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철 May 13. 2024

좌파는 ‘깨어나지’ 않았다, 고로 워크가 아니다

[북리뷰] 수전 니먼.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생각의힘. 2024.

1. ‘워크’가 아니라 ‘좌파’가 궁금해서 펼쳐든 책


 이 책을 펼쳐 들어야 하나 많이 망설였습니다.

 일단 워크가 뭔지 모르다 보니, 관심이 갈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뒤에 붙은 ‘좌파’가 끈질기게 미련을 남겼을 뿐이죠.

 저는 보수주의자이지만, 대체로 보편주의를 지지하고 인류의 진보를 믿는 편입니다. 심지어 권력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한 발도 더 내딛지 못한 고대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전 니먼의 기준으로만 보면 저도 그냥 좌파인 듯한데요, 그래서인지 젊었을 때부터 좌파와 진보에 대한 묘한 부채감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저인지라 보어인 좌파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끝내 펼쳐보고 말았습니다.


 막상 책을 읽다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주어인 워크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기보다는 끊임없이 좌파를 중심에 두고 서술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번역서를 읽다가 뭔가 이상한 감이 올 때는 원제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결이 틀어져 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곤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Left Is Not Woke>입니다. 제목이 참 절묘합니다. wake의 과거분사이면서, 그 본래 의미에서 전유한 새로운 의미의 woke가 중의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워크 무브먼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좌파는 ‘깨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도 ‘Left is not woke’이지만, 워크 무브먼트의 참여자들이 좌파 개념에 부합하지도 않기 때문에 ‘Left is not Woke’라 제목을 정한 듯합니다. 수잔 니먼은 끊임없이 ‘좌파란 원래 이런 것’이라 설명하면서 좌파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기준으로 워크가 좌파의 지형에 위치하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번역서의 제목은 주어와 보어의 위치를 바꾸어버렸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거죠. 이것 참, 또 헛웃음이 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책을 읽을 때 머리말 다음에 맺는 글을 읽곤 합니다. 책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이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고 했으니, 나는 이를 뒤집어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는 명제를 코다처럼 살짝 덧붙이고자 한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 이거 욕이 좀 나오더군요. 원제의 어순으로 번역 제목을 지어줬더라면, 저는 별 저항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겁니다.


 다만 원제 그대로를 맛깔나게 번역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저 동음이의어에 가까운 어휘를 활용한 말장난에는 답이 없으니까요. 

 또한 역자인 홍기빈의 번역은 훌륭했습니다. ‘빨갱이’가 쓴 책은 ‘빨갱이(홍기빈은 10년 전쯤에 좌파라 자칭하기를 그만두었다고는 합니다)’가 번역해야 용어 번역이 정확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빨갱이’들 중 상당수는 나이가 많고 문체가 고루한 편이라서, 그걸 친절히 ‘직역’하는 역자를 만나면 파파고가 번역을 했나 싶게 부자연스러워집니다. 그렇다고 젊은 번역가를 써도 딱히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되레 적확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난감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홍기빈의 번역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번역체를 벗어나 한글 표현이 잘 살아 있는 문장들 덕에 쉽지 않은 내용들을 나름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거나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는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는데요, 좋은 번역 문장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쉽게 들어왔습니다.



2. 워크 woke란 무엇인가?


 워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무슨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 Stay woke”라는 구절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 것은 위대한 블루스 가수인 레드벨리 Leadbelly가 1938년에 발표한 노래 <스코츠보로 소년들 Scottsboro Boys>이었다. 이 노래는 억울하게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오랜 국제적 항의로 누명을 벗게 된 아홉 명의 흑인 소년에게 헌정된 노래였다. 사람들이 종종 망각하는 사실이지만, 이 국제적 항의를 이끌었던 것은 공산당이었다. - 015쪽
 트럼프의 등장에 낙담한 오바마 시절의 아이들이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워크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대에 뒤처질 것을 두려워하는 출판사, 대학교수, 대기업이 부랴부랴 이 청년들의 추세를 따라잡으려고 나서는 바람에 워크 운동은 금세 세대 간 분열을 넘어서 그 이상의 운동이 되었다. - 246쪽
 대부분의 워크 활동가들은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권력 담론을 지지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자신이 진보를 추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또 그중 다수는 “사회 진보 자체가 계몽주의적 사유의 산물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라고 생각하는 전통에서 교육을 받았다. - 206쪽

