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철 Jul 08. 2024

참을 수 없는 번역서 제목 장난질의 짜증스러움

[북리뷰] 조지프 헨릭. 호모 사피엔스. 21세기북스. 2024.

1. 원서명과 번역서명 사이의 간극


 최근 재밌는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하드커버 장정에 본문만 500페이지에 미주까지 포함하면 600페이지를 넘기는 벽돌책입니다. 해당 학술분야에서 연구를 위해 써낸 전문서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서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책입니다. 글을 따라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지만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처럼 책 읽는 속도가 느린 사람은 순수 독서 시간만 18시간이 걸렸습니다. 2주간 다른 책을 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이 한 권만 읽었습니다만, 그래도 이 책을 놓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내용이 재밌어서'였습니다.


 신간서적인 줄 알고 골랐던 책이었지만, 알고 보니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책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버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인류학자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이, 아직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인 2015년에 프린스턴대학출판부를 통해 출간한 책입니다. 원서 제목은 《The Secret of Our Success: How Culture Is Driving Human Evolution, Domesticating Our Species, and Making Us Smarter 》으로, 아래 좌측 이미지가 표지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2019년 한국에 번역 출간되면서 나온 제목이 살짝 바뀝니다. 뿌리와이파리에서 출간할 때엔  '호모 사피엔스'가 은근실적 앞에 붙더니, 2024년 21세기북스에서 재출간되면서는 아예 '호모 사피엔스'가 제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변화만 살펴보면, 아주 어질어질합니다.



 원서 제목만 보면, 이 책이 담는 내용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공의 비밀: 문화가 인류 진화를 추동하고, 인류란 종을 가축화하며, 더 똑똑하게 만든 방법'에 대해 인류학적 연구를 토대로 인지심리학과 경제학 등 인접 학문들의 연구 결과까지 갈무리해서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습니다. 이러니 내용 자체는 재미없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인류학이란 '유사과학'에 대해 흥미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번역서의 제목은 원서명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지극히 적습니다. 딱히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 번역서의 제목은 '집단지성'으로 바뀌었고, 중국 번역서는 '인류가 성공적으로 지구를 통치하는 비밀'로, 일본 번역서는 '문화가 사람을 진화시켰다'로 각각 바뀌었습니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제목들이 창조되었습니다. 프랑스어판은 집단지성(한국어에서는 집단두뇌로 번역한 듯)에 주목한 듯하고, 중국어판은 '성공'과 '비밀'이란 원서제목에 집중한 듯하며, 일본어판은 '문화적-유전적 공진화'에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서명과 완전히 다른 제목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마케팅 목적입니다. 원고료, 번역료는 물론이요,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간 품삯까지 생각한다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을 팔아야 합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제목일지라도 강행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책이 담고 있지 않거나 곁가지로 다루고 있는 내용을 제목으로 반영하기도 하고, 내용과 배치되는 제목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유출판사가 참 자주 하는 추태인데요, 그곳만 탓할 수는 없게, 참 많은 출판사들이 '디폴트값'처럼 제목을 '왜곡'합니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주 부적절한 제목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보통 인간을 Homo sapiens라는 이명법(Binomial nomenclature)으로 지칭할 때는,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가 바닥에 깔려 있기 마련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하며, 그리하여 지구를 지배하는 우리 인류의 특별한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를 민족지학(ethnography)으로 접근한 이 책에도 어울리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제목 덕분에 제 시선을 끌었고, "도대체 이 제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냐"는 궁금증도 자아냈습니다. 결국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목차를 살펴보게 만들었고, 그 내용에 흥미를 느껴서 실제로 책장을 펼쳐보게 됐습니다. '제목 장난질'이 성공한 겁니다. 


 그렇다고 참을 수 없는 짜증스러움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저의 독서습관은 우선 머리말을 읽어 보고 그다음 원서명 등의 서지 정보를 확인하는 루틴을 구성합니다. 익히 알고 있지 않은 학역의 책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잘 모르는 동네를 간단한 약도 하나 들고 탐험하는 듯한 불안함으로 독서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때 책의 제목과 머리말의 정보는 방위가 표시된 약도나 컴컴한 동굴을 비추는 손전등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제목을 창조적으로 바꾼 경우'를 겪게 되면, 엉뚱한 곳을 북쪽으로 표시한 약도나 맞지 않는 배터리를 끼워준 손전등을 손에 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순간 참기 힘든 짜증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거죠. 

