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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Oct 25. 2022

꿈의 세계

  이제는 사람들이 날 소개할 때 배우인데 글도 쓰고 카페랑 와인바도 운영한다고 말한다. 소개를 들은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 일을 하냐 묻고,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아야 되는 성격이라고 답한다.

 이십 대 때만 해도 연기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싫었다. 연기로 돈을 벌지 못해 다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작품을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소개를 할 때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꼭 넣었다. 배우라는 아이덴티티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티를 내며 살았다. 

 스케줄 조정이 어려워 기회를 놓칠까 봐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마다 오디션이나 촬영이 잡히면 일을 빼줄 수 있냐고 물었다. 오디션 중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촬영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일정을 조율해서 아르바이트를 뺀다고 대답했지만 답변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돈을 벌려고 하니 눈치가 보이고 연기만 하자니 생계가 위협당하는 위태로운 생활을 거치던 어느 날, 혼자 뛰어놀던 공칠이가 다리를 다쳤다. 스스로 걷지 못하는 무거운 공칠이를 안았다 내려놨다를 반복하며 병원까지 안고 달렸다. 십자인대가 파열됐다는 수의사의 입에서 경차 한 대 값의 수술비가 나오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통장에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고 내가 키우는 반려견의 수술비 하나 낼 수 없는 형편에 죄책감이 들어 가슴이 답답했다. 낑낑대는 공칠이와 수술비를 결제해야만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병원 데스크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결국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십 분 뒤 병원에 도착한 형이 수술비를 결제하고 공칠이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공칠이가 수술을 마치기 전까지 흘렀던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책임지지 못하면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날에 커다란 금이 갔다. 

  언제까지 예술가라는 단어를 빌미로 삼아 가난을 좀먹고 살면서 당당한 척을 해야 하는 걸까. 어쩌다 한 번 가는 촬영장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무명인 주제에 배우랍시고 협찬받은 제품을 홍보해가며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실존의 삶이 필요했다. 

  그때부터는 무엇을 하든 더욱 진심으로 임하게 됐다. 빨리 퇴근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렸던 아르바이트생 말고 그곳에서 뭐라도 하나 배우려는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단순히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임하는 일마다 내 것이 될 수 있게 만들려고 질문하고 공부했다. 경제 활동이 정말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없을 때의 위축과 있을 때의 심적 여유를 비교해가며 더욱 활발히 돈을 벌었다. 희망을 바라보는 일보다 희망의 기회를 만드는 시간을 가꾸어 나갔다. 

  소정의 비용이 모이자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돈을 투자해서 책을 내는 게 맞나 싶었겠지만 돈이 생기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책으로 수익도 내고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기분이 드니 일석 이조였다. 

  그다음은 가게를 맡아 운영을 하는 일이었다. 친한 동생이 운영하던 가게에 낮 시간이 비니 공간을 셰어 해서 해보는 게 어떻냐는 제안이었다. 때마침 아이가 생겨 정기적인 수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동업자 친구를 구해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려진 가게라 해도 커피 머신부터 루프탑 공사 등 투자해야 할 비용이 필요했고 이 또한 자금이 없었더라면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렇게 맡은 카페는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근무하는 법과 더 큰 수익을 내기 위해 항상 머리를 굴리고 발로 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의 욕심과 취향이 모든 고객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대신 고객이 원하는 니즈에 나의 가치관을 은은하게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공부하게 됐다. 

  짧은 시간이지만 일 년 동안 매장을 운영해 온 시간으로 다른 매장을 차려도 운영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더불어 촬영이 생겨 출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가게가 원활히 굴러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인재를 등용했다. 제대로 참여하지 못할 거라면 작품을 거절하는 용기도 익혔다. 

  어쩌면 나는 긴 시간 동안 걱정 어린 배우로 살아가면서 다른 일을 병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가치를 추구하며 잠시 동안의 돈벌이로 순간의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으로 여러 가지 일에 적절히 에너지를 분배해가며 상황에 맞춰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런 모습을 알아봐 준 것일까, 형은 원하는 와인이 가득한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은데 맡아서 운영할 생각이 없냐 물었다. 나는 기초 시안부터 필요한 인테리어, 식재료, 집기 등을 모두 표로 정리해 제출하고 매장의 콘셉트와 방향성, 주요 고객 예상 분석 등을 작성해 구체적인 운영 방식을 갖추어 나갔다. 점포를 계약한 지 한 달 하고 보름 만에 가오픈을 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정식 오픈을 준비 중에 있다. 

  이제는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연기에 소홀해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두렵지 않다. 작품이 찾아오면 잘 해내면 되는 것이고 오히려 다른 일을 함으로써 수박 겉핥기 같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고를 상상하며 각자의 삶이 지닌 고단함과 깊이를 여실히 느낀다. 그럴수록 연기는 더 미지의 세계가 된다. 다른 일을 통해 느끼는 만족감 뒤에 결국 배우로서의 결핍이 채워지길 바라는 내 마음속의 간절한 바람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매일 아침을 연다. 

  그러고 보니 첫 책에 형과 함께 멋진 가게를 만들고 싶다고 쓴 구절이 생각난다. 첫 번째는 아니지만 꿈이 여럿이라면 이 또한 나의 꿈 중 하나였던 것이다. 꿈이 하나여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 꿈의 영역이 넓은 사람이라면 꿈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길에 서 있다고 여기며 오늘도 출근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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