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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Jan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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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서 어째. 빨리 연기로 잘 돼야 다른 일을 그만 둘 텐데"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는 말이다. 배우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을 겸하는 것이 N잡의 유일한 이유인 줄 아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전엔 이런 말을 들으면 발끈하곤 했는데 요즘엔 이런 말을 들어도 타격이 없다. 

  과거엔 다른 일을 하는 것에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했다. 예술가란 자고로 장인 정신을 갖고 한 가지 일에 온 마음을 쏟아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하얀 재만 남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욕심과, 일생을 예술적 영감과 경험으로 채우길 바라던 작품 없는 무명배우의 결핍이기도 하다. 

  허나 아르바이트를 하면 할수록 배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늘어났다. 처음 접해본 일도 척척 해내는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기분이었고, 처음엔 흥미로웠던 다양한 일에 지겨움을 느낄 때마다 결국엔 연기로 밥 벌어먹고사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인생이겠구나 생각하며 새로운 일을 찾았다. 

  다양한 곳에서 일하며 얻은 느낌과 경험으로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배우를 하면서 동시에 겸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생겼고 지속 가능한 일을 해야만 돈이 없다고 배우를 포기하지 않고, 또한 배우로 잘 된다고 해서 다른 일을 쉽게 정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돈 벌려고요, 허허" 


  한 마디면 간단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배우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라는 말로 시작해 주저리주저리 긴 변명을 늘어놓는 날도 있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 당연한데 이십 대 청춘이 한 직업으로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게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배우로서의 삶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를 실패한 인생으로 치부하며 공격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맞서 싸우던 지난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나와 함께 작업했던, 혹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지인들이라면 모를까, 초면에 "빨리 연기로 잘 돼야 다른 일을 그만 둘 텐데"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현재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지에 대한 계획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무명배우가 문어발 식으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으는 형태로만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진심 없는 말에 그럴듯한 답변을 지어낼 필요 없이 "돈 벌려고요, 허허" 한 마디로도 충분한 요즘이다. 


"배우로 잘 되면 하나가 아니라 열 개 할 건데요"


  서른이 되어 작가라는 꿈을 처음 꾸고 책을 낸 나로서는, 가족이 생겨 재정적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가게를 운영하는 나로서는 하나하나의 선택이 신중하다. 무슨 일이든 단순하게 접근했다 발을 빼기엔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그 일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기에 대충 하는 느낌을 받으면 자멸하고 만다. 시작한 일에 열심히 임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삶의 영역을 확장 시키는 것이 다른 일을 겸하면서 배우라는 직업에 찬물을 끼얹지 않는 유일한 보답이다. 

  결국 여러 직업을 가진 내가 무엇으로 잘 되느냐의 싸움인데, 어떤 직업이든 스스로 만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정도가 된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길 잘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음에도 배우로 잘 된다면 "다른 경험이 많아서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됐나 봐" 할 테고, 사업가로 잘 되면 "야, 그때 시작하길 잘했네, 지금 시작하면 늦었을지도 몰라" 할 것이다. 

  물론 하는 일이 다 잘 되면 좋겠다만 일단 하나만 걸려라 하는 마음도 있다. 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다른 곳에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 그 기회를 노린다. 그래서 결국엔 다양한 직업을 갖고도 직접 해야만 하는 일과 인재를 구해 맡길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개인의 시간과 사회적 시간을 분리해 개인의 영혼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이것저것 손대다 아무 성과도 못 내지 말고 끈기 있게 하나를 끝까지 하라는 뜻의 속담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반대로 생각하길 좋아했다. '물이 안 나오는 우물이면 어쩌지? 옆 우물에선 물이 더 빨리 나올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호기심이 생기는 우물을 골라 파다 보니 벌써 우물이 여럿이다. 이제 어디서든 물만 나오면 되는데 여러 개를 파느라 한 곳을 깊이 파지 못했을 뿐. 그래서 이제는 여러 우물을 동시에 팔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는 중이다. 그러면 한 우물 파는 사람보다 빨리 물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힘들어서 어째. 빨리 연기로 잘 돼야 다른 일을 그만 둘 텐데" 

"어쩌죠. 배우로 잘 되면 하나가 아니라 열 개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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