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루쉰. 루쉰 독본. 휴머니스트. 2020.
풍문처럼 들려오는 인용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루쉰이 어딘가에서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겁니다. 정확한 표현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동네 도서관에 있는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결국 이 책에서 해당 평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문을 읽듯이 제목을 읽어보면, 대충 ‘페어플레이를 논하는 것은 마땅히 늦추어야 한다’라는 뜻인데요,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번역이 깔끔하게 잘된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루쉰이 발언을 정확히 알아보고 싶었던 까닭은 요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란 수괴 윤석열과 극우들의 반동적인 행태는 상식을 뛰어넘고 비현실로 치닫고 있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단한 정신 무장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류근 시인이 한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루쉰을 인용하는 걸 듣고는, 마침내 글을 찾아봤습니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1925년 12월 29일에 발표됐습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첫머리에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어사(語絲)》 57호에 린위탕(林語黨, 1895~1976) 선생이 ‘페어플레이(fair play)를 이야기하며, 중국에서는 이 정신이 가장 부족하기에 적극적으로 고취해야 한다면서,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 페어플레이의 의미라고 보충 설명을 했다. - 269쪽
《語絲》五七期上語堂先生曾經講起“費厄潑賴”(fair play),以為此種精神在中國最不易得,我們只好努力鼓勵;又謂不“打落水狗”,即足以補充
루쉰은 반혁명 세력에 대한 전향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임어당의 '페어플레이' 운운이 헛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강한 분노와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페어플레이 같은 한갓진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말합니다.
요컨대, 나는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에 있건 물속에 있건 모조리 때려야 할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 271쪽
總之,倘是咬人之狗,我覺得都在可打之列,無論牠在岸上或在水中.
당시 중국 상황은 이 글에서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925년의 중국은 다소 혼란스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을 이룩했지만, 1913년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고, 1915년 12월에는 위안스카이의 칭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1919년 5.6 운동으로 반제국주의적 시대정신을 공유한 이후로, 공화국에 대한 반동세력에 대한 처단이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관료들과 토종 신사들, 서양 물을 먹은 신사들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조리 빨갱이나 공산당으로 몰아버린다. 중화민국이 수립되기 이전에는 약간 달랐다. 처음에는 캉유웨이(康有爲) 당(黨)이라고 몰아붙였고, 심한 경우 관청에 밀고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존엄과 영예를 보존하려고 그러기도 했지만, 혁명당을 밀고하거나 살해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혁명(신해혁명-옮긴이)은 결국 일어났다. 거드름을 피우던 신사 무리는 초상집 개처럼 주눅이 들어 늘어뜨리고 다니던 변발을 황급히 틀어 올렸다. 혁명당도 새로운 기풍, 예전에 신사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던 그 새로운 기풍을 발휘하며 제법 '문명'해졌다. 그들은 다 같이 유신이 된 마당에, 우리는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마음대로 기어오르게 내버려 두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기어올랐고, 민국2년(1913년-옮긴이) 하반기까지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쑨원(孫文, 1866-1925)이 황제 등극을 꿈꾸던 위안스카이를 토벌하려고 2차 혁명(1913년-옮긴이)을 일으키자 뛰어나와 위안스카이를 도와서 수많은 혁명가를 물어 죽였다. - 272쪽
1913년과 1916년에 걸쳐서 반동의 준동을 경험한 이후인지라, 이에 대한 발본색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복적으로 지적합니다. 유럽의 나치 청산과 우리의 일제 청산을 떠올려 보면, 반동의 청산은 오래도록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명확해집니다. 그래서 반동세력이 벌이는 협잡에 속아서, 용서와 화해 같은 물러터진 소리를 하다가는 역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루쉰의 지적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내게 잘못을 해도 따지지 않는다[犯而不校].”(<泰伯>편, 《논어》)라는 것은 관용의 도[恕道]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라는 것은 곧음의 도[直道]이다. 그런데 중국에 제일 많은 것은 삐뚤어진 도, 즉 왕도(枉道)이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게 물린다. 하지만 기실 순진한 사람들은 사서 고생을 한다. - 274쪽
“犯而不校”是恕道,“以眼還眼以牙還牙”是直道。中國最多的卻是枉道:不打落水狗,反被狗咬了。但是,這其實是老實人自己討苦喫。
그래서일까요. “아직은 이르다”는 말이 절규처럼 들립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글이 왜 그렇게나 많은 '빨갱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는지, 이로써 명확해지는 듯했습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고, 정의는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타협 따위를 입에 담는 것은 불의에 굴복하는 것과 같아 보였겠지요. 따라서 상황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흔들림 없이 청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단호함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한국의 상황을 봐도 그렇습니다. 윤석열 내란 세력에 대한 수사가 지연되고 한정되는 것이나, 내란 수괴 윤석열의 사법 지연 행위를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하는 채로 있다 보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으면 도리어 개에 물리는” 상황에 처한 듯해서 말입니다.
