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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찬호_민낯들

납작한 논리에 기댄 부끄러움 모르는 민낯들

by 안철

오찬호, 『민낯들』, 북트리거, 2022.


1. 책을 읽는 이유와 책을 쓰는 이유


작년 여름 ‘납작한 flat’이란 비평 용어에 강하게 포섭됐습니다. 사회비평에 대한 일반인들의 단순하면서도 엇나간 논리들을 접할 때마다, 속이 터질 듯이 답답했었는데요, 이에 대한 아주 깔끔한 ‘비하 표현’을 포착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용어가 포함된 오찬호의 신작이 눈에 들어온 듯합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납작한(flat) 논리를 비판해 온 사회학자이자 전업작가인 오찬호는 최근 출간한 『납작한 말들』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단행본만 17권을 썼습니다. 공교롭게도 오찬호의 책을 펼쳐본 것으로는 그의 첫 책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이 책 두 권이 전부입니다. 그마저도 앞엣 것은 3분의 1도 읽지 않고 책장을 덮었더랬죠.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그리 벗어난 내용이 아닌 듯해서 말이죠.

굳이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최근 출간된 책을 읽기 전에 참고 삼아 읽어보려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드러난 능력주의의 납작한 논리도 그렇지만, 이 책과 『납작한 말들』의 출판사 홍보물에서 공통적으로 튀어나오는 ‘납작한 말들 flat language’의 처참함 때문에 그냥 넘기질 못했습니다.

첫 책에서 오찬호는 “아니 왜 이 간단한 걸 이해 못 하고 그렇게 납작한 논리로 저항하는 거지?”와 같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요, 10년이 지나자 이 책을 통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설명해 줘야 이런 돼먹지 않은 납작한 논리를 집어치울 거냐?”는 절규를 보여주더군요. 그런 절망감은 머리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10쪽
《고교독서평설》에 2020년 한 해 동안 연재한 글을 모았다. 분량을 곱절보다도 더 늘렸기에 다시 쓴 거나 다름없다. 단행본을 읽을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 눈높이를 고려해서이겠지만, 못다 한 말이 많아서였다. 연재 당시에는 ‘자녀 교육에 적절하지 않다’는 항의를 많이 받았다.
다시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옳다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집필했다.


저자는 “여기를 봐야 하는데, 저기를 보자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납작한 논리들이 납작한 언어로 저항하는 일상적 경험을 토로합니다. “그것만 중요해? 왜 나쁜 것만 말해? 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라는 거죠. 상처를 그냥 덮어 놓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우깁니다. 그러다가 상처가 곪으면 다 죽는데도, 못 본 척하면 나을 거란 ‘타조증후군’을 드러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자는 “다양한 의견이란 말을 좋아하면서도 경계한다”라고 말합니다. “다양성을 ‘무시하는’ 걸 다양한 의견이라고 우기는 논리도 부유한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사회의 납작한 논리는 납작한 언어로 분출되고, 다시 납작한 논리를 공고히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저자는 그런 지점을 잘 찾아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245쪽
사회적 이슈도 정치적 진영으로 갈라지면 말들이 거칠어진다. 갑자기 빨갱이, 극우주의자 등의 표현들이 부유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현상에 대한 상식적인 판단은 유보된다. 그걸 비판하면 ‘우리’에게 불리하니까 오히려 옹호해야 마땅하고, 반대로 저걸 비판하지 않으면 ‘저들’이 유리할 것 같으니 비판을 넘어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솔직함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나의 생각이 내가 싫어하는 '저쪽'을 도와줄 것 같으면, 솔직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여겨 의견 개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리보다 진영의 논리가 현재로선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영 논리가 움트는 공간은 “자신의 생각이 백 퍼센트 옳았다는 확신을 주는 곳”이 됩니다. 이곳에서 “선을 넘어 보자는 용기”가 발생하면, 납작한 논리의 횡포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게 공론장은 오염되고, 황폐해진 곳에 정상적인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게 되면, 이 납작한 논리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또 누군가에게 죽창을 찌르”게 될 터입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2. 민낯을 드러내는 납작한 논리들


