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기억 그리고 정치적 상상체로서의 민족 형성
이 책을 펼쳐 든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모든 것의 새벽』을 읽은 이후였고, 제목에 들어 있는 ‘초기 문명’에 주목했을 뿐입니다. 저자인 얀 아스만이 모리스 알박스 Maurice Halbachs와 더불어 기억 연구 memory studies의 대가로 손꼽히는 줄도 모른 채, 그저 문명 초기에 대한 21세기적 연구 동향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 책의 독일어 원본이 1992년에 출간됐으니, 그마저도 시차가 존재하네요.
막상, 1992년 저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접했을 때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게으름에 제대로 읽지 않고 책장을 덮었던 책이 한 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2쪽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끔찍한 범죄와 재앙을 겪은 한 세대의 목격자들이 지금 숨을 거두고 있다. 통상 40년 기간은 집단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한계로 여겨진다. 살아있는 이들의 기억이 점차 줄어들면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기억이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비록 역사, 기억, 기억술 mnemotechnics을 둘러싼 논쟁이 때론 추상적이고 학술적으로 보일지라도, 나한테 그것은 이 시대 담론의 최고 심장부에 자리한다.
2024년 8월 휴머니스트에서 출간한,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을 서문까지만 읽고 덮었더랍니다. 책 읽기와 리뷰 쓰기에 지친 탓도 있지만, 위안부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펴든 책이 아니라 ‘읽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게을러진 듯합니다. 그 와중에도 집단기억과 당사자들의 사망으로 초래되는 기억의 소멸에 대한 지적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나 봅니다.
다만 이 책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따른 집단의식과 기억의 動學만을 다룬 책은 아니라서, 그런 후회에 오래 붙잡혔던 것 역시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문화적 기억과 민족 정체성의 연관성을 규명하고, 그 맥락에서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등 지중해권 국가들의 초기 문명에서의 민족 顯現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스만은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3쪽
이 책은 기억(혹은 과거 연관 reference), 정체성(혹은 정치적 상상력), 문화적 지속성(혹은 전통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주제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다룬다.
27쪽
나의 목적은 문화적 연결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집단적) 기억과 문자 문화, 그리고 민족 형성 사이의 연결성을 밝혀 문화 이론 일반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아가 아스만은 “모든 연결구조 뒤에 자리한 기본 원칙은 반복”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문자가 발생하고, 전통의 문자화를 통해 “의례적 일관성이 문헌적 일관성으로 대체”해, “典禮 대신 해석학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 형성, 과거 원용, 정치적 정체성과 상상력 같은 모든 기능적 개념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용어가 바로 ‘문화적 기억’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 좀 더 작게는 7 부분으로 나뉩니다.
앞의 200여 페이지는 기억, 글쓰기,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다룬 총론으로 3개의 챕터를 할애했습니다. 뒤에 140여 페이지는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등의 사례 연구를 위해 4개의 챕터를 할애합니다.
아스만은 주로 1920년대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 Maurice Hallbachs의 ‘집단기억 Collective Memory’ 개념을 원용해서 설명합니다.
집단은 그 자체로 기억을 가지지 않지만, 구성원들의 기억을 결정하며, ‘기억 형상들 memory figures’을 통해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화 역시 기억의 예화”이고, 여기서는 “신화와 역사 사이의 어떠한 구별도 배제”된다고 선언합니다. 특히나 문화적 기억은 “사실적 역사를 기억된 역사로 변형시킴으로써, 신화로 전환한다”라고 보며, “현재를 그 기원의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기술한 창건적 역사”로 신화를 위치시킵니다. 이때 문화적 기억은 일상의 생활과 의무에서 분리된 “샤먼, 시인, 그리오, 사제, 교사, 예술가, 서기, 학자, 고위 관리 등과 같은 전문 전달자”들에 의존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신화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선언됩니다.
89쪽
신화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와 함께 그 메커니즘, 의례, 제도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그 임무는 그 시간이 결코 희미해져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더 이상의 변화와 단절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증하는 것이다.
