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뷰]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_한민

박이부정博而不精이 아쉬운 한국 종교 편람

by 안철

[리뷰] 한민. 『숭배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저녁달. 2024.

박이부정博而不精이 아쉬운 한국 종교 편람

하는 자들, 호모 피델리스. 저녁달. 2024.

편람(便覽, handbook)이란 책의 형태는 주로 ‘보기에 편리하도록 간추린 책’이란 의미로 씁니다. 영어 표현인 핸드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손에 쥐고 다니며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서적을 말합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간혹 난감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이 책의 성격을 고려해 봐도, 핸드북 수준이라고 보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종교인이자 문화심리학자로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과 답이다. 종교학적으로 체계가 있거나 완벽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부끄럽지 않은 결과라 생각한다. - 9쪽

“이 책의 장점을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심리, 한국의 종교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다루었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자신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도 쉽게 동의하긴 어렵습니다. 내용이 박이부정해서 그렇습니다. 5장(章)에 걸쳐서 총 51개의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다 보니 하나의 주제에 투입할 수 있는 지면이 제한되기도 하고, 대동소이한 주제들이 이어지면서 반복되는 논리들 때문에라도 제한은 더 커집니다. 무엇보다 지랄 맞기 그지없는 한국 개신교를 건드는 주제들이 많다 보니, 이들의 ‘테러’ 염려 때문인지 비판 수위를 조절하다 보니 싱겁기 그지없는 글들도 많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이 정도 수준으로 수박 겉핥기를 할 거라면, 뭐 한다고 책을 쓰나?’라며 빈정거렸습니다만, 막상 책장을 덮은 뒤로 찬찬히 생각해 보니 꽤나 용감한 책이 나왔다 싶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개독교’라는 멸칭을 붙이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저자의 몸 사림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이부정’이 약점일 수는 없습니다. 한국 사회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이 책을 펼쳐 들었다면, 확실히 박람(博覽)의 기회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종교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한국 사회의 종교에 대해 폭넓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종교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도 3장과 4장을 통해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종교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문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거라 확신합니다. 그런 연장선에 5장 역시도 흥미롭게(다만 저는 참 맥 빠졌습니다) 읽힐 겁니다.



‘1장 종교와 마음’에서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건,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것은 그것의 개념이고, 개념의 중심에는 언어와 의미가 존재합니다. 종교(宗敎)라는 개념은 19세기말 영어 religion의 역어로 성립한 것으로 봅니다. 근대 개념어 번역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니시 아마네(西周)의 「百学連環」에서 이 역어를 선택한 이후로 동북아의 한자 사용권 3국에서는 공히 종교라는 용어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도 ‘religion의 역어’로 종교의 개념에 진입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념보다 더 재밌는 부분은 이겁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 leisure class 이론은 잉여 생산으로 인해 사제 계급이 노동계급 industrial class와 분리되면서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20세기 말엽까지도 통용되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터키의 한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 상식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의 큰 돌은 높이가 5.5m에 이르며 무게는 10~20t으로 추정된다. 조직화된 집단과 노동력이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이 이만한 규모의 건설을 해냈다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동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그 동기를 종교라고 추정한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치 세력이 성장하고 종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해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 23쪽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어봤다면 이미 알고 있었을 내용입니다만, 21세기가 되고 나서야 정리한 완전히 전도된 가설이라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2장 한국 문화와 종교’에서도 귀신에 대해 이런저런 썰을 푸는 것도 재미있긴 합니다.

다만 ‘귀신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에 비해, 제대로 된 개념은 정리하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귀신이란 자명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신도'인 저로써는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귀신』을 읽을 때와 같은 개념의 혼재에 짜증이 치솟습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논리적 그림’이라 천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동양철학의 도저한 흐름 속에는 유학적 개념의 귀신개념이 존재합니다. 주역의 해석과 주자학의 대요를 통해 정리된 개념을 떠올려 보면, 이 책의 귀신 개념은 당최 알 수가 없게 됩니다. 다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책은 핸드북입니다. 박이부정이 타고난 한계이니, 그냥 쓰인 내용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에만 주목하는 ‘선구안’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고른 것이 다음 내용입니다.

사실 문화심리학에서 귀신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 체계 자체다. 문화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 누가 귀신이 되고, 귀신이 왜 나타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해당 문화의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를 알 수 있다. - 48쪽


‘3장 무속과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내용들 역시, 무라야마 지준의 책에서나 김종대의 『도깨비 잃어버린 우리의 신』에서처럼, 유교와 도교와 무속을 오가며 정리되지 않은 개념을 마치 자명한 것처럼 다루면서 혼란을 줍니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재밌게 책장이 넘어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서낭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000035.JPG
000014.JPG
무당집 앞에는 대나무 장대에 흰색과 빨간색의 깃발이 걸려 있는데, 흰색은 점사를 빨간색은 굿을 의미한다.