 결국 방위를 잘못 표시한 약도나 배터리가 맞지 않는 손전등을 준비했다면, 입구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채비를 다시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책을 읽기도 전에 리뷰의 절반 분량이 될 불평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무슨 내용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나, 이런 사전 작업을 거치고 나서야 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목 장난질이 여건 짜증 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2. 모든 내용은 17장에서 요약된다.


 이 책이 다룬 '우리의 성공 비밀"은 17장의 477쪽과 496~498쪽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4페이지만 읽으면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500쪽짜리 책을 쓸 이유가 없겠지요. 되레 4쪽의 요약을 당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이해시킬 목적으로 나머지 500쪽에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 생리와 해부구조의 많은 측면들은 불, 조리, 자르는 도구, 발사 무기, 물통, 여러 인공물, 사냥감 추적 노하우, 의사소통 목록 같은 것들의 문화적 진화가 만들어낸 선택압에 대해 유전적으로 진화한 반응으로서만 이해가 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특징들 중에서 우리의 작은 치아, 짧은 결장, 작은 위, 빈약한 식물 해독 능력, 정확한 던지기 실력, 목덜미인대(달리는 동안 머리를 안정시키는 장치), 수많은 에크린 땀샘, 긴 번식후기, 낮은 후두, 재주 많은 혀, 하얀 공막, 커다란 뇌 등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5장, 13장)
 우리의 인지능력과 편향 가운데 다수는 가치 있는 문화적 정보의 존재에 대해 유전적으로 진화한 적응물로서만 이해가 된다.(4, 5, 7장) 우리의 잘 연마된 문화적 학습능력, ‘과잉모방’하는 경향, 동식물에 관해 알게 되는 것들을 조직화하고 농축하는 민간생물학적 능력을 포함해 많은 것들이 이렇게 진화한 기제들이다. 공경할 동기, 여러 양상의 흉내와 모방, 다면적 자존심, 협력하는 경향, 신체적 표시를 포함한 우리 종의 지위 심리 대부분은, 가치 있는 문화적 정보가 우리의 사회적 집단 구성원의 마음 곳곳에 고르지 않게 분포되어 있던 세상에 대해 유전적으로 진화한 적응물인 것처럼 보인다(8장).
 우리의 사회적 심리는 사회적 규칙과 평판이 존재하는 세상, 다시 말해 그러한 규칙을 배우고 따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며 집단마다 상당히 다른 규범을 보유하는 곳을 항행하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9~11장). 우리는 대가가 비싼 규범 자체를 보통 문화적 학습을 통해 목적으로서 내면화하고, 위반이 협력과 무관한 경우에도 규범 위반자를 찾아내는 데에 뛰어나다. 우리 자신의 집단을 위해 최선인 규범을 배우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방언이나 언어와 같은 표지 형질을 사용해 잠재 본보기를 구별한 다음, 우리의 표지 형질을 공유하는 사람을 문화적 학습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우선적 목표롤 삼는다. - 477쪽

이쯤에서 '성공의 비밀: 문화가 인류 진화를 추동하고, 인류란 종을 가축화하며, 더 똑똑하게 만든 방법'에 대해 상당한 요약이 가능할 듯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집단두뇌이며, 이 집단두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 큰 뇌가 필요해집니다. 더 큰 뇌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유아기를 거치며 몸을 만들어내는 '시동 단계'가 필요하며, 그 동안 유아가 잘 크려면 보육에 집중하는 '가족'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이 가족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진화가 바로 '짝 결합'과 '근친상간의 금기'라는 거죠. '짝 결합'을 통해 아이의 부친이 누구인지 확정되어야만 그 부친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짝 결합에 있어서의 자원 배분의 문제에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도출되었다고 봅니다.