성소수자들에 대한 납작한 논리는 ’모두의 화장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대학 캠퍼스 안의 수십 개 화장실 중 한 개가 ‘모두가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되었을 뿐”이자만, 차별과 혐오의 납작한 논리는 “성소수자만 사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성별 구분에 따른 화장실 이용’이 편리했던 사람들이 방해를 받는 것처럼 의심한다”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어떤 방해도 없”으며, “평소와 다름없다”는 게 현실입니다.


악플에 대한 납작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피해자는 하던 대로 계속 살뿐인데, “뻔뻔하다면서 수군거리고, 염치도 없다면서 빈정거리며. 어찌 되었든 원인 제공을 한 거 아니냐면서 또 욕”합니다. 여기에 “연예인은 돈도 많은데 힘없는 대중에게 가끔 욕먹는 일이 큰 문제냐”라고 얼터당토 않은 합리화가 등장합니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똥을 피하듯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하는 방식의 대응이 뉴노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저자는 “피해자 앞에 놓인 선택지가 그저 피할 방법을 찾는 것뿐이라면 이는 본질적인 문제 해결이라 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시스템의 악랄함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납작한 논리들이 나타납니다. 숨이 턱 막힐 지경인데요, 저자는 이런 지점을 잘 찾아내서 간명한 언어로 드러냅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 점들이 <고교독서평설>을 구독한 학부모님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겠지요.

88쪽
하청업체 직원이 사망하면 원청업체에서는 자신들과 사고가 무관하며, 계약 관계에 따라 돈을 지급했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거절할 수 없는 구두 지시로 이루어진 업무 수행 중 사망해도 ‘공식적으로 시킨 적이 없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야 하는 현장의 당연한 공기는 존재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된다. 하청 업체도 죽음을 책임지라며 원청에 격렬히 항의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기존 계약이 유지되지 않겠는가. 하청 업체는 자기 회사의 노동자가 위험에 놓인 상황을 보고만 있었냐는 비판에도, 자기네 시설물이 아니라서 조치할 수 없었다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니 솜방망이 처벌이 따를 뿐이다. 사람이 죽어도 산재 사고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복지제도를 바라보는 납작한 논리는 ‘선별 복지’의 시각으로 잘 드러납니다. “급식비를 못 내는 사람을 찾지 말고, 누구나 제약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 대해 공산주의 운운하는 거친 반론도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잘 돌아가고 있다”라고 저자는 조롱합니다. “최소한 학생들의 세계에서는 ‘너는 부자가 내 준 돈으로 공짜로 밥 먹는다’는 낙인과 멸시가 줄어들었으니”, 재벌 자녀들조차도 무상급식을 한 보람이 있다며 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은 “취약 계측으로 인정받은 사람만을 돕는” 선별 복지 시스템입니다. “자격 심사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계속 삶을 유지할 수 있”기에, “생존을 위해 더 처절해지고 비굴해져야” 하고, “이런 과정이 싫어서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한 맹점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부정 수급자를 찾아내라”는 민원이 빗발치며, 선별 복지마저도 무력화하려는 납작한 논리가 횡행합니다.


우리 사회는 마녀사냥을 위한 납작한 논리도 쉽게 제공합니다.

