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정원으로 오라
오전 8시 20분, 코르도바를 향해 길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올리브 나무 숲이 펼쳐졌다. 은빛 잎사귀들이 바람을 머금고 출렁일 때마다,
대지는 마치 오래된 성경의 페이지처럼 잔잔히 넘겨지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몬드나무들이
하얀 꽃을 소담히 피운 채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행렬 같았다.
코르도바에 도착하자, 시간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 역사의 숨결이 깊이 배어 있는 도시,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땅. 그위를 스쳐 지나가는 순례자처럼 느릿느릿 기차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OUIGO 열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열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또 다른 세계의 전망대 같았다. 위층 좌석에 앉아 내려다보는 들판은 하나님께서 넓게 펼쳐 놓으신 초록빛 양탄자 같았다.
열차는 빠르게 달렸지만, 내 마음은 점점 느려졌다. 여행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풍경 하나, 사람 하나, 소리 하나가 더 깊이 마음에 새겨졌다.
마드리드 역에 도착하자. 시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관광객들, 각자의 언어와 목적을 품은 사람들,
끌려가는 여행 가방의 바퀴 소리,
환영과 이별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도심 곳곳을 걸어 다니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 많은 사람들, 이 많은 길들, 이 많은 건물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시간은 다시 깊어졌다.
고야의 그림 앞에 서니 인간의 고통과 희망이 한 화면에 담겨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는 왕과 인간, 권력과 존재에 대한 묵상이 밀려왔다.
수백 년 전 화가들이 붓으로 남긴 흔적이
오늘의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너는 어떤 그림을 남기고 갈 것인가?”
예술가들의 열정은 단지 캔버스 위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통과한 영혼의 기록이었다.
미술관을 나와 레티로 공원으로 향했다.
호수 주변에서는 한 노파가 흥겨운 가락의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 위로 음악이 흘러가자 물결들이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길 위에 서서 장단을 맞추며 연주를 듣고 있자니 지금까지의 여정이 하나의 선율로 이어졌다.
바람, 햇살, 도시의 소음, 그리고 내 마음의 기도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스페인 왕궁 앞 광장에 이르렀을 때 넓은 공간 위로 황금빛 오후가 내려앉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가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웃음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캔버스를 펼친 화가의 손놀림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행이란 결국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내는 한 편의 그림이라는 것을.....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잘란루딘 루미의 시를 읽어 주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잘란루딘 루미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란루딘 루미의 시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동일한 제목의 시상이 내 영혼을 울렸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박찬선
봄의 정원으로 오라
올리브 숲을 지나
아몬드 꽃길을 따라
바람이 전해 준 이야기와
햇살이 남겨 둔 흔적을 따라
시간이 멈춘 도시에서
역사의 숨결을 듣고
분주한 역을 지나
다시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오라
그림 속에 남은 눈빛처럼
음악 속에 흐르는 기도처럼
여행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정원 하나를 남기는 것
그러니
봄의 정원으로 오라
그곳에서
너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여행의 끝에 서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많은 도시를 지나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내 영혼의 중심이라는 것을.
코르도바의 올리브 숲,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레티로 공원의 색소폰 선율,
왕궁 앞 광장의 화가들…
그 모든 장면들이 내 안에 하나의 정원이 되어 자리 잡았다. 여행은 끝났지만 감동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지도 위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새롭게 열어 주신
‘봄의 정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