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나는 40쪽짜리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총 1000쪽 분량의 보고서 20여 편과 언론보도자료 50여 점 그리고 20여 개 기관과 회사의 홈페이지를 읽어야만 했다. 엄청난 양의 텍스트들을 읽고 또 분석해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 내가 쓴 40쪽짜리 보고서를 읽고 수정하고, 또 읽고 수정하고, 또 읽고 수정했다. 보고서를 납품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최은영의 신작 소설 "밝은 밤"을 오랜 예약대기 끝에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었고, 다음 예약자를 위해 재빨리 읽고 반납해야 했다. 또 매일 꼬박꼬박 한겨레의 홈페이지에서 경제기사와 국제기사를 살펴봐야 했고, 정치 기사나 사회 기사에도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매일이 문자의 홍수 속이었다.
독립출판과 독립서점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다 보니, 몇 가지 근원적 질문들에 봉착하게 됐다. 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였다. 책을 만들고 또 그 책을 팔려면, 우선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라서 말이다.
사람들은 독서 행위, 즉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터무니없게 신성시하곤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따위를 억지로 만들어내서 가치 있는 행위로 포장하곤 한다. 그렇게 포장된 블로그 포스트나 언론 기사들을 살펴보다 보면, 기가 막히게 된다. 특히나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지 못하고 견강부회하는 글들을 보다 보면 절망스러울 지경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러니까 물성을 갖춘 텍스트의 집합체를 몰입해서 인지한다는 행위에 대해 터무니없는 고 가치평가를 하다 보니 그렇다. 인지과학의 숱한 연구논문들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합목적성을 띄고 작성된다. 따라서 그 연구의 정의를 벗어나 대상을 확장해서 유추하게 될 때는 그 유효성이 사라지게 되지만, 손발이 오그라들어 오징어가 될 지경의 막무가내 오도입을 자주 보게 된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억지들은 주로 이런 형태로 반복된다.
- 책을 읽으면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잡을 수 있다.
독서를 통해 타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고, 이는 동기부여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과 그 경험을 교류하려는 능동성도 생긴다.
- 책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독서를 통해 정확한 지식을 쌓고, 이를 통해 통찰력이 생기면 사유의 폭이 넓어진다. 또한 집중력과 분석력이 향상되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
- 책을 읽으면 글을 잘 쓸 수 있게 된다.
책을 읽으면 어휘력이 증가하고 글쓰기에 대한 연습이 될 수 있다.
- 책을 읽으면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몰입도 높은 즐거운 독서는 편안한 휴식이 될 수 있고, 가성비 높은 취미가 될 수 있다.
- 책을 읽으면 뇌가 건강해진다.
책을 읽으면 뇌 활동을 자극해서 뇌가 건강해진다.
인류가 지식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발견하고 발명한 미디어는 비단 언어와 문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모든 정보를 수용할 수 있고, 이를 위해 그에 걸맞는 미디어들을 개발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 미디어들만의 학문체계와 예술체계를 이룩해왔다.
그리하여 이상의 명제들에서 "책을 읽으면"을 "공부를 하면"이나 "영화를 보면", "문학작품을 읽으면", "음악을 들으면",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으로 대체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놀이를 즐기면"까지도 크게 억지스럽지 않게 논지를 전개할 수 있을 정도다.
다시 말해, 문자의 집합체인 책이란 미디어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인지 작용의 집합체인 콘텐츠라면 그 무엇이라도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굳이 "책"을 "읽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2. 굳이 "종이책으로 읽어야" 하는가?
모름지기 모든 문자 텍스트는 섬유질 미디어인 종이에 정착되어서, 관념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책"이란 물성을 완성하는 형태를 뗘야 한다는 이상한 편견이 존재한다.