아스만은 신화에 대해 더 깊은 설명을 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의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의 개념도 응용합니다. “신화는 창건 서사로 응축된 과거”로 차가운 사회의 세계관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반면, 뜨거운 사회가 ‘만들어진 역사’를 내면화할 때 가지게 되는 자화상의 기저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기억은 연대기적 제어와 통제 도구로서의 과거를 측량할 뿐만 아니라, 자아상을 창출하고 희망과 목적을 지원하기 위하여 과거를 참조”하는데, 이를 신화라 부른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反현재 contrapresent’라고 부르는 기능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사라지고, 상실 혹은 소외되었는지 강조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아주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는 거죠.
문화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지식의 복합체로, 신화, 노래, 춤, 격언, 법, 신성한 문헌, 선형 회화, 장식, 채색 회화, 참배로, 혹은 전체 경관과 같은 상징물도 대상화된다. 문화적 기억은 애초에 의례 및 축제와 결합된 기념의 형태로 유포되었다. 儀式이 집단 내에서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지식 보급을 주도하는 한, 그 전수 과정은 반복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어진 불변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의례 자체의 본질이다.
의례적 연속성에서 문헌적 연속성으로의 전환은 문화적 기억의 시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의례를 기다릴 필요 없이, 그 문헌들을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아스만은 서론에서도 “카논 canon을 사회의 ‘의식적 기억 mémoire volontaire’으로 부르기 원한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저처럼 문학을 전공한 사람 입장에서는 카논을 正典으로 번역하는 게 더 편합니다만, 이 책의 역자들은 경전이라고 칭합니다.
경전이라는 용어는 “그 내용과 형태가 최대한 고정되고 구속력을 지니는 전승의 형태”를 일컫는데, 아스만은 “구속력 있는 의무와 충실한 실천의 이상을 법의 영역에서 문서 전승의 중심 영역으로 이전한 것”이라 정의합니다. 또한 이 단어의 “고대와 근대의 다양한 용례들에서 공통적 용인은 바로 불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불변은 신성화를 의미하기에, “카논의 의미가 옳음의 문제에서 신성함의 문제로 변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한 “내재적인 문화 분극화 시기에 경전들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그 경전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성이나 계시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체성’,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규범적 정의를 수용한다”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경전은 집단 정체성 확립과 안정화를 위한 기저 원칙”이라고 선언합니다.
아스만은 “집단 정체성의 요소들은 전적으로 상징적 요인들에 의해 지지되며, ‘사회적 몸’은 은유, 즉 수사의 산물일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집단적 혹은 ‘우리’ 정체성은 한 집단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상 image이고, 그 구성원들은 그것에 자신들을 연관”시키기 때문에, “집단 정체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 참여자들의 승인을 통해 생성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아스만은 또한 “모든 집단의 개별 구성원에게 집단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남에 따라, 개인적 욕구, 본능, 목표가 그것에 종속된다”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리하여 “‘공동체 의식 sense of community’이라는 말속에 포함된 정체성 수여적 지식 identity securing knowledge은 ‘지혜’와 ‘신화’로 불리는 두 가지 매우 다른 복합체 complexes를 수용하게 된다”라고 덧붙입니다.
또한, 집단 정체성의 두드러진 고양은 문화적 기술에서 특별한 진전을 이룬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기에, “민족 국가라는 근대적 현상이 인쇄-출판의 발명과 연관”된다고도 봤습니다.
아스만은 “이집트의 신화 동력 mythmotor은 통합의 방향으로 집단 정체성의 강화에 기여”했다과 봤습니다. 특히 후기왕조 시대의 이집트 신전은 ‘구축된 기억’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신전은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하늘의 책이 땅에서 구현된 것”이며, “신전은 현재를 기원의 신화적 태고와 연결했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활 준칙으로 삼은 관념이 올바른 삶의 방식 orthopraxy으로 ‘경전화’되었음”을 반증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스만은 “국가가 이집트의 위대한 업적이라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취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쇠로 만든 성벽’에서 시작합니다. “위협적으로 여겨진 외국 문화와의 갈등이 그들의 전통과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애물 구축”으로 이어졌으며, “개종과 고백, 순교가 모두 이 새로운 민족이 주변 환경에서 자신을 분리한 ‘쇠로 만든 성벽’의 부산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아스만은 모턴 스미스 학파를 원용해, “유일신교 관념은 과거의 망각에서 부상한 것이 아니라, 새로 얻은 땅에서 성행하던 습속을 ‘망각’과 ‘재발 relapse’에 따른 행위로 낙인찍으며 지하에서부터 주류로 성장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왕국 시기 이전의 종교 습속으로 순수한 유일신교가 선행했고, 뒤의 왕국 시대에 주변의 문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습속이 소외되고 결국 잊혔다”라고 설명합니다.
