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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타인의 고통_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관음증 또는 포르노그래피

by 안철

[리뷰] 수전 손택 著/ 이재원 譯.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관음증 또는 포르노그래피



뉴스 영상, 특히 전쟁의 재난을 전하는 영상을 소리 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인간이란 몸뚱이구나, 하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듯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 요시다 슈이치 著, 이명미 譯. 파크라이프. 은행나무. 2015. 65쪽

몇 달 전, 20년 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구절을 읽다가, 문득 수전 손태그의 이 책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읽어본 적도 없는 이 책의 몇몇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공감과 재현의 윤리에 관해 쓰인 여러 편의 논문과 비평 덕분일 겁니다. 요시다 슈이치가 소설을 출간한 때와 수전 손태그의 이 책이 출판한 시기가 비슷하다는 것만 놓고 보면, 아무래도 911 테러 이후의 지식인들은 미디어를 통해 국제정세를 바라보면서 일관된 에피스테메를 형성할 수 있었나 봅니다.

수전 손태그 Susan Sontag의 책,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는 Farrar, Straus and Giroux의 임프린트인 Picador에서 2003년에 출간했습니다. 2004년부터는 펭귄랜덤하우스의 임프린트인 펭귄북스에서 페이퍼백을 출간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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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인의 고통


이 책의 제목이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입니다만, 그에 대한 기술이 중심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1977년에 쓴 『On Photography』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이란 평가가 있을 정도로, ‘미디어’에 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아 당혹스럽긴 합니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 23쪽

수전 손태그는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며, 기독교 예술의 맥락에서 알기 쉽게 설명합니다.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으로,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인데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라고 설명합니다.

고통이란 개탄스러운 일이며 가능하다면 멈추게 해야만 할 일이라서, 이를 재현하는 행위도 이미지의 역사에서 특정한 주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이미지들은 이중의 메시지가 있는데,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인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 부재하는 ‘우리’의 안전감을 고양한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게 되다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쓸 수는 없게 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라는 평가는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The iconography of suffering has a long pedigree. The sufferings most often deemed worthy of representation are those understood to be the product of wrath, divine or human.



2. 관음증, 또는 고통의 포르노그래피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오늘날의]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 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 39쪽

어느샌가 일상의 일면으로 자리 잡은 이 세태를 작정하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제법 잔인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한다는 것, 이 무참한 행동을 수전 손태그는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라고 말합니다.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고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 - 144쪽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는 행위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라고까지 선언합니다. “전쟁은 도저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소식”이라서, “전쟁에 비견할 만한 대체물로는 국제 스포츠 경기밖에 없을 것”이라 비꼬면서 말입니다. 이는 자신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에서 오는 “관음증적인 향락”에 근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실제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강화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작전이었던 넵튠스피어 작전이 그랬던 것처럼, 명령을 내리는 곳은 미국 본토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곳은 미국 밖인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특히나 MQ-9과 같은 무인기를 운용하는 곳이 네바다주 크리치 공군기지이다 보니, 더더욱이나 ‘화면 속의 전쟁’ 이미지를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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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images that display the violation of an attractive body are, to a certain degree, pornographic.



3. 재현의 윤리: 고통의 대상화


타자의 고통을 다룸에 있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재현의 윤리가 될 겁니다. 이미지의 대상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그리하여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그에 대한 기술이 제법 많습니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 - 125쪽

회화와 달리, 사진(그리고 그 이후의 영상)은 대체로 그 자체로 객관성을 인정받곤 합니다. 물론 미장센(Mise-en-Scène) 사진과 같이 작위적인 사진도 있고, 손태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베트남 전쟁 이전의 전쟁 사진들 역시 미장센 사진처럼 조작이 있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흔히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경우, 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진이 말해 줘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읽게 된다. - 52쪽

사진은 힘이 셉니다. “[감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그 판단의 근거를 나타내는 일종의 토템 기능”을 합니다. “말로 된 표어보다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정서를 훨씬 더 구체화하는 것”이라죠. 더욱이, “여태껏 알고 있지 못했던 사진이 유포되어 우리에게 사후적으로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진은 프로파간다에 동원되기도 합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전쟁 통에서도 같은 이미지가 똑같은 맥락으로 서로를 비방하는 데 사용되었다시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사진을 이용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변덕과 충절로 부풀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진작가의 의도만으로는 자체만의 이력을 지니게 될 사진의 의미를 결정짓지 못한다”고도 봤습니다.

이때 사진은 기록으로서의 객관성과 시각예술작품으로서의 미학 사이에서 재현의 윤리에 맞닥뜨립니다. 손태그는 “비참한 일들과 비난받아 마땅한 일들의 증인이 되어주는 사진은 ‘미학적’인 듯이 보이기만 하면, 간단히 말해서 지나치게 예술인 듯하면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라고 평합니다. 이는 사진이 지닌 그 이중적 힘 때문이라는 것이죠.

앞서 언급했다시피, 고통의 도상학이 보여주는 긴 계보학에는 회화적 구도는 물론이고, 그 종교미술의 회화적 도상(icon) 역시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에 따라 심미성을 갖춘 회화적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수단화했다는 비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작가성’에 천착하는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피사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인물 사진”은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라서 말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심미성을 배척해도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을 괴롭혀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특히나 “사진이 소비자들의 행동을 조작하는 데 멋지게 사용되는 세계에서라면, 슬픔으로 가득 찬 장면이 찍힌 어느 사진이 뭔가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당연시될 수도 없”기 때문이죠.


PHOTOGRAPHS OBJECTIFY: they turn an event or a person into something that can be possessed. And photographs are a species of alchemy, for all that they are prized as a transparent account of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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