리에 꼰대스러움이 혹시라도 녹아져 있느냐,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냐는 점이다. 


왜 만18세는 선거권을 주면 안됐던거야?
(얘네들이 어려서...?)
왜 예비창업패키지는 40세 이하에게만 지원했던거야?
(나이먹으면 잘못할까봐...?) 
실패를 장려한다고 하면서 어떤 시스템과 자산화도 없이
실패하는 사람을 좌천시키는 조직문화는 어떻게 이해해야해?
(이 정도면 하지말라는 것 아니야...?)
도전하라고 하면서 권한과 예산은 하나도 배정안하고 그걸 틀어막고 있는
사람들한테 굽신거려야 겨우 뭘 할 수 있는 것은 왜 그런거야?
(가진 걸 내려놓는게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참 그래...?)
왜 다른데서 사고가 나면 인생에 한번뿐인 수학여행이 취소되야하는거야?
(교육청이나 어른들이 혹시 문제 생기면 책임져야 하니까...?)
 

 위와 같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얘기하는 일반적인 상식과 배치되는 국가와 조직 내의 문제의식 없이 꼰대스러움이 녹아있는 제도들에 대하여 끈임없이 질문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권위는 책임지는 자세에서부터 만들어진다. 그리고 모든 제도는 그것이 사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보편 타당한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결코 피해를 봐서는 안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내가 가진 권한이 커질수록 그 권위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장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제도를 수정/보완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들이 응원받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경험치의 간극이 있는 사람들 간에도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고 좋은 것들은 위대한 유산으로, 폐기해야 할 것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분리수거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꼰대스러움이란 개개인의 인성의 차이를 자신의 편의때문에 공격하고, 사회적인 제도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으며 실제 자신의 생활 속에서는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런 모습이 심지어는 제도화되어 부당한 권위를 형성하게 되는데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꼰대스러움에 젊음이 함부로 늙음을, 늙음이 함부로 젊음을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이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굳어버린 우리의 머리와 손실기피성향이 강한 편의주의에 의한 개개인의 방관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꼰대라는 단어는 계속 사회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 단어가 활동하게 될 공간의 영역을 넓게 주는 것에 힘을 보태지는 말자. 책임지는 개인과 이를 시스템화하고 한걸음씩 진보하는 사회. "나 때는 말이야" 가 조롱이 아니라 그때는 오히려 이딴 말도 안되는 것들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나 때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공유되고 그것을 서로 존중하는 그런 사회. 그것이 내가 살고 싶고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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