“일상이 무너지면 공감 능력도 사라”지고, “내가 힘드니, 나를 힘들게 한 이를 원망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방해한 이를 찾아 비난과 인신공격의 칼을 휘둘러도 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확진자들에 가해졌던 가혹한 인신공격 또한 그렇습니다. 특히나 특정 종교와 결합되면서 ‘31번 확진자’는 우리 사회의 공적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드라마 <서초동>의 한 에피소드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재벌 아들과 이름이 비슷했던 흙수저 변호사가 자신의 맛집 블로그에 ‘가난을 커밍아웃’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는 공교롭게도 ‘현대판 음서제’의 수혜자를 찾는 마녀사냥 와중에 오폭의 피해자가 된 것이었죠. “학교와 외부장학금이 없었다면 제가 변호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면서, 사회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말합니다. 다만, “다시는 그 누구도 오늘 밤의 저처럼 가난을 입증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라며 글을 마칩니다. 그래서 저자의 글에 더 눈길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자 역시 드라마 속의 변호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대학원 생활을 했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학금 수여식장에서 낭독된 자신의 소개가 “너무 비루했다”는 감정이 크게 전달된 이유인 듯합니다.

151쪽
공개되어도 괜찮을 거라 여겨지는 누군가의 일상들이 있다. 사생활이 아니라고 여겨서다. 휴대전화 잠금장치를 수사기관이 강제적으로 해체하는 것은 보장되어야 할 ‘내부’가 공격받는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데 동의하지만, 어떤 사람의 드러난 일상은 이미 ‘외부’로 나온 것이기에 여기저기 유통되어도 괜찮다고 착각한다. 특히 사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 온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떠올릴 수 있는 단편이라면 더 입방아에 오른다. 당사자가 문제 삼으면, 좋은 의도인데 왜 그리 까탈스럽냐고 무안을 준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납작한 논리가 잘 드러나는 두 가지 현상으로는 간통제 폐지와 낙태죄 폐지를 들 수 있습니다. 오찬호는 이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그 이면에 존재해야 하는 관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를 외면하는 납작한 논리들을 드러냅니다.

185쪽
간통죄 폐지에 찬성하는 건 불륜을 합법이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간통을 합법과 불법의 잣대로 나눌 수 있는지 따지자는 것이다. 간통의 법적 잣대를 없애야 한다는 걸, ‘모두가 간통을 즐기는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해석한다.

간통죄가 폐지된다고 해서, 간통을 권하는 사회가 되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간통을 저지르면 유책 배우자로 이혼 사유가 되긴 마찬가지고, 위자료 청구의 사유가 되는 것도 변함없습니다. 21세기가 되면서 간통죄의 실형 선고율은 1%까지 떨어졌고, 심지어 기소율도 20% 남짓이었습니다. 문제는 민법에 더 큰 것이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서 ‘쉽게 외면’하고 맙니다. 상간자에 대한 복수의 방법으로 활용되었던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그 이전부터 문제가 된 사적 보복이 폭행과 명예훼손 등의 형법적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쪽도 쉽게 외면됩니다.

낙태죄에 대해서도 간통죄와 마찬가지의 납작한 논리가 튀어나옵니다.

186쪽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건 태아도 생명이라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니다. 여성이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건 “자유롭게 섹스하다 임신해도 지우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기에 낙태는 반대한다면서, 동시에 어떤 생명은 소중하지 않기에 사형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정치 진영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 간단치 않은 ‘생명 중시’의 납작한 논리는 모자보건법을 통해 박살이 납니다. 형법상 낙태죄가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낙태를 종용하면 낙태교사죄를 처벌받습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판결은 여성 자신과 의사를 처벌하지 않는 것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태를 허용하는 사유를 정한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어떤 여성이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 줄 알았지만 출산을 선택했다’고 고백을 하면,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수군거리는 분위기도 이와 무관치 않다”라고 지적하면서, “낙태를 해도, 안 해도 이기적이라고 욕먹는 게 바로 여성”이란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생명은 소중하다는 납작한 논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냅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납작한 논리는 꽤나 잔인해서, 그저 외면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잔인한 폭력으로도 유명한 ‘폭식투쟁’에 대한 저자의 먹먹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의 우리“를 마주했기에 참담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차분”했습니다. ”보상금을 노린다. 대학 특례 입학을 요구했다. 무임승차 아닌가, 정칙적 목적이 있다 등 온갖 음해에 시달렸기에 나타난 방어 본능“이라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이런 비극은 이태원 참사에서도 반복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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