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겁결에 떠난 드로잉 여행
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내게 친구는 드로잉 여행을 가자고 했다.
"아니, 나 그릴줄 모른다고, 그려 본 적도 없는데 드로잉 여행을 어떻게 가!"
"나도 못 그려, 그냥 가면 돼. 지금부터 연습해서 가자."
친구는 자신이 들어가 있는 오픈 채팅방에 들어오라고 성화였다. 어반스케치 관련한 방이었다. 그곳에서 6월에 강릉으로 드로잉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친구는 1박 2일로 떠나는 그 여행에 함께 하자고 한 것이다. 더군다나 친구는 그 여행을 가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오는 날짜를 맞춘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림이라고는 그려보지도 않은 내게 드로잉여행이라니! 미국에서 방문하는 친구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해주냐며, 서운하다며 막무가내로 부추겼다.
강릉까지 운전을 해서 가야 하는 점도 망설임의 이유 중 한 가지였다. 울산에서 강원도까지 거리를 길 찾기 지도로 확인을 해보니 동해안을 끝에서 끝까지 이어놓은 길이었다. 겨우 울산시내에서 경주까지 운행하는 실력으로 강원도라니. 무조건 가야 한다는 친구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여행신청을 해두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여행지에 가서 뭐라도 그리려면 연습은 해야 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시간은 어느덧 보름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평소에 좋아했던 골목길을 찾아서 두 번 정도 연습을 했다. 그림이란 것이 이렇게 얼렁뚱땅 한 두 번 그린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도 안 그려보고 떠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드로잉 여행의 첫 번째 장소는 오대산 월정사였다. 월정사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하루 전날 도착했다. 날씨는 불규칙하게 비를 뿌리며 구름과 해를 번갈아가며 내보였다. 비 내리는 숙소에 앉아서 연습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리를 잡았다. 방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앞에도 기와, 옆에도 기와지붕이었다. 도대체 뭘 그려야 할지 첫 선 긋기가 어려웠다. 친구는 어느새 창문 밖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눈에 보이는 대로(그런데 보이지가 않는다. 흑흑) 모든 거 무시하고 그냥 그렸다. 투시, 소실점 그런 것은 아예 모를 때였다. 어쨌든 이래저래 한 장을 그렸다, 그리고 난 후의 뿌듯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내가 한 장 그렸으니까. 비교대상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이니까.
다음날 오전에 월정사입구에서 모두 모였다. 수도권에서 단체로 출발한 사람들과 합류해서 월정사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릴 줄 아는 게 없으니 이곳도 어렵고 저기도 어렵고, 여기저기 둘러보다 친구가 앉은 곳 옆자리로 정했다. 그곳도 기와지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피할 수가 없구나. 기와와 돌담을 째려보며 선을 긋고 색을 입혔다. 또 한 장이 완성되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경내 이곳저곳에 흩어진 사람들의 그림을 보며 산책을 즐겼다. 내 그림보다 다른 사람의 그림 보는 재미가 컸다. 같은 장소를 그려도 똑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다. 모두 개인의 개성에 따라 본인만의 색깔을 드러낸 그림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하나 둘 한 곳으로 모여 그림을 땅 위에 펼쳐놓고 인증샷을 찍고 다음 장소인 강릉 안목해변으로 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