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마리서사_군산시 월명동

시인 박인환의 1945년 책방 "마리서사'의 발자취를 잇는다고 한다.

by 안철

마리서사 @mariebookstore


1. 군산까지 왔고, 숙소 근처인데...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진득하니 앉아서 책이나 좀 읽고 싶어서, 책을 세 권 챙겨 기차를 타고 군산에 온 터였다.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또 서점에 들러 책권수를 늘리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간만에 온 군산이니 잠깐 들러야 하지 않겠냐며 손짓하는 곳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서점 문턱을 넘는 일은 꽤나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2014년 봄의 동국사 대웅전 뒷편. 바람이 불면 풍경소리와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참 좋았다.

어느샌가 자낳괴에 가까워진 동국사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챙겨간 소설을 꺼내 읽고 있었다. 오후 세 시를 넘어가자 따뜻했던 햇살에서 공기가 차가워짐을 느꼈다. 이제 슬슬 실내로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마리서사 앞을 지났다. 짧아진 해가 책방 앞을 온전히 비추고 있어서, 도무지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소설을 지나고 동지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지라, 태양의 고도는 한껏 낮아졌고, 확장해 놓은 파사드의 차양 아래로도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 왔다. 이 장면이 보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카메라를 꺼낼 수는 없었다.



2. 왜 책방이름이 “茉莉書舍”일까?

내가 알고 있는 말리(茉莉)는 이승철이 “지쳐쓰러지며 되돌아가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인데도” 목놓아 부른 노래, <말리꽃>의 말리다. 책방을 말하는 서사는 한자로 書肆를 쓰고, 書舍란 선비들이 글공부하는 집을 일컫는다. 당최 이 마리서사의 한자 표기는 내 상식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니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상식에 어긋나는 표기는 어디서 온 것인지 말이다.


문제의 시작은 1945년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열었던 시인 박인환이었다. 그의 서점이름이 茉莉書舍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서점 이름을 따왔고,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칸마리(軍艦茉莉)》에서 마리란 표기를 빌려왔다고 한다.


우야든동, 그런 박인환의 마리서사의 의미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월명동에는 아직도 숱한 적산가옥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한 곳을 손봐서 문을 열었다. 적산가옥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비늘판으로 외부를 꾸몄다. 비슷한 형태의 적산가옥이 근처 구영3길 21-4번지에도 있다. 100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일본식 목조가옥이 어떻게 변화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구영3길 21-4번지의 한 적산가옥.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 중심부였던 곳이지만, 이제는 이렇게 방치된 집들이 많다.



3. 책이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서가

나는 눈대중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다. 지형의 파악은 꽤나 능숙하 편이라서,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 일은 제법 잘 한다. 하지만 거리로 설명된 경우에는 되돌아 오기 일쑤다. 부피나 규모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둔해서라기보다는 훈련이 안 된 탓이 클 테다.


그런 눈대중에 마리서사의 서가에는 대략 3,000권쯤의 책이 준비되어 있는 듯싶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책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동네책방의 가장 큰 미덕은 “너무 많지 않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맥락 속에서 선택의 폭을 줄여주는 것, 그것이 동네책방 북큐레이션의 의미라고도 본다. 그런 점에서 마리서사의 서가는 제법 적절하게 정돈된 느낌이었다.

11월말 오후 두 시쯤의 마리서사. 앞쪽 아파트에 가려졌던 해가 책방안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파사드의 한쪽은 그림책과 굿즈들이, 다른 한쪽에는 시집과 독립출판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건물 안쪽으로는 페미니즘 서적을 위시한 인문학서적에서부터 민음사,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류가 잘 정돈된 소설들이 책등을 보이는 서가가 꾸려졌다.

출입구에서부터 들어오게 되면 가장 쉽게 눈이 가는 전면에는 책표지가 보이도록 서가를 꾸몄다. 목재가구들이 평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제법 잘 정리된 느낌이었다.

개장하면서 신축된 듯한 파사드 영역을 넘어오면, 더 넓은 공간에 더 많은 책들이 서가를 채우고 있다.


4. 사진은 찍어셔도 됩니다만...

다른 손님이 계실 때는 자제해 주시길 바란다는 답을 들었다.