이는 언어가 문자로 정착되면서 인류의 지식이 전달되기 시작한 이래로, 그 지식이 소수에게 전유되었던 관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양피지가 되었건 파피루스가 되었건, 두루마리가 되었건 점토판이 되었건 관계없이, 문자로 정착된 언어에 배타적이면서도 독점적인 권위를 부여해왔던 관습 말이다. 특히나 종교에 의해 텍스트의 고착물들이 신성화된 근대 이전까지의 관습은 여전히 강한 힘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다.
마침내 활판인쇄로 인해 필사본(manuscript)의 시대에서 책(codex)의 시대로 전환된 중세 말기에도 상황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여전히 책은 성경이나 종교학에 국한되었고, 필사본에 비해 책의 가격이 80% 정도 싸졌다고 해도 아무나 구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문해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던 것 역시 18세기에 들어서였고, 프레스로 찍어내는 책은 여전히 "신의 말씀"이나 "지식의 보고"와 같은 관념적 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계몽의 시대를 넘어 19세기 근대에 이르러서도 책의 물성은 더 강력해졌다. 더 저렴해진 가격으로 보편성을 획득했으면서도, 그저 "종이 쪼가리" 취급이 아닌 지금과 같은 "책"이란 물성이 확립된 시기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가능케 하는 디바이스의 발전에 힘입어, 인류는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물성을 조우하게 됐다. 지난 500년 이상 섬유질 미디어인 종이에 판형이란 관습으로 물질적 물성을 구축해온 책이란 관념에 막강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작용에는 응당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전자책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으로 "책의 물성"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책의 물성에 대해 감성적으로 접근했고, 어떤 이들은 경제적으로 접근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편의성으로 접근했다. 그리하여 서점은 21세기 "종이책"이란 물신의 새로운 신전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자 텍스트의 소비는 점점 전자 디바이스로 미디어 전환을 이룩하고 있다. 굳이 종이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전자책이나 PDF파일로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의 다양한 디바이스 환경에서 문자 텍스트를 접할 수 있다. 그뿐일까, 시각과 청각을 동원해 더 짧은 시간에 더 강력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이제 굳이 종이책에 목맬 필요는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격년으로 "국민독서실태조사"를 한다. 2019년에 조사를 실시해서 2020년 2월에 발표된 상태인지라, 다음 실태조사는 2022년 2월쯤에야 나올 수 있겠다.
아무튼, 2019 실태조사에 따르면,
□ 만 19세 이상 성인 중 지난 1년간(2018.1 0~2019.9) 교과서·학습참고서·수험서를 제외한 일반도서를 한 권 이상 읽은 연 간 독서율은 ‘종이책’ 기준으로 성인 52.1%, 초·중·고 학생 90.7%임.
□ ‘종이책과 전자책을 합한 연간 독서율’은 성인 55.4%, 초·중·고 학생 91.9%이며, 직전 조사인 2017년 대비 성인은 6.9%p 감소하고 학생은 1.3%p 감소함.
□ 2019년 조사에서 독서 매체로 새로 추가한 오디오북을 합한 ‘연간 종합 독서율’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 중 한 가지 이상을 읽거나 들은 비율)은 성인 55.7%, 학생 92.1%로 나타남.
안 그래도 종이책을 읽는 비율도 떨어지는데,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에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는 추세다.
이런 추세는 교육부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발간한 "2020년 대학도서관 통계 분석 및 교육·연구 성과와의 관계 분석" 보고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대학 재학생 1인당 연간 증가(구입) 책수
- 2011년 1.6 책에서 2020년 1.7 책으로 최근 10년 간 큰 변화는 없었다.
□ 재학생 1인당 대출 책수
- 2011년에 8.3권에서 2020년 4.0권으로 약 50% 감소했다.
- 대출 감소 원인으로는 인쇄책에서 전자책으로 정보 이용행태가 변화한 것으로 파악됐다.
□ 재학생 1인당 자료구입비
- 2011년 96,335원에서 2020년 105,250원으로 큰 변동은 없었다.
