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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Sep 03. 2023

SF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서울:허블. 2019.

1. 김초엽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2021년 11월에 군산 마리서사에서 이 책을 사들고 왔습니다. 2019년에 출간된 이후로 한국 SF소설의 기린아로 등극한 김초엽인지라,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대한 것은 아닌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차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군산에는 책을 읽는 휴가차 방문했었는데요, 그때 챙겨갔던 것이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었습니다. 드라마로 먼저 접했던 텍스트인지라, 읽는 내내 머릿속을 정유미가 장난감 칼을 들고 뛰어다니기도 했네요. 정세랑의 로판타지(low fantasy)를 무리 없이 읽고 나니, SF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SF라는 장르는 꽤나 매니악한 장르인지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복거일의 『 비명을 찾아서』를 ‘대체 역사 SF’라고 일컫는 비평을 접한 뒤로는, 한국문학 내에서 SF의 장르적 정체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구나란 생각을 해왔던 탓이 큽니다. 1990년대 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홍수를 경험한 뒤로는 이 땅의 SF는 그저 로판타지(low fantasy)의 다른 말 정도로 폄하했던 탓도 있겠네요.

 그런 저이지만 김초엽은 꼭 좀 읽어 봐야겠다 생각했었습니다. 크게는 ‘K-SF 신드롬’을 시작으로 작게는 ‘김초엽 신드롬’이나 ‘우빛속 신드롬’ 따위로 언급되곤 하던 2021년의 기괴하리만치 과장된 찬가의 정체가 궁금했었나 봅니다. 다만 책을 구입하는 결심과 읽는 결심 사이에는 18개월이란 큰 틈이 있었습니다.



2. SF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저는 SF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SF영화는 좋아합니다. 소설의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직관적으로 펼쳐지는 영화야말로 진정 SF를 위한 미디어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습니다. 


 열한 살 때 읽었던 계몽사 간(刊) 이언 플레밍의 『치티치티 빵빵』이라던가, 그 이듬해에 읽었던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지저세계 펠루시다』와 같은 서사들은 몰입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물리법칙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상상불가’의 장벽 때문에 너무나 읽기 힘들었습니다. 배경지식이 너무 부족했던 탓에 그곳에 그려지는 위험의 정도도 이해 못 하거니와, 그런 상상이 어떤 불가능을 뛰어넘는 바람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묘사되는 것을 직관적으로 그려낼 수 없는 지식의 한계, 또는 직관력의 부족은 장르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렸습니다. 되레 그 시기 1920년대 한국단편소설들이 더 재미있게 읽혔던 경험은 SF에 대한 비호감을 높인 듯합니다.


 저는 그때쯤의 거대로봇물 만화들에도 좀체 몰입할 수 없었는데요, 특히나 합체로봇물에서는 한숨을 쉬며 한탄하기도 했었습니다. 컴배틀러V(콤바트라V 아니고)나 볼테스V(볼트화이브 아니고)를 보면서 ‘왜 합체를 할 때는 공격을 안 할까’에 대해 속 터지며 보곤 했는데요, 둘 중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실제 합체를 못하게 공격을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합체로봇류에 질색을 하게 됐습니다. 복학생 시절 술에 취하면, 문학동아리 후배들을 데리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곤 했었습니다. 합체로봇계의 교전수칙(rules of engagement) 상 합체 중에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거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나는 합체이지만 시청하는 어린이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슬로모션으로 표현한 것이라서 그렇다고 말이죠.

 무엇보다 로봇 조작을 위한 조종장치의 허술함에는 분노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되레 뇌파 공유형이나 조종 공간에서의 신경동조형태의 애니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1989년 현충일에 접했던 애니메이션 「에어리어 88」(지옥의 외인부대 아니고)에 미친 듯이 열광했던 것은 핍진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물론 비행 중에 주익을 접는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묘사도 있었지만, 함재기의 기능을 떠올릴 수 있었던 열한 살 소년의 직관적 이론들 intuitive theories에 반하지 않아 충분히 핍진성을 갖췄었습니다.)


verisimilitude 逼眞性  
 라틴어구 베리 시밀리스(veri similis, ‘진실 같은’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핍진성은 실물감(lifelikeness), 즉 텍스트가 행위, 인물, 언어 및 그 밖의 요소들을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이다. 이 용어는 대대로 리얼리즘과 동의로 쓰인다. 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 텍스트 외부의 현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스스로 정립하거나 그 텍스트의 장르 안에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서 얼마나 진실한가를 가리킨다. 바꿔 말해 초자연적 요소 내지 공상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는 설화도 그 나름대로 정립한 현실에 합치되는 한 고도의 핍진성을 가질 수 있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평범한 핍진성과 비범한 핍진성을 구별한다 전자는 인물과 사건이 얼마나 인식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이 있는가를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경이, 초자연주의,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사용을 가리킨다. 
- 조셉 칠더스, 게리 헨치.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서울: 문학동네. 1999