동네책방을 찾을 때면 언제나 사진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고 촬영을 한다. “큐레이션도 책방의 지적재산”이란 서울책보고의 캠페인성 피드에는 한껏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렇게들 생각하는 곳도 있다면 배려는 해야 한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카메라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책방지기로부터 세 명이 일행이냐는 반문을 들었다. 아... 저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그냥 찍고들 있었던 게로구나.


마리서사의 책방지기는 책의 내지를 찍는 것만 아니라면, 굳이 말리지 않는 입장이라고 했다. 다만 다른 내객들의 초상권을 침해하지 않고, 셔터소리가 책을 읽는데 방해되지 않도록만 해주었으면 좋겠다도고 했다. 이런 스탠스가 참 좋다.


오후 두 시인지라 아직 계간에 햇빛이 걸려 있다. 한 시간 뒤쯤이면 빛잔치가 일어난다.


기왕 말문을 텄으니, 조금 귀찮은 질문을 덧붙여 보기도 했다. “독창적인 큐레이션은 모방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지론이었던지라, 자못 장황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꽤나 생각할 여지를 남기게 해주었다.

마리서사처럼 주변에 경쟁상대가 없는 동네책방들이라면 괜찮지만, 관광지에 몰려 있는 책방들의 경우에는 책 한 권이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판매량이 달라진다고 한다. 어렵사리 좋은 책 한 권을 발굴해서 입고시켰는데, 옆 책방에서 그대로 같은 책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상황이 급변하더란 말을 전해 들었다고도 했다. ‘나이키의 가장 큰 경쟁 상대는 닌텐도’와 같이, ‘동네책방의 가장 큰 경쟁 상대는 넷플릭스’라고 말하기 멋쩍어지는 순간이었다. 제로섬이 작동하는 작은 시장에서 아귀다툼이 일어나는 소매점에게는 물색 모르는 백면서생의 고담준론일 뿐이리라.


말은 건네놓고는 그 햇볕좋은 시간에 사진을 찍진 못했다.

책방 안으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고, 몸은 너무 지쳐있었다. 숙소를 찾아가 눕고 싶었다. "저녁 먹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으나, 약속을 지킬 순 없었다. 가져간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땐, 이미 7시였다. 한일옥에서 소고기뭇국에 맥주 한 병을 비우고 나니, 마리서사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고 말았다.

2011년 6월 한일옥. 청진옥 선지해장국과 한일옥 소고기뭇국은 내 인생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음식 두가지가 됐다.


다시 찾은 한일옥의 소고기뭇국은 10년전의 감동을 되살리진 못했다. 초대가 기사식당으로 소고기뭇국을 팔 때와 사뭇 달라졌다. 평범했던 기사식당이 고급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간 것부터 시작해서, 밥을 말기 전까지는 이맛도 저맛도 아니었던 뭇국이 밥을 말아서 깍두기와 함께 먹게 됐을 때 기가 막히게 간이 잡혔던 그 감동이 꽤나 사그라들었다. 가격이 오르면서 그에 맞추어 내용물이 고급화되다 보니, 기사식당의 맛을 유지할 수는 없었던 게다.

하지만 이름값은 오래 가고, 허명은 또다른 허명을 낳는다. 장사는 잘 된다. 소고기뭇국은 맛있기 때문이다.

이 한일옥이 그 한일옥이란 걸, 두번째 군산 방문 후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군산의 마지막 일정은 마리서사가 됐다.

다시 오겠다던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책 세 권과 필름카메라 하나와 디지털카메라 하나가 들어가 있는 가방은 충분히 무거웠다. 책 한 권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점으로 밀려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은 꼭 필름카메라에 한 컷 담고 싶었다.

전날 동국사로 가는 길에 찍은 사진. 사진 파일에는 13:58분이 찍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엔 책이 네 권이 됐다.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안 그래도 작은 가방 안에 꾸역꾸역 들어갔다. 책을 넣어두었던 마리서사의 책봉투는 집에 도착했을 땐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결심한 군산으로의 책읽기 여정이었던지라, 코레일앱에서 군산행 왕복 기차표를 결제하자마자, 예약했던 김초엽의 소설집이 도착했다는 관악도서관의 알람을 받을 수 있었다. 제한기일 내에 수령할 수 없다 싶어 예약 취소를 했던 소설을 결국은 이곳에서 사고 말았다. 이럴 운명이었나 보다.

패키징도 동네책방 각각의 고유한 매력이라서, "봉투에 넣어드릴까요?"란 질문에 사양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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