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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14. 2020

산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산다.

체 게바라의 혁명보다 날 뜨겁게 만든 말

때는 2009년, 어느 연예 기획사에서 밴드 보컬을 시켜준다길래 다니던 연극학과를 휴학하고 9개월 정도 연습생으로 있었는데, 갑자기 밴드가 해체돼 데뷔도 못 하고 회사에서 나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곤란한 건 학기는 이미 시작했는데 휴학처리도 완료됐고, 처음으로 연예인들을 눈 앞에서 바라보며 지냈던 9개월이 인상 깊었는지 다시 학교로 돌아가거나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나 달라서 이곳저곳 다른 회사를 찾아봐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애당초 전공이라는 연기로도 이제 막 시작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인데, 노래도 잘 못하는 날 보컬로 쓸 리가 만무했다.


갑자기 학생도, 연습생도 아닌 백수가 돼버린 나는 고민 끝에 결국 군입대를 결심했다.


내가 있던 부대는 군사지도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전투부대가 아닌 데다 나는 정훈병이라 업무시간이 끝나면 조용한 방송실에서 (아무래도 초반엔 선임들이 가득한 내무실보단 방송실이 편했다.) 책 읽을 시간이 제법 주어졌다.


그 시절엔 위인전이나 성공담을 읽는 걸 재미있어하던 때라 어렸을 때 못 읽은 <아인슈타인>이나 <간디>부터 <라이트 형제>나 <파브르>의 이야기 등을 자주 읽었다.



그러던 중 체 게바라의 이야기가 궁금해 도서관에서 찾아봤지만 체 게바라는 혁명가라서 군대에서는 금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군 안에서 구하는 건 포기하고 휴가 복귀 날, 형 방에 꽂힌 새빨간 <체 게바라 평전>을 꺼내 그 위를 무비위크에서 뜯은 배우의 사진으로 덮어 테이프로 붙여 연기 관련 서적인 척 둔갑하고 몇 권의 다른 책들을 잔뜩 챙겨 일일이 검사하기 힘들게 만들어, 마침내 아르헨티나 출신 쿠바 혁명가를 대한민국의 작은 부대 안으로 들일 수 있었다.


읽어보니 진취적이고 거침없는 성격뿐만 아니라 독서광인 데다 명언도 많이 남긴 그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는데, 그가 남긴 많은 말들 중에 인상 깊은 말이 있었다. - '산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산다.'


보통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엔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갖자.'라는 말이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 다른 멋진 말들도 많았지만, 나는 이 말에 한 순간 확 꽂혀버렸다.


 '산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산다.'라는 말이 얼마나 간단명료하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말인가. 일단 '말한 대로 산다.'라는 것만 지킨다 쳐도,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야 되는데..."라고 말을 뱉는 순간 우린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운동해야 하는데", "안 늦으려면 지금 나가야 하는데" 등등 생각한 것을 내뱉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서 바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추진력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다짐한 나의 포부를 지키는 데도 크게 한몫한다. "한 달 안에 6킬로 뺄 거야."부터 시작해서 "술은 일주일에 한 번만 마시겠어.", "매일 꾸준히 한 시간씩 영어공부해서 5년 뒤엔 지금 다니는 직장 때려치우고 미국에서 일해 볼 거야."


실제로 이런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SNS에 "앞으로 술 끊습니다. 술자리 연락하지 마세요."라는 글을 숱하게 봐왔지만 내 생각에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 이 시각에도 숙취에 시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반대로 '산대로 말한다.'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재미를 위해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에 MSG를 더할 때가 많은데, 잘 쓰면 좋지만 오히려 급조한 말들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작은 허풍과 거짓말만 안 하더라도 우린 꽤나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미래에 생길 스케줄을 노트에 적어놓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리뭉실하게 올 해의 목표, 이번 달의 목표로만 설정해놓는 방법보다 특정 날짜에 기록해놓은 목표가 있는 것이 (혹여나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다가오는 날짜에 맞춰 부단히 노력하게 되는 힘을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산다.' , 매 순간을 이렇게 사는 건 어렵겠지만 자신 혹은 타인들과의 크고 작은 약속들을 지켜나갈 수 있다면 내 삶에 있어 나는 꽤나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다.


2018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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