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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May 28. 2024

고전을 읽는 이유 3: 오해를 교정해야 한다.

[북리뷰] 아리스토텔레스 著/천병희 譯. 정치학. 숲. 2009년.

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오해하는 법     


 저는 제5자 교육 과정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1990년에 중학교에 입학했고, 199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암기식 교육이 대세이기도 했고요. 어떤 학자의 학설을 그저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암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상식인 것처럼 가지고 있던 지식이 실상과는 조금 어그러진 경우가 있더군요. 이를테면 국민윤리 시간에 배웠던 맹자 성선설과 순자 성악설이 그렇고, 토머스 홉스 성악설과 존 로크의 백지상태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성선설이 그렇습니다. 특히나 사회계약설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그마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막상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어 보니, 성악설을 주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자연생태에서의 합리적인 자세가 자기 방어를 위한 상호 의심이라고 보고 있을 뿐이었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어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선한 것, 또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지만, 무엇이 선한 것이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잘못을 저지른다”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성선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지만, 그 선이란 것이 유동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겠지요. 그렇게 읽지 않은 텍스트에 대해 암기식 교육을 받았던 입장에선 꽤 큰 동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 읽거나 오해를 한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려웠는데요, 수전 니만 Susan Nieman 덕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에서 행간의 콘텍스트를 벗어나고 주요 어휘들로 상징화했을 때 빚어지는 왜곡은 꽤 거대해집니다. 반드시 그 책을 읽어서, 콘텍스트를 회복하여 올바른 이해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바른 이해를 하기에는 자신의 지적 능력이 여전히 부족하다면, 적어도 이식된 도그마들을 불식시키고 오해를 교정하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할 테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합니다.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말이죠. 저는 읽지 않은 책의 내용에 대해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굳이 고전을 챙겨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슷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장 자크 루소까지 관통하는 사고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不義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 - 22쪽

 인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가끔 무릎을 치게 합니다. “덜 가진 자들은 똑같이 갖기 위해, 똑같이 가진 자들은 더 갖기 위해 들고일어난다”라면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이를 위해 본성을 선하게 훈육할 필요가 있고, 법과 제도가 적절히 구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끝없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정의는 분배의 문제’ 임에 천착하면서, ‘부당하지 않은 분배야말로 정의’ 임을 설파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 그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선하게 살 수 있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딱 필요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재산의 평준화는 시민들 간의 파쟁을 막아준다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첫째, 배운 자는 자신들이 당연히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이런 평등에 불만을 느낄 것이고, 그것이 가끔은 혁명과 파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의 욕구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욕구란 원래 한이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구의 충족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재산을 평준화하기보다는 먼저 본성이 고귀한 자들은 제 몫 이상을 바라지 않도록 하고, 본성이 열등한 자들은 제 몫 이상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데, 본성이 열등한 자들이 제 몫 이상을 갖지 못하게 하려면 그들이 열등한 위치에 놓이면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말아야 한다. - 94쪽          



2. 국가란 무엇인가?    

 

 왜 근본이 중요한지는 첫 문장에서부터 드러납니다. 하나마나한 추상적 개념어의 향연처럼 보이는 문장들은 최소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 개념을 확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polis)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된다. 무릇 인간 행위의 긍극적 목적은 좋음(agathon)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공동체가 어떤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모든 공동체 중에서도 으뜸가며 좋음을 가장 훌륭하게 추구할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국가 또는 국가 동동체(politike koinonia)다. - 15쪽      


 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쯤 되면 원시적 형태의 3권 분립이 천명된 것이 아닌가고 말입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외웠던 존 로크의 2권 분립과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이 정치철학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지식은 또다시 깨지게 됩니다. 

