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철 May 26. 2024

우연한 만남, 뜻밖의 즐거움 1: 오호, 이거 재밌네?

[북리뷰] 찰스 맥케이 /이윤섭. 대중의 미망과 광기. 필맥. 2018.

1. 잘못 고른 책을 펼쳐 읽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때, 가끔 함부로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특정 주제의 도서들을 검색해 보고는 대뜸 제목만으로 선택해 버리는 겁니다.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집 근처 전철역이나 동주민센터 ‘작은도서관’에서 대출 도서를 받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빌려와서 살펴본 다음,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반납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몇 차례 그냥 반납하는 책이 생기가 보니 방법을 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이런 경솔한 도서 대출의 마지막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독서는 다른 독서를 불러옵니다. 헬레나 로젠블랫의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와 에드워드 포셋의 『보수주의』를 읽으면서 몇몇 인사들의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였습니다만, 1/3을 읽는 시점에서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을 좀 찾다가 ‘무지성’으로 대출한 책이 이 책입니다. 군중심리가 사회심리학의 한 분야인 집단행동분석으로 이어진다는 대략적인 가닥을 잡기 전에 대뜸 고른 탓이 큽니다. 전철역에서 펼쳐보고 나서야, 실수했구나 싶었죠. 그제야 부랴부랴 학문적 토대를 찾아보고, 그 계보에서의 참고문헌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막상 목차를 살펴보니, 원하던 책은 아니지만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읽기로 했습니다.

 미시시피 계획, 남해 거품, 튤립 열풍과 같은 장에서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인터넷 밈이 떠오릅니다. 최근 암호화폐시장을 바라보면서 유시민이 던진 화두이기도 한 ‘튤립파동 tulipomania’을 생각해 보면, 300년이란 세월 동안 한결같이 광기에 가까운 탐욕을 보여준 자본주의적 인간의 어리석음에는 고개를 젓게 됩니다.

 연금술, 자기요법과 최면술, 자연사 위장 독살, 결투와 같은 장을 읽다 보면 어이가 없다가도,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이 저 시대의 미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떠올려 보곤 합니다. 35만 년 전에 발생해서 겨우 1만 년 전에야 비로소 석기를 쓸 수 있게 된 호모 사피엔스이니, 수백 년 만에 환골탈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요. 5천 년 정도의 역사시대 동안 한결같이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보면, 이건 종특이지 싶어집니다. 중근세의 예언, 점술, 유령이 출몰하는 흉가, 유물 수집과 같은 미신에 이르면, 더 확신이 듭니다. 머리와 수염의 모양, 유행어와 유행가, 큰 도둑 숭배와 같은 민속학적 주제들까지 더해지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다만 십자군이나 마녀사냥의 챕터에 이르면, 꽤나 끔찍합니다. 종교적 미망이 군중의 광기와 결합하면 얼마나 끔찍한 역사를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어쩌다가 군중은 이리도 어리석은 선택을 지지하게 되는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의 ‘군중심리’의 일단(一端)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따로 찾아보게 만듭니다. 무언가 깊은 함정에 빠진 느낌입니다. 갑작스레 읽어야 할 책 리스트가 대여섯 권은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2. 놀라운 반전


이 책은 1841년에 초판이 발간된 찰스 맥케이 Charles Mackay(1814-89)의 《대중의 미망과 광기 Memoirs of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를 축역한 것이다. 완역을 하지 않고 축역을 한 것은 축역만으로도 그 주요 내용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고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다 번역하면 일반 독자가 읽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484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원제가 궁금해졌고, 원제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일단 옮긴이의 말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뒤통수가 얼얼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됐습니다. 

 이 책을 쓴 것이 1841년이란 점에서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적어도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쓴 책인 줄로 알고 읽었습니다. 19세기 초반이라고 해서 대단히 이성적인 세계는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그 당시에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책을 쓰는 일이 지금처럼 편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다소 한정된 참고문헌을 가지고 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읽는 동안에는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당히 디테일한 인용들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이겠죠. 그만큼 저술 활동이 많아졌고, 출판물의 종과 양도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가십을 소비할 수 있는 언론매체도 많아졌다는 반증이겠죠. 게다가 1880년대에 들어서야 상업적인 신문이 등장할 수 있는 물적 토대, 그러니까 윤전기와 펄프 종이 그리고 자동조판과 같은 것들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프레스 프린팅 시대의 한정된 참고문헌으로 이만한 책을 엮어냈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편역이란 점입니다. 몹시 매끄러운 번역 문장은 원서의 문장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도 않았지만, 각 장의 들쭉날쭉한 양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내용 요약을 잘했다는 것이겠죠. 

매거진의 이전글 신간 서적 선택법 1: 전작이 좋으면 신작도 고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