저자가 가장 두려워하면서 썼을 ‘4장 비뚤어지기 쉬운 신앙’에서는 눈에 띄는 주장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멸공 기독교’로 대표되는 한국 개신교의 보수성과 모순에 대해서입니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지만 독재자는 인정해야 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지만 ‘빨갱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부 개신교인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은 “개신교의 지지를 받았던 정권들의 집권 기간에 일어났던 권력의 독점과 부정부패, 민간인 학살 등의 사실은 그들이 옳았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인지부조화의 결과로 사라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오만과 이중성’에 대해서는 “유일신 종교의 절대성에서 파생한 우월감”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여기에 “미국에서 근본주의 성향의 개신교가 전래”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 물론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심성과 잘 맞는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라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첫째,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한국인의 마음 습관이다. 가톨릭은 성경의 해석이나 교리, 의식, 교단의 운영 등이 교황청으로부터 통제를 받지만 개신교는 교단과 목회자에 따라 교리의 해석과 교회 운영 등에서 상당 부분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따라서 목사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자의성을 갖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부 개신교인들의 죄와 구원에 대한 인식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개신교의 전도 논리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분법적 주장으로 나타난다.
둘째, 한국 개신교는 교리와 율법도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한다. 개신교인은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한다고 성소수자를 배척하지만 성경에서 금하는 부동산 거래(레 25:23)는 거리낌이 없다. 천주교에서도 사라졌고 다른 개신교 국가에서는 폐지된 십일조는 성경을 근거로 집요하게 유지한다.
셋째, 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자기 현시적인 태도다. 한국 개신교인은 어디서나 티나 가고 또 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더 많은 헌금, 더 큰 교회, 더 많은 활동은 한국 개신교회의 장단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275~278쪽


‘한국에는 왜 사이비가 많을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재림 예수를 자칭하거나 스스로를 구세주로 일컫는 이들만 50명이 넘는다”라고 합니다. 새삼 놀라게 되는 수치입니다.

저자는 “신비 체험을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의 전통도 사이비의 창궐과 관련 있다”라고 봅니다. 무속의 신내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종교체험에 익숙한 이들에게 무속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 접근한 개신교의 전파가 악영향을 미쳤다고 본 겁니다. 여기에 앞서 정리한 ‘한국 개신교의 오만과 이중성’이 결합되면서 사이비가 늘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목회자들이 처음부터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사이비 교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고, 나름 정상적인 인물이었지만 종교적 환상에 빠져 본인이 진짜 재림 예수라는 망상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사이비 종교는 왜 지속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통의 정상적인 종교와 사이비 종교는 그 믿음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정상적인 종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성숙한 개인의 완성과 이웃과 사회에 대한 이바지로 나타나는 반면, 사이비 종교에서의 믿음은 교주 개인을 신격화하고 교주와 교단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쓰인다. - 300쪽

여기에 ‘좋은 일은 신의 축복이고 나쁜 일도 신의 뜻’이라는 막무가내의 논리가 “신에 대한 믿음을 무한히 강화하여 종교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합니다.

사이비 종교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교단 조직’이 큰 기능을 한다고도 봅니다. “사이비 종교에는 교리를 정교화하고 교단을 체계화하여 지속 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엘리트 계층”이 존재하며, 이들은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교주를 더욱 신격화하고 교리를 더욱 다듬으며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간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왜 사이비에 빠질까’란 질문에 대해서 답합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준은 아니지만, 적잖이 수긍할 만한 견해임은 확실합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로 첫째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준다”는 점을 짚습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현실에서 확신에 가득 찬 종교 지도자의 목소리는 엄청난 심리적 안정감과 통제감을 제공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기성 교단의 보수적인 해석에 교리적으로 답답함을 느꼈던 이들이 사이비 종교의 새롭고 참신한 주장에 끌린다”라고 분석합니다.

“사이비 종교의 포고 전략도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운 이들에게 접근하여 놀이와 정서적 욕구를 충족해주기도 하고, 게임이나 다단계처럼 계급(레벨)과 목표치 등을 설정하여 삶의 목표와 재미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죠. 완전히 포섭된 이후에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종전의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고 분석합니다. 심지어 ‘매몰비용’까지 고려하면 손 털고 나오기 어렵다고 봅니다.

“문제점을 느끼고 빠져나오려 해도 교주의 측근이나 관리자들의 감시로 다른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