아스만은 “역사는 결속된 정의가 작용하는 과정”이라고도 봤습니다. “기억과 역사의 기반이 되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은 시간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질서, 의미, 일관성을 제공할 법적 의무들을 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역사는 문화가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의 결과”가 되며,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모든 문화와 개인이 각자의 독특한 형식으로 역사적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이라 해설합니다.
아스만은 소규모 전문 엘리트에 한정된 셈어의 음절문자와 이집트 및 중국어의 표의문자와 달리, 음소문자인 그리스 알파벳의 등장은 유례없는 문자의 대중화로 이어졌으며 인간의 지성에도 전례 없는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 ‘문자 체계’가 성립하고, 자연스레 ‘글쓰기 문화’가 이어서 성립합니다. 이때, “글을 쓴다는 것은 정리하고 계획하고 분류한다는 것”으로, ‘권력의 방향키 dispositive’라는 푸코의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네인들이 단호하게 공표한 범그리스 인식은 주로 《일리아스》라는 하나의 텍스트를 통해 나온 것”이라 분석합니다. “호메로스 암송 경연이 판아테나이아 Panathenean 제전에서 제정”된 이후 범그리스 축제로 확산했고, 그 과정에서 “호메로스 저작의 전국적 내면화를 통해 범그리스 차원의 문화적 기억을 체계화하고 제도화”됐다는 겁니다. 특히나 그 수용은 “儀式적 소통의 형태로 유포되며 공동체적 축제의 성격을 띠었”기에. “정치적 정체성을 뛰어넘거나 최소한 거기서 독립적인 민족 형성 프로젝트의 기반을 형성했다”라고 봤습니다. “텍스트의 고정이 민족적·문화적 소속감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동반했다”는 겁니다.
그리스어 용어인 휘폴렙시스 hypólepsis는 ⓐ음유시인들 사이의 경연으로, 거기서 그 단어는 앞사람이 중단한 호메로스 텍스트의 바로 그 부분부터 다음 경합자가 이어서 해야 하는 규칙으로, ⓑ이전 화자가 말한 것과 연결하는 의미에서의 수사학이란 의미로 활용됐다고 합니다.
이 휘폴렙시스식 틀을 통해, “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는 것, 그리고 당신의 선배들이 이미 말한 것을 의식적으로, 이해심을 가지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배우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과학적·철학적 혁명조차도 새로움의 휘폴렙시스식 위치 설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선언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는 공자 이후 휘폴렙시스라는 동일한 원칙 덕분에 번성한 중국 철학으로 예증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기반 텍스트들의 원용과 선배 학자들이 논한 것 이어받기, 그들을 타당성과 진리의 기준으로 검토하기”를 통해 “사상의 진화” 또한 가능해진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348쪽
사상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그 대답은 “예”고, 이 역사는 문화적 기억의 휘폴렙시스식 틀 속에서 펼쳐진다. 이는 사상의 역사가 진화와 진보의 관점에서만 재구성된다면 완전히 이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옛것이 새것에 흡수됨으로써 일어나는 누적이라는 진화의 개념은 기억의 개념으로 보완되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옛것이 현재에 유효하게 남게 되고, 진보가 재귀 및 퇴보와도 함께 어울린다. 문화적 기억의 휘폴렙시스적 구성은 언젠가 버려진 자리들에 대한 수용과 정교화뿐만 아니라 거부와 귀환끼지도 함의한다.
기억연구는 인지심리학의 한 갈래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십진분류에서는 180 심리학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국립중앙도서관 십진분류는 909입니다. 세계사/세계문화사에 해당하죠.
이 책의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을 살펴보면, 문화인류학에서부터 심리학, 정신분석학, 정치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전 분야를 아우르면서, 문학과 역사학 그리고 철학이란 인문학 3 대장도 빼놓지 않습니다. 정말 폭넓은 참고 문헌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 보니, 웬만한 독서이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책장을 넘기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저의 경우는 영문본의 pdf를 참고하며 읽던 페이지를 또 읽어도, 책장이 좀체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묵독 대신 음독을 해야 비로소 책장을 넘기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렇게 또 한 차례 전쟁 같은 독서를 끝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