지금은 아직 '페어'만 할 수 없다.
어진 사람들은 물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페어플레이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나는 즉각 대답할 수 있다.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 276쪽
論現在還不能一味“費厄”
仁人們或者要問:那麼,我們竟不要“費厄潑賴”麼?我可以立刻回答:當然是要的,然而尚早。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반동세력에 대한 적개심만을 드러내며, 날을 세우고 살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언제쯤이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줍니다. 이보다 더 명쾌할 순 없는 기준이라며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페어플레이 정신을 보편적으로 실시하려면 적어도 물에 빠진 개들이 인간다워진 다음에 해야 한다. - 277쪽
所以倘有人要普遍施行“費厄潑賴”精神,我以為至少須俟所謂“落水狗”者帶有人氣之後。
인간은 살아가면서 대립하는 양 진영 사이에 놓이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진영이 비등(比等)한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닌지라, 때때로 옳지 못한 소수에 섞일 때도 있고, 옳은 소수에 속할 때도 있습니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옳지 못한 소수들은 효과적인 반동(反動)을 기획합니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인지라,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고는 야금야금 정의를 희롱합니다. 옳지 못한 다수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랄한 박해가 지연 없이 무자비하게 쏟아집니다.
반개혁가들의 개혁가에 대한 악랄한 박해는 한 번도 미루어진 적이 없으며, 그 수단의 극렬함도 이미 극에 달했다. 오직 개혁가들만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으며, 늘 손해만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아직도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 280쪽
反改革者對於改革者的毒害,向來就並未放鬆過,手段的厲害也已經無以復加了。只有改革者卻還在睡夢裏,總是吃虧,因而中國也總是沒有改革,自此以後,是應該改換些態度和方法的。
그래서 다수가 옳은 일을 할 때에도 “관용” 같은 한갓진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부 분열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반동세력에게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복음서 1장 5절에서는 “그리고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또한 어둠은 빛을 집어삼킬 수 없다(et lux in tenebris lucet, et tenebrae eam non comprehenderunt.)”라고 하지만, 실제 우리는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을 너무 많이 봐온지라, 그 사필귀정이란 한갓진 소리를 믿고 있기도 어렵습니다.
향후 빛이 어둠과 단호히 투쟁하지 않으며, 순진한 사람들이 악에 대한 방임을 관용이라 잘못 생각하고 계속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278쪽
假使此後光明和黑暗還不能作徹底的戰鬭,老實人誤將縱惡當作寬容,一味姑息下去,則現在似的混沌狀態,是可以無窮無盡的。
기대했던 것보다 몹시 통쾌한 글이었습니다.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때려야 한다”는 속 시원한 표현 때문만이 아니라, “아직은 이르다”라며 단호해야 하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결연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해야 할 때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할 이유가 없다는 걸,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통렬하게 깨달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100년 전의 루쉰의 충고가 더 깊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