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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Apr 05. 2022

한국문화와 국제상 수상에 관한 단상

이수지의 안데르센상 수상에 즈음하여

이수지 선생의 안데르센상 수상에 생각이 참 많아진다.

여러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해 놓지 않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지 않아, 거칠게나마 끄적여본다.


1. 안데르센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수상을 축하하는 마음이 문재인 대통령과 다를 순 없다.

 International Board of Books for Young People에서 격년으로 시상하는 Hans Christian Andersen Award의 일러스트레이트 분야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6년에도 최종 후보에 오른 적이 있었던 이수지 선생의 숙원이 풀렸을 듯싶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안데르센상의 작가(author)상은 ‘아동문학의 노벨상(Novel prize of children's literature)'으로도 불리는데, 처음 제정된 이후로 10년 후부터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도 수여하고 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별칭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일러스트레이터의 노벨상‘이란 이름으로 불러주기엔 볼로냐라가치상이 ’그림책의 노벨상‘이란 별칭을 선점한 듯하다.


 이수지 선생은 2021년과 2022년 볼로냐라가치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Special Mention에 이름을 올렸다. 정확하게 조응하지는 않지만, 본상과 가작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영국 유학 이후 아트북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일러스트레이터로 꾸준히 활동해온 이수지 선생은 미국 등 영어권에서 제법 일찍부터 눈길을 모아온 듯하다.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마케팅에도 잘 활용해 왔다.



2. 평가가 수상 결과를 낳지만, 수상 결과는 더 큰 평가를 만든다.


 소설가 한강 선생이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은 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Booker International Prize)의 수상이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의 입지가 더 탄탄해지긴 했으나, 아버지인 한승원 선생 역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기에 ‘한승원의 딸’은 오랜 꼬리표였다. 허재 아들 허훈과 허웅, 이종범 아들 이정후처럼,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지만 아버지의 명성이 더 크다 보니 그랬다. 데보라 스미스의 좋은 번역으로, 그때까지 한국문학이 도달하지 못했던 국제적 명성의 상에 접근하게 됐다. 이제야 한강의 외적 평가가 아버지를 뛰어넘게 됐다. 


 그 후 한강의 작품은 ‘부커상에 빛나는’ 작가의 후광을 더했다. 부커상 수상 실적이 게임아이템처럼 필력을 버프해주는 것도 아닌데, ‘부커상 수상 작가의 문학적 성취’로 평가한다. 다소 당혹스러운 현상이다.

부커상은 무겁다. 뭘 해도 부커상 타령이라서 말이다.

 차근차근 쌓아간 레주메이(Résumé)가 수상을 이끌어내지만, 그렇게 수상이 반복되면 수상 실적이 또 다른 수상의 실적이 되는 경우도 잦다. 그리하여 종종 수상 실적은 과대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몹시 당혹스러운 현상이다.

 미투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고은 이후로 노벨문학상 한국인 후보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한강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훌륭한 소설가이고, 좋은 작품도 많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포스트 고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오로지 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란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선생 본인도 꽤나 부담스러울 테다.

 이수지 선생 역시 이 쾌거 이후의 평가에서 같은 궤도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상이 만들어내는 성취 이상의 평가와 냉정한 시선이 찬찬히 들여다 본 이후에 내놓을 성취보다 가혹한 평가절하도 반복될 테다. 맘이 편칠 않다.

 특히나 초기작품에까지 띠지로 도드라질 그 수상실적이 드리울 그림자를 생각하면 꽤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3. 노벨상이라고 다는 아니다.


 노벨상은 힘이 세다. 그 저명성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렇다. 프리츠커상을 ‘건축계의 노벨상’, 필즈상을 ‘수학계의 노벨상’이란 별칭을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고 그래서 더 팔렸다.

 2019년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에게 노벨상을 주기로 스웨덴 한림원이 결정했을 때, 엄청난 비난 여론에 직면했었다. 

