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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Dec 17. 2020

채널을 돌리며

  뚜렷한 명분 없이는 외출을 자제하는 요즘, 방 안에 앉아 TV 채널을 돌린다. 예전엔 TV에 아는 사람이 나오면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 올리기 바빴는데, 이제는 채널을 돌릴 때마다 아는 사람이 한 명 씩은 나온다. 그중엔 몇 년 전만 해도 매일 같이 커피를 나눠 마셨지만 이제는 연락도 하기 부담스러운 스타가 된 사람도 있고, 내가 한창 독립영화를 달에 몇 편씩 찍을 때 이제 막 연기를 시작했다며 나에게 조언을 구하던 사람도 있다. 

  주연부터 단역까지 아는 얼굴이 나올 때마다 반갑다. 특히나 독립영화를 오랫동안 찍어오다 최근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케이스와, 긴 시간 연기를 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 이제 확실히 자리를 잡은 배우의 안정감을 볼 때 그렇다. 아마도 내가 가야 하는 길이 그 방향과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옆에 앉아 같이 TV를 보던 친구는 "너 쟤랑 친하지 않냐" 고 묻고, 나는 "친했었지" 하고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 사람들이야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유명인들의 명성에 힘 입어 유세를 떨던 날들의 부끄러움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방구석으로 숨기도 했다. 그 결과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버릇을 조금 버렸다는 장점도 있지만, 주목받거나 기회를 얻는 일이 적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제일 슬픈 건 그토록 힘이 됐던 사람들과 이제는 멀어진 사이라는 것이지만.

  이 추운 겨울에 촬영장에서 핫팩을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굴러가며 촬영했을 동료들의 연기를 보면서, 고생한다 소리를 하며 소파에 누워 귤이나 까먹고 있는 내가 괜히 한심스럽기도 하다. 가끔은 그들의 대사를 따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좋은 역할 하네' 하며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저런 스타가 되기는 힘들다는 선배의 말에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불과 이 년 전만 해도 대중이 잘 모르던 사람인데 이제 드라마 한두 편 나온다고 저 세상 사람 보듯 보냐고. 물론 이 년의 차이로 나는 현장에서 단역이고 그는 주조연이겠지만,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지금은 조용히 이름을 감춘 주조연 옆에 병풍처럼 서 있는 현재의 대배우들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로나 독립영화 등 재야에 묻혀 있던 고수들이 대중매체와 연을 맺게 되면서 급부상하는 경우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연극이 끝난 퇴근길에 서른 여명의 팬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이제 몇십만 명의 팔로워를 지닌 스타가 되기도 했고, 오천 명이나 만 명이 봐주면 고맙다고 전국을 돌며 무대인사를 하던 독립영화배우는 이제 천만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들이 이 년 전엔 못 생겼거나 연기를 못 한 것도 아닌데 지금의 평판은 다른 것처럼, 나는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된 미래의 나를 상상한다. 지금은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 하는 충고들을 소멸시킬 수 있는 건 끝내 증명해내는 일이다. 안 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안 될 이유가 많아도 끝끝내 해내는 사람이 되는 일. 유명세가 평가의 척도가 되지 않게 나만의 베이스를 갖고 나아가는 일. 


  가끔은 인생이 사다리 타기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규칙 상 대부분은 적당히 사다리를 타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겠지만, 누군가는 거치는 곳 몇 군데 없이 당첨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나쳐야 할 사다리가 많아 한참을 돌다가 벌칙에 걸리기도 한다. 그럴 때 벌칙 한 번 걸렸다고 인생 망치는 것도 아닌데 주저앉아 울진 않지 않나. 인생이야 게임처럼 기회가 많지 않으니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벌칙에 걸려 억울한 마음으로 혼자 설거지를 하다 보면 옆에서 그릇 헹궈주는 사람도 나타나고, 벌칙에 걸린 것도 아닌데 돌아가는 내내 운전을 도맡은 사람의 피곤도 벌칙이라면 벌칙이다. 그러니까 TV는 그만 끄고 벌칙이든 꽝이든 좋으니 사다리 한 번 더 타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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