 저는 서사(narrative)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핍진성이라 생각하고, ‘비범한 핍진성’은 핍진하지 않다고도 생각해 왔습니다. 경이, 초자연주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서사에 개입하는 상황 자체가 그 서사의 세계관을 갑작스레 무너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로판타지(low fantasy)를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설정 오류’라고도 지적당하곤 하는 핍진성 부재의 서사들이었습니다. 돈오각성한 주인공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뜬금없이 문제가 해결된다던가, 완전무결한 신적 존재가 인간적 변덕을 부린다던가, 천하무적으로 표현되었던 적을 몹시 허술한 장치로 해치울 수 있게 된다던가 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기대 축조해 왔던 서사의 세계관을 단번에 붕괴시키는 묘사들에는 화가 치밀게 되곤 합니다.

 대거상을 수상한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에 분노했던 이유도, 이렇게 비현실적인 서사를 축조하다 생기는 빈틈을 어떻게 감당하려나 했던 우려를 뜬금없이 ‘진짜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서사를 급변시켜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난데없이 등장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서사는 ‘비범한 핍진성’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1968년에 개봉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A Space Odyssey」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공간과 인공중력을 발생시킨 우주선 안의 공간에 대한 핍진한 시각 효과를 보여주면서 명작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후 많은 SF영화들의 핍진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만, 여전히 숱한 SF영화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설명할 순 없지만 원래부터 존재해 왔던 인공중력’(또는 성간비행을 위한 워프항법)과 같은 판타지의 영역에 머물고 있긴 합니다. 심지어는 그런 설정조차 없이 중력이 존재하는 공간과 같이 묘사되기도 하죠.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설정오류’들은 핍진성을 처참하게 붕괴시키며 서사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찾아보다 보면, 대부분 SF라고 하는 서사들은 하이판타지(high fantasy)의 세계를 축조하곤 합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먼 미래에는 해결가능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 기대서, 현존하는 물리법칙을 아득히 넘어서는 세계의 원리를 구축하곤 합니다. 다만 그렇게 지어낸 ‘세계의 원리’가 서사의 진행 과정 중에서 상호 충돌하지 않고 정합성을 갖추게 된다면, 제법 핍진성을 갖추게 됩니다.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화한 1997년 개봉작 「콘택트」는 판타지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서사를 구성해 나갑니다. 스탠리 큐브릭 이후 최고의 SF영화를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곤 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2014년작 「인터스텔라」 역시 숱한 설정 오류 시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관람객들에겐 잘 짜인 설정을 통해 판타지 서사의 핍진성을 담보합니다.

 이쯤에서 생각해 보니.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어가 아니라 Science-like fantasy의 약어가 아닌가 싶어질 정도입니다. 컬트무비로까지 발전한 코믹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면 말입니다.


 과학적 근거, 즉 비현실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의 유무는 SF와 판타지를 구별하는 자질이었다.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사건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려 시도하거나 과학적 근거를 암시하면 SF소설이고, 비현실적 사건이 과학적 논리와는 무관하게 펼쳐지면 판타지라고 했었다.
 실제의 SF나 판타지의 사건들 가운데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사건인지, 그저 판타지적인 설정인지 구별하기가 모호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이쯤 되면 판타지와 SF를 구별해 주었던 앞의 준거는 무색해진다. 어떤 자질, 다시 말하면 환상성의 유무, 또는 비현실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근거 같은 자질로 SF와 판타지를 구별하기는 참 어려워졌다. 전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했지만 SF작가들의 상상력이 다양해지고 SF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판타지와 겹쳐지는 지점이 자주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 권혁준. 「SF아동청소년문학과 과학적 상상력」. 아동청소년문학연구 제21호(2017. 12) pp.7~39.



3. SF소설을 읽는 이유


 막상 리뷰를 정리하면서 생각해 보니, 학창 시절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SF소설에 대한 정의를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논문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것이 확인되는군요.