 막상 읽기로 했으니, 워크 woke에 대해 이해하고 가야 할 듯했습니다. 이 책에서 단편적으로 설명하는 것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는 워크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워크운동을 다룬 국내 기사들을 좀 찾아보니, 이것 참 가관이네요. 특히나 보수언론들이 내뱉는 부정적 평가들은 엄청났습니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백래시 중에는 ‘Awake, Not Woke’와 같은 조롱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생기더군요. 네, ‘깨시민’이었습니다. 노무현정신 신봉자(노무현정신이란 것 자체를 공유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각자 나름의 ‘노무현정신’을 개별적으로 논위하기 때문에, 노무현주의자라 표현할 수가 없다.)들이 자칭하며 전유했던 ‘깨시민’이란 용어는 어느새 그 반대 진영에서 멸칭으로 전유하고 있었습니다. 워크 역시 똑같은 길을 걸었더군요. 보수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몇몇 좌파적 지표들을 보여주면서도, 온전하게 좌파적 이념 좌표에 안착한 것도 아니었더군요. 푸코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을 중심으로 정체성정치와 교차성과 같은 좌파 지형에서 출발한  담론들도 차용했다고 일컬어집니다. 수전 니먼이 “인종주의에 대항한 부족주의”라고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근본 없는 잡탕은 상당히 교조주의적으로 흘러간 듯 보였습니다.

 아무려나, 워크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독서가 아닌지라,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3. 좌파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이 책을 굳이 펼쳐든 까닭이기도 합니다. 이 책 5장의 제목이기도 하고요.

 20년 전에 저는 ‘한국 사회에서 좌파란 무엇인가?’에 대해 꽤나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기준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18세기말 프랑스 의회에서 왕당파와 공화파가 자리를 갈라 앉으면서 시작된 상대적 호명으로, 그 이후에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나눠가진 이름이라고요.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되며, 보수주의자는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되고,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로 규정되던 그 시절의 전통처럼, 유동적인 상대적 개념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당대의 정치세력 그러니까 의회 의석수를 기준으로 중심점을 잡고, 그 지점에서 좌파와 우파를 나누면 되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런 단순무식한 방식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는 거죠. 무엇보다 당대의 에피스테메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 등이 좌파라는 레테르를 가지고 있던 터라, 인식의 불일치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좌파=빨갱이=종북세력’으로 프로파간다가 횡행하던 시절인지라, 좌파라는 단어를 편히 쓰기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요.

 내 지인 중에는 스탈린주의자가 한 사람도 없지만, ‘누구 버전의 사회주의를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삼아야 하느냐'를 놓고 수십 년 동안 논쟁을 해온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트로츠키? 마오? 아니면 그람시를 읽어야 하나? 그런데 1991년이 지나자, 그중 다수가 이렇게 될 줄 그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란 작동할 수 없으며, 곧바로 강제 노동수용소로 이어지는 게 보통임을 자신들은 본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 243쪽

 미국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나 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스스로 좌파라고 불렀을 이들이 이제는 대부분 스스로를 진보라고 칭한다"며 "이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수전 니먼은 분석합니다. 

 그 혼돈의 시기에 좌파라 자칭할 일도 없고 누군가를 좌파라 호명해야 할 일도 없었기에, 좀 더 공부를 해보고 그 좌표를 나눠보자며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결국 20년이나 세월이 흘렀네요. 그래서 최근에는 좌파들의 저서들을 조금씩 찾아보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명징한 답은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 와중에 만난 수전 니먼은 “보편주의에 대한 신념, 정의와 권력의 엄정한 구분, 진보의 가능성”이 좌파의 본질이라고 할 세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조금 숨통이 트이는 조언을 얻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전을 읽는 이유 2 : 기원을 알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