□ 대학 평균 전자자료 구입비
- 2011년 2억 9천만 원에서 2020년 4억 4천만 원으로 약 50% 증가했다.
- 2020년도 전자자료 구입비는 전체 자료구입비의 약 69%(2011년 약 4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재학생 1인당 상용 DB 이용 건수
- 2011년 130.8건에서 2020년 253.7건으로 94%인 약 2배 증가했다.
□ 이용자 교육 참가자 수
- 최근 10년 간 약 30% 증가(2011년 총 271,081명 → 2020년 353,339명)했다.
- 대학 정원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서도 이런 증가는 유의미하다고 평가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The Book)》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Amaranth Borsuk)는 그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을 뿐이다. 인간이 언어와, 또한 글을 교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휴대용 독서 수단이 필요하다. 책이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3. 나는 왜 종이책을 읽는가?
지난 해 실용서 한 권을 쓰게 됐다. 이 과정에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 경험을 하게 됐다.
책상 위에 참고서적이나 프린트된 A4용지 대신에,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원고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년전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도서관에서 찾아낸 논문들의 복사물과 참고서적이 책상을 덮었었다. 10년전 기자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글쓰기에 필요한 참고자료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PDF파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참고서적과 프린트물로 어지럽던 책상이 한결 단순해졌다. 물론 가끔씩 서가에서 책을 꺼내 보며 참고하는 일이 여전히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글쓰기 과정에서 종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글을 구상하거나 중요한 메모는 종이를 사용한다. A4용지에 펜으로 글자를 쓰는 건 태블릿에 스타일러스로 글자를 쓰는 것과 느낌이 다르다. 특히나 포스트잇을 사용하는 메모의 물성은 특출나다. 스케쥴러 대신 캘린더앱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단상을 정리하는 것만큼은 종이에 펜으로 쓰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1년만에 가방 안 필수품으로 작은 수첩과 펜이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서가에 종이책은 꾸준히 늘고 있다.
올초에는 논어, 맹자, 대학/중용을 새로 구매했다. 분명 대학시절에 다 구비했던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당최 서가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을 구입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같은 꼰대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 내용을 확인하려면 "책을 뒤져 보는 행위"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업이면서, 또 취미기도 한 사람들에게는 자주 뒤적이게 되는 책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문학 서적이나 경제서적들이 한 두 권씩 늘어나고 있다.
최은영의 "밝은 밤"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최근 합류했다.
최근 5년간 소설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마흔 전에 소설가로 등단"하는 게 꿈이었던 문학청년이 그 시간제한을 넘기고 중년이 된 탓이리라. 그 좌절의 시간동안 영화와 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에 더 관대해지고 친숙해졌다. 심지어는 일본 TV 애니메이션까지도 들여다 볼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다가 올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소설에 손을 데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던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가 마음에 썩 들었던 건 아니어서, "밝은 밤" 역시 대출해서 읽었더랬다. 그런데 왠걸, 소설가도 등단하고 업으로 글쓰기를 계속하면 성장하기 마련이더라. 꽤 마음에 드는 소설인지라, 냉큼 사버리게 됐다. 거기에 한강의 신작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사전 예약 광고가 넘쳐나는 인스타그램 피드들 때문에, 한강의 출세작인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어 두려고 한 권 샀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우선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어 보려고 희망도서로 신청해 둔 상태다.
사실 나는 종이책을 좋아한다.
약간의 지적 허영은 책의 물성을 신봉하는 이교도가 되기에 충분했고, 새로운 기술에 순응하기에는 현재의 담론을 주도하는 꼰대의 쓸데없는 자존심도 남아 있어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책의 물성은 문화 그 자체이며, 미디어 너머의 무엇"임을 복음처럼 전파하곤 했다.
그런데 점점 신앙심이 옅어지고 있다.
굳이 종이책이 아니어도 좋겠다 싶고, 아예 책이 아니어도 괜찮다 싶기까지 하다. 이러다가 곧 파문당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