 모든 정체에서는 세 부분이 있는데, 첫 번째는 공무(koina)에 관해 심의하는 부분(to bouleuomenon)이고, 두 번째는 공직에 관한 부분(to peri archas)이다. 말하자면 공직에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고, 그 권한은 무엇이어야 하며, 공직자들은 어떻게 선출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관한 부분이다. 세 번째는 재판에 관한 부분(to dikazon)이다.
 심의하는 부분은 전쟁과 평화, 조약의 체결과 폐기, 입법, 사형, 추방형, 재산몰수형, 공직자 임명, 임기 만료 시 공직자들에 대한 감사에 관한 최고 군력을 갖는다. 이 모든 결정권은 필연적으로 첫째, 시민 전체에게 주어지거나, 둘째, 몇 사람에게만 주어지거나(이를테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공직자에게 주어지거나, 어떤 권한은 어떤 공직자에게, 다른 권한은 다른 공직자들에게 주어지는 식으로), 셋째, 어떤 권한은 시민 전체에게 주어지고 어떤 권한은 몇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밖에 없다. - 240쪽    

      


3. 좋은 정체란 무엇인가?     


 플라톤의 『Politeia』에서 분류하기 시작한 정체(政體)의 분류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왕정basileia-참주정tyrannia, 귀족정aristokratia-과두정oligarchia, 혼합정politeia-민주정demokratia의 쌍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했고, 지금은 꽤나 다른 의미의 관용어까지 만들어낸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제게는 ‘근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플라톤이 기본 개념을 도입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의 정의를 이 책을 통해 확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와 같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개념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말이 말 같아야 말인데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말”을 반복하곤 합니다. 그래서 편하게 읽히지는 않습니다만, 전작에 비해서는 꽤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역인 천병희 선생 덕이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좋은 정치체로 ‘혼합정 politeia’를 꼽고 있습니다. 폴리스를 통치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은 말 그대로 폴리테이아가 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식들이 다른 이름들이 부여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혼합정이 가장 좋고, 그다음이 왕정과 귀족정, 민주정, 과두정, 참주정 순서로 내려간다고 봤습니다. 특히 민주정, 과두정, 참주정은 ‘덜 나쁘다’로 순위를 매겼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혼합정을 지금 시대의 말로 바꾸자면, 법치주의적 간접민주주의와 능력주의에 기반한 관료제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올바르게 제정된 法(nomos)이 최고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통치자는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모든 경우에 보편타당한 규정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법이 정확한 지침을 제공할 수 없는 업무들만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  166쪽


 주권자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수, 즉 “의결권과 재판권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인 시민에 근간한다고도 봤습니다. 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생업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그렇기에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그 시간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산계급으로, 더 나아가서는 그 교육을 통해 전문 영역의 통치 행위에 가담할 수 있는 엘리트이기도 한 이들로 구성된 것이 시민이며, 그 시민들의 공동체가 국가란 것인데, 그 시민들의 격차가 크지 않은 상태가 최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모든 국가는 질(to poion)과 양(to poson)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질이란 자유, 부, 교육, 좋은 가문을, 양이란 대중의 수적 우위를 뜻한다. 질은 국가를 구성하는 부분 중 어느 한쪽에 양은 다른 한쪽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질과 양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빈민의 수가 다른 쪽의 질적 우위를 상쇄하고도 남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민주정체가 생겨난다. - 235쪽


 특히나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특정 직군, 그러니까 법률 체계의 구축, 정책 입안, 재판 등의 과정에서는 엘리트가 필요합니다. 이런 직군에 추첨으로 뽑힌 인사가 자리한다면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요 포스트를 추첨으로 채우는 민주정(demokratia)보다는 전문가를 선거로 뽑는 귀족정적인 과두정을 결합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가의 요직에 취임할 자들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기존 정체에 충성심이 있어야 하며, 둘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고도의 능력을 갖춰야 하며, 셋째, 각각의 정체에 맞는 미덕과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정체에 따라 정의의 원칙이 달라지는 것이라면, 그에 따라 정의의 성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298쪽     


 책의 말미에서 좋은 정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에 대해 참 많은 말을 이어 나아가지만 잘 감겨오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교육이란 게 겨우 이 수준이었기 때문에, 진짜로 필요한 교육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겠지요. 

 아이들에게는 대개 네 과목을 가르치는데, 읽기와 쓰기(grammata), 체육(gymnastike), 음악(mousike), 그리기(graphike)가 그것이다. - 429쪽     
만화로 하는 프리뷰는 늘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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