기존 문학 연구에서 SF문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그 원인으로 판단된다. 첫째, 일종의 'B급 문학'으로 재단해 온 관성이다. SF문학은 문학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적 핍진성과 합리적 구조성을 담지하지 못한 것으로 폄하되어 왔으며, 그 결과 현재까지도 SF문학은 문학장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둘째, SF문학이 생산-유통되는 구조가 주류적인 문학장과는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SF문학의 경우 '권위 있는' 등단 제도와 문예지 중심의 지면 배분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마니아적 게토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산-유통되는 경향이 훨씬 크다.
- 장성규, 「2000년대 한국 SF 문학 연구」. 스토리앤이미지텔링 2018, vol., no.16, pp. 225-251 (27 pages)


 사정이 이렇다 보니, SF의 개념 연구에 대해서도 통합된 개념들이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장르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고, 그리하여 SF와 판타지의 혼재 상황은 더더욱이나 과거에 정립된 개념을 뛰어넘으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SF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시작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시초라는 주장들이 혼재되어 있지만,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갖추고 소비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휴고 건스백 Hugo Gernsback의 역할이 컸다고들 평가합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동의했던 개념, 그러니까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들의 경향에 멈춰 있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얼 SF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위의 논문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핍진한 재현은 물론, 이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수행하는 문학 장르”라고 정리한 장성규의 개념이 제법 타당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 보니 노대환이 「SF의 장르 특성과 융합적 문학교육」(영주어문 2019, vol.42, pp. 221-245)에서 지적한 내용이 SF를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SF는 과학적 상상력을 표현하는 서사 장르로, 과학 지식과 이론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과 설명도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최근에 SF는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로도 불리며 자연과학 이외에도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의 지식과 관점을 활용한다는 점도 주목했습니다. 또한 외삽법(extrapolation)으로 미래의 변화를 예측(anticipation)해보는 문학이라고도 봤습니다. 그리하여 SF 장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도전적인 사유를 제기하는 노붐(novum) 등을 통해 철학적 논쟁과 사회적 성찰을 촉진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4. 막상 읽어본 김초엽의 ‘우빛속’


 장성규는 2000년대 한국 SF소설의 경향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악했는데요, 당혹스럽게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분류하자면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리뷰를 더 이어갈 생각이 푹 꺼질 만큼 말입니다. 아무래도 1993년생인 김초엽이 접했을 한국 SF소설들이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약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래할 미래에 대한 윤리적 질문

② 알레고리적 장치로 SF적 상황을 사용하여 현실의 모순을 환기

③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파국을 막기 위한 대안적 상상력 


 막상 이렇게 리뷰를 시작하긴 했지만, 제대로 뜯어보자면 두 번째 ‘알레고리적 장치’에 몰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하는데요, 장르적 특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선 첫 번째 유형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은 「감정의 물성」,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두 편, 세 번째 유형에 속할 수 있는 작품 또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한 편에 불과해 보입니다만, 그마저도 결국 두 번째 유형으로 수렴하고 맙니다. 


 SF를 통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해당 과학기술의 현재 수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생겨날 ‘일상’을 상상해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는 보통 일상에서 일탈할 때 생겨나기 때문에, 그 기준이 되는 보통 상황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윤리적 문제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상상해 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이를테면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상황처럼, 바이오해커에 의해 ‘완벽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인공자궁’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의 세상이 이룩된다면, 과연 ‘차별’이란 개념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의심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결함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만들어지나, 완벽하게 태어나도록 만들어지나 어차피 ‘인공적’으로 ‘제작’되는 인간 사이에 차별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 발생적 차이에 전속될 것인지는 회의적이게 됩니다. 차별의 근거로 발전하게 되는 차이는 워낙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적용 양태도 자의적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술 발달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고민해 내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김초엽의 두 단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디스토피아적 파국을 막기 위한 대안적 상상력은 발휘하기가 쉬운 편입니다만,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것이 어려운데요, 결국 극단적인 상상력의 발휘로 인해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상황으로 몰리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판타지의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성취되는 그럴듯함vraisemblance은 진부함에 빠질 위험도 높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디스토피아의 전형성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실수를 곧잘 합니다. 물론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텍스트 수용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러 상호텍스트성에 기반한 상투성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핍진성을 쉽게 얻으려는 장치들이 서사의 진부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김초엽 역시 함정에 쉽게 빠져서, 효과적으로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앞서 SF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에서도 꼽았듯이,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서사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개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바이오해커, 광자추진체, 미생물-외계생명씨앗가설, 센트럴 도그마, 유아 기억상실, 다중성계, 웜홀, 단분자 이미징과 같이 실재하는 이론 theory도 찾아봤을 때는 ‘오~ 이런 거야~’라면서 탄성을 내뱉다가도, 돌아서면 그게 뭐였더라 하곤 했습니다. 상호텍스트성에 기반해서 ‘직관적 이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공생가설, 워프, 판트로피와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로 서사에 몰입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고, 딥프리징이나 사이보그 그라인딩, 스택마인드와 같이 만들어낸 개념들은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SF소설을 읽지 않게 되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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