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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14. 2020

최고가 못 된다고 최선까지 안 하진 말자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내 인생에선 최고점일 수 있으니까

오디션이 잡혀 새벽까지 연습을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옛날 생각이 났다.


입시를 하던 때에 대사 하나를 물고 늘어져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혼자 연습실에 남아 밤을 새우던 날들이 오늘과 겹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연기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려운 희곡들이 무슨 얘긴지도 도통 알 길이 없어 겉에 보이는 것들로 지레짐작하여 결국 짜 놓은 동선과 박자를 맞추며 대사를 읊는데 바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죽을 듯이 열심히 했다. 수능이 끝나고는 선생님들보다 학원에 일찍 오고 늦게 나가 문을 여닫는 일도 내가 했다. 학교에서도 예체능 계열을 배려해 음악실에서 연습을 할 수 있게 해 줘 하루 종일 연습할 수 있었다. 그때는 연습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냥 연습만 했다. 조금씩 나아진다고 느낄 때마다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죽도록 연습했는데, 그래도 최고로 잘 하진 못 했다. 학원에 재능 넘치고 영리한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너무 잘했다. 학원에서 콘테스트를 열면 선생님들이 그 친구를 일등으로 뽑았다가도, 외부에서 개인 레슨을 받고 오는 그 친구 대신 학원 수업만으로 발전한 부분과 성실함을 높이 산다며 나에게 상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상은 나에게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성실함과 노력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학에서도, 작업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내세우는 건 방대한 양의 준비였다. 연극사 수업이면 관련된 논문을 전부 읽고서는 수업에 들어가고, 잘못 신청한 법학과 전공 수업에서 진행된 사형제도의 존폐에 대한 발표에, 다른 학생들은 이미 나와있는 비슷한 통계 자료를 이용하는 반면, 난 불필요하게 많은 다수를 찾아가 직접 영상 인터뷰를 따와서, 교수님께서 정성이 갸륵하다고 한 적도 있다.


단편영화를 한참 많이 찍던 시절에도, 대표작이 없으니 다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이나 역할을 딱히 가리지 않고 한 달에 일곱여덟 편씩 찍어댔다. 뭐든 했다. 그냥 연기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많이 하고 오래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오디션에 준비한 독백이 뭐가 있냐고 하면 아무 영화나 제목만 말해보라고 한 적도 있다. 무슨 자판기처럼 독백을 백 개도 넘게 외우고 다녔다.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에 정작 그 누구보다 최고로 잘한다고 할 만한 것은 없어서 많이도 탈락한 것 같다.


그러던 중 작년과 올해 초에 걸쳐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을 읽으며 밤새 침대 위에서 많이도 울었다. 타인의 마음과 아픔을 공부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공부라는 말에, 타인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일정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말에, 나는 갑자기 더뎌졌다. -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쉽게 연기를 하지 못한다. 불과 몇 달 사이인 것 같은데, 연기를 하는 게 무서워졌다. 가까운 사람의 마음도 모르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 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해온 것 같아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소중히 다루지 못하고 땅에 기름을 뿌리듯이 연기를 해댄 것이 후회스러웠다.


예전엔 오디션 대본을 갑자기 받아도 바로 할 수 있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 대사든 손에 잡히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이 사람이 만약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대신 내가 그 사람 마음 다 표현해줘야 한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마치 원한 가진 귀신이 내 뒤에 붙어있는 것처럼 무서워졌다.


바삐 움직여야 할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뎌진 나는 최근 오디션이 잡힐 때마다 연습을 하다 밤을 꼬박 새우고 결국 최악의 컨디션으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평생을 같이 산 사람 속마음도 모르고 사는 게 사람인데 어찌 생전 처음 보는 글자 속 인간을 사람답게 만드나 하면서, 정작 대본은 얼마 보지도 못하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다 보면 해가 떠 있다.


성격 탓에 남들보다 뭘 많이 알아야 해서 시간이 몇 배는 걸리는데, 이젠 조금을 생각하는 데도 한참이 걸리니 아침 해를 더 자주 보게 생겼다.


그래서 결국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제일 잘하는 것도 하나 가지는 한 해가 되자고, 쉴 때 잘 쉬고, 할 때 최선을 다 하고, 못 돼도 잘 돼도 각자의 고생이 있어서 어차피 고생은 계속되니까, 지치지 말고 힘내라고 스스로를 고무해본다.


2019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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