 무엇보다 스웨덴 한림원의 마츠말름 사무차장의 발언, "선정위원회가 문학적·미학적 기준에 따라 선정했다. 한림원의 권한은 문학적 우수성을 정치적 배려와 비교해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노벨상의 권위마저 뒤흔들었다. 문학은 그저 단순히 미학으로만 평가하기엔 너무나 오래된 인문학의 결정체이다 보니 그랬다. 친일문학가의 친일 행위와는 별개로 그 문학적 성취는 그것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우리 문학계의 오래된 논란이 스웨덴 한림원에 의해 재점화됐다는 것에 꽤나 놀랐다.

 귄터 그라스의 나치 친위대 전력 고백에서도 몹시나 냉정한 평가를 내리며, 노벨상을 박탈하라 했던 이전의 경험조차도 무시한 듯해다.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내 소설상에서 가장 큰 권위를 보여주었던 것은 이상문학상이었지만, 그 선정과정에서 보여준 문학사상사의 이상한 행태는 작가들의 수상거부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로 인해 상의 권위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렇듯, 노벨상도 나락가지 말란 법은 없다. 


 미국의 아카데미상 역시 지나친 백인중심 영화판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어서, 상의 명성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돌파구로 봉준호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4개 쥐어주면서 권위를 살짝 회복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 와중에도,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의 수상실적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카데미상 하나에 수렴한다. 씁쓸하다.


 남자 아이돌에 관심이 없다 보니, BTS의 위업에도 그닥 관심이 없다. 그저 매번 그래미 노미네이트와 '수상 불발'의 소식까지 애써 외면할 수 없어 전해듣고는 있다. 생각이 참 많아진다.



4. 띠지 마케팅과 리커버는 이루어질 것이다.


 이수지란 좋은 작가(사실 좋은 작가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림책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가 더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될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마뜩찮게 보는 건 아니다. 그저 수상 실적만으로 작품이 소비될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민음사가 페터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 실적으로 띠지를 만들어 내놓자, 판매부수가 늘었다는 반증이 있기 때문이다. 

 좋아서 좋게 평가하는 것과 좋은 것이라는 외부 평가에 유도되는 것은 꽤나 다른 일인데, 꽤나 쉽게 일어나고 있다. 그게 좀 걱정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끊임없는 번역작업과 수상을 위한 출품은 계속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상 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국제적 규모의 상에는 국가 차원의 위상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이해도 맞물린다. 경쟁이 정말 빡세다. 


 그것과는 별개로, 저번 확대보다는 될 놈을 밀어주는 스타일의 우리네 문화체육 관행은 심지어 노벨문학상에도 적용되었더랬다. 번역 작업도 팔릴 만한 작가의 작품에나 몰리는 모양새다.

 그뿐이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불릴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의 영어 자막 작업에 참여했던 달시 파켓과 같은 이는 미국문화와 한국문화를 두루 이해하고 있는 이중언어자(bilingual)이라서 공감대를 이끄는 작업이 가능했다. 한강에게 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를 안겨준 건 데보라 스미스의 유려한 영어 문장의 역할이 컸다. 90년대 후반에 쏟아져 나온 라틴아메리카의 서반어문학의 조악한 번역을 떠올려 보면, 문학작품의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닿게 될 터이다. 그나마 1세기 넘게 번역이 지속되면서 문학적 관습마저 유사한 모양새를 갖춘 일본문학의 경우에도, 맛깔나는 번역과 구글번역기 수준의 번역을 동시대에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 보면, 번역의 중요성은 더욱 커짐을 알 수 있다.

 현재 문학작품 번역 지원 사업은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 현재는 출판법에 의해 운영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여전히 걸음마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기관으로는 교보의 문화재단인 대산문화재단에서 번역지원사업을 진행한다. 눈먼 돈 따먹는 국책사업보다는 지원비용이나 결과물이 좀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이 아무렇게나 번역해서 어떻게든 한국 작품을 외국 독자에게 읽히는 게 더 나을지, 아니면 되지 않을 불량식품같은 엉터리 번역본을 내느니 차라리 퀄리티 높은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숨고르기를 하는 게 맞을지 갈피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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