더 커진 뇌는 또 다른 문화적 진화를 이끌어 내고, 이 문화적 진화는 유전적 진화의 공진화를 가져옵니다. 뇌가 커지면서 의사소통이나 불과 도구의 사용이 가능해지고, 의사소통은 발성기관이나 눈의 흰자와 같은 유전적 진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언어라는 문화적 진화를 가져왔습니다. 불의 사용은 소화기관의 극적인 생물학적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또 유전적 진화를 도출해냅니다. 도구의 사용은 직립을 위한 근육과 엄지 사용을 위한 손근육의 생물학적 진화를 가져옵니다.

이 과정에는 인간의 집단화가 필수적입니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문화적 진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유전적 진화 역시 빠르게 진행된다고 봤습니다. '더 큰 집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체간의 갈등을 줄이거나 회피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권력에 의한 질서보다는 명망에 의한 질서를 채택했다고 봅니다. 힘 있는 놈이 그때 그때 멋대로 집단을 운영하는 것보다, 명망 있는 사람(명망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관대하다고 한다)이 예상가능한 사회규범 내에서 이끄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기에, 인간은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를 받아들였다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게 됩니다.

 다음은 이 책에서 이끌어낸 여덟 가지 통찰이다.
 1. 인간은 생각, 믿음, 가치, 사회규범, 동기, 세계관을 공동체 안의 남들에게서 습득하는 적응적인 문화적 학습체다. 문화적 학습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명망, 성공, 성별, 방언, 민족의 단서를 사용하고 특히 음식, 성관계, 위험, 규범 위반과 같은 특정한 분야에 주목한다. 불확실성, 시간의 압박, 스트레스에 눌리면 특히 더 그렇게 한다. 
 2. 그러나 우리는 호구가 아니다. 이상한 음식을 먹는 것이나 사후세계를 믿는 것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관행 또는 비직관적인 믿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신뢰도증강표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본보기는 극한의 고통이나 믿음이나 관행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뢰도증강표시는 통증을 쾌감으로 바꾸고 순교자를 가장 강력한 문화전달로 만들 수 있다.
 3. 인간은 지위를 추구하는 자이며, 명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나 행실이 높은 명망으로 이어지느냐는 지극히 가변적이다. 사람들이 남에게 큰 명망을 부여하는 것은 그가 사나운 전사여서일 수도, 상냥한 간호사여서일 수도 있다.
 4. 우리가 습득하는 사회규범은 많은 경우 내면화한 동기와 세계관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남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기준도 동반한다. 사람들의 선호와 동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잘 설계한 계획이나 정책으로 사람들이 바람직하고, 자동적이고, 직관적이라고 느끼는 대상을 바꿀 수 있다.
 5. 사회규범은 우리의 선천적 심리를 끌어들일 때 특히 강하고 오래간다. 예컨대 외국인에게 공정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규범은 어머니에게 자식을 돌볼 것을 요구하는 규범보다 확산되고 지속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책 전반에서 가까운 친족을 향한 편애, 근친상간에 대한 혐오, 호혜에 대한 선호, 고기를 피할 용의, 짝 결속의 욕구를 포함하는 우리 심리의 선천적 측면들에 갇혀 있는 규범들을 논의해 왔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의례도 우리 심리의 많은 선천적 측면들을 강력하게 이용하도록 문화적으로 진화해 왔다.
 6. 혁신은 우리의 집단두뇌가 확장되는 데에 달려 있고, 집단두뇌 자체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회규범, 제도, 심리가 사람들을 고무해 참신한 생각, 믿음, 통찰, 관행을 자유롭게 생산하고, 공유하고, 재조합하도록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7. 다른 사회는 전혀 다른 사회규범, 제도, 언어, 기술을 보유하고, 그 결과로 보유하는 추리 방식, 정신적 발견법, 동기, 정서적 반응도 다르다. 다른 곳에서 들여온 새로운 공식 제도를 개체군에 부과하면 곧잘 불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 그렇게 부과한 공식 제도는 상당히 다르게 작동하거나, 어쩌면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8. 인간은 의도적으로 효과적인 제도나 조직을 설계하는 데에 서툴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과 문화적 진화를 더 깊이 통찰함으로써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말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문화적 진화의 각본을 선례로 삼아 선택 가능한 제도를 또는 조직 형태들의 경쟁을 허락할 ‘변이와 선택의 개체’를 설계해야 한다. 우리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를 간직하면서, 바라건대 그 과정에서 어떤 일반적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496~498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