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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Apr 08. 2024

벽돌책을 읽는 이유1

[북리뷰] 에드먼드 포셋 著/장경덕 譯. 보수주의. 글항아리. 2024.

1. 벽돌책을 펼쳐보는 이유


보수주의는 정치 철학이 아니다. 보수주의를 철학으로 다루면 정치의 관점과 그 관점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정당화할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 숙고 사이에서 그 수준을 혼동하게 된다. - 639쪽

 25년 전쯤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보수주의자임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애써 숨기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동아리 선배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받으며 핀잔을 듣기도 했죠. 그 선배는 “000 교수(그 교수의 이름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가 말씀하시길, 보수주의는 주의도 아니다”라고 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인가 당시에는 몹시 궁금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헬레나 로젠블랫의 책,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을 읽으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독서에서도 그에 필적하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에도 십계명이나,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단, 창립자들의 독립선언문이 없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정본에 필적하는 교리 개론서도 없다”는 에드먼드 포셋의 지적을 참고해 본다면, 보수주의는 사상적 완결성을 갖춘 정치철학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시대와 주류 정치 세력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인 ‘관점outlook’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샤토브리앙은 자신이 “천성적으로는 공화주의자, 이성적으로는 왕정주의자, 명예에 따라서는 부르봉주의자”라고 했다. - 46쪽

 저는 스스로를 25년 전부터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너 같은 빨갱이 새끼가 보수주의자면, 나 같은 중도는 극우가 된다”라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었고, “너쯤이면 보수 정도가 아니라 반동분자reactionary”라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상반된 평가가 가능한 것은 한 개인의 정치 철학이 하나의 주의에 고착되어 있기는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맹종하는 교조주의자로 길러지지 않음 다음에야, 하나의 관점으로 사상의 대오를 정비하고 일사불란하게 행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치나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일 수는 있겠으나, 유독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만큼은 보수적이거나 우파적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마치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처럼 말입니다. 1818년에 <콩세르바퇴르Conservateur>를 발간하면서 보수주의란 말을 세상에 내놓았던 그도, 보수주의자란 하나의 레테르로 설명을 끝내기는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그저 ‘보수주의자’란 한 단어로 정체성을 규정하기는 꽤나 어려울 듯합니다. 이번 총선 사전투표에서 저는 지역구는 1번 그리고 비례대표에는 9번에 투표하려고 투표장을 찾았습니다만, 결국 지역구는 7번 그리고 비례대표는 5번에 투표하고 말았습니다. 투표 성향이나 정당지지 성향만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저는 그저 ‘빨갱이’가 될 겁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정당이라며 해산하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던 7번당의 후보는 참으로 끔찍한 선거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상식이 있는 머리에서라면 저따위 캠페인 전략이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또 투표했습니다. 2번당만큼은 아니지만, 1번당에 투표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사표가 될 줄 알면서도 이번에도 7번당에 투표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혀 빨갱이답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비례대표에는 5번당에 투표했습니다. 보수양당체제로 정치지형이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에 번번이 5번당을 찍어왔었습니다. 꽤나 자유주의자적인 사고이지만, 요즘 보수주의자들은 이 정도의 자유주의에는 포섭되어 있는 편이지요. 

 그래서 이번 독서는 보수주의자로서의 저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 제법 맘에 드는 해답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부유층의 후원, 제도적 지원, 유권자 기반이라는 삼중의 이점은 자유민주주의 게임에서 우파가 이기는 데 도움이 됐다. 혼란스럽게 들리겠지만 보수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타협한 데 따른 궁극적인 보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지배였다. - 77쪽

 곳곳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이기고 집권하게 됐고, 그만큼 보수주의자들의 책임도 커졌습니다. 19세기 초반 자유주의적 근대liberal modernity에 반대하면서 활동을 시작한 주류 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말에는 그 근대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독일의 우파 자유주의자인 다비트 한제만David Justus Ludwig Hansemann은 친구에게 “어제 자유주의적이었던 것이 오늘 보수주의적인 것이 되고, 이전의 보수주의자들이 기꺼이 이전의 자유주의자들과 연결한다”라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19세기 초반에도 그랬을진데,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19세기 방식으로 21세기의 보수주의를 설명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 기전체(紀傳體) 사서인 것처럼


 책의 구성은 1부 개론, 2부 총론, 3부 1830~1880년의 본기와 열전, 4부 1880~1945년의 본기와 열전, 5부 1945~1980년의 본기와 열전, 6부 1980~현재의 본기와 열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시대를 다루면서 2개의 장으로 나누어, 기(紀)와 같은 연대기적 기술을 앞에 배치하고, 전(傳)과 같은 해당 시대의 사상가들의 개별적 비평을 싣고 있습니다. 사상사적으로 유의미하고 대별적인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쓸데없이 세세하게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기 좋도록 집중도를 높여서 장점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 그리고 북유럽과 동유럽에 대해서도 궁금함이 남기 때문에 그 점에선 아쉬움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역사에서 시대 구분은 두부 자르듯이 반듯하고 깔끔하게 나뉠 수가 없습니다. 연결되기 때문이죠. 그렇다 보니 임의의 시대구분이 반복적으로 서로 간섭을 하고 있어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명확하게 도움이 됩니다.

 보수주의 1기의 시작은 프랑스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을 기점으로 잡았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자유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이고, 그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 보수주의이니 유효한 시점 선정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보수주의 2기의 시작은 유럽의 자유주의가 확장주의와 싸움을 시작하는 1880년으로 잡았습니다. 프랑스는 제3공화국의 벨 에포크belle epoch와 맞닿고, 미국은 도금시대gilded age와 겹칩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통치 아래 국민국가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였습니다.

 보수주의 3기의 시작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반공으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똘똘 뭉치는 1945년을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보수주의 4기는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는 영국,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는 미국, 헬무트 콜이 집권하는 독일,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하는 프랑스의 1980년을 시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의 황금시대가 열리는 시작점이기도 하죠.


 구성이 깔끔하다 보니, 따라가기가 어렵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본문만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다 보니, 읽어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네댓 시간을 투자해서 일주일을 꼬박 읽어야 했습니다. 하루 독서 시간이 한두 시간인 사람이라면, 한 달 내내 이 벽돌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만 해도 질립니다. 이러니 벽돌책을 완독 하는 일이 쉽지 않은 거겠죠.

 발췌록을 타이핑하는 것만도 A4 40페이지로 엄청난 시간이 걸렸습니다. 타이핑하면서 내용을 한 번 곱씹고, 완성된 발췌록을 일독하면서 두 번 곱씹는 보통의 독서루틴을 가져갔더니... 지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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