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예측의 어려움은 우발적 사건에 기인한다.
[리뷰] 트렌드 코리아 2025. 미래의창. 2024.
뭔가 가파른 경기회복을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큰 희망도 절망도 없는 정체가 계속될 것 같다.
- 10쪽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가 출간되는 건 보통 10월 초였습니다. 작년에는 1주일 정도 일찍 책이 나온 듯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기전망은 보합(保合)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친위쿠데타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12월 3일 발생한 친위쿠데타의 사후 수습이 늦어지면서, 2025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하향 조정하는 국제기구나 신용평가사, 투자은행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트렌드 분석을 하면서, 친위쿠데타까지 예상해서 경제전망을 할 순 없는 노릇일 터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우발적 사건'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친위쿠데타가 유혈사태를 빚기 전에 진압되었다는 겁니다. 다만,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선동과 선전을 통해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어가고 있는 내란세력과 반체제단체들의 반동적 행위가 이어이고 있다는 점이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탄핵과 대선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이런 상황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상황에 의해 촉발된 경제 위기와는 별개로, 우리 경제는 어떻게든 굴러가고 맙니다. 따라서 어제의 시장이 오늘이라고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닙니다. 애써 한 트렌드 분석이 아예 못쓸 정도로 상황이 바뀐 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몇 가지 주목해 볼 만한 아이디어들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트렌드 코리아의 작명 센스를 접할 때마다 "과하다"는 탄식을 뱉곤 합니다. 대부분의 트렌드분석서들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매크로 트렌드로 묶기 힘든 마이크로 트렌드를 하나의 주제로 싸잡다 보니 그런 듯합니다. 그렇게 헛웃음만 짓다가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웃어넘길 건 그렇게 넘기고, 눈여겨볼 건 두 눈 부릅 뜰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불행하지도 않은 일상, ‘무난하고 무탈하고 안온한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를, ‘아주 보통의 하루’를 줄여 #아보하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 161쪽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자기 이름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는 의미라며 농을 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넘기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그것이 경험이 되지 않겠냐는 낙관적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는 '제로투원'의 위업을 달성하곤 합니다만, '나와 같은 보통사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일이 오늘보다는 나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럭저럭 참아볼 만하고, 그럭저럭 견뎌낼 만해"서, "하루하루 무뎌져 가"더라도 말입니다.
저성장이 굳어지면서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조차 쉽지 않다. 이 부분은 고도성장기에 청춘을 보냈던 기성세대와 MZ로 통칭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 245쪽 무해력 Embracing Harmlessness 중에서
트와이스의 노래 <Yes or Yes>에는 재미난 가사가 나옵니다. "뭘 고를지 몰라 준비해 봤어, 둘 중에 하나만 골라 YES or YES?"라고 말입니다. 프로바이더 입장에선 이런 '답정너'가 얼마나 좋을까만, 소비자의 입장에선 좀 달라질 듯합니다. 2013년 대니얼 머촌(Daniel Mochon)의 논문에 따르면, 단일 선택지 회피(single option aversion)는 명백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너무 많은 선택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선택과 관련된 연구로 유명한 시나 아이옌가르는 자신의 책, 『The Art of Choosing』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z)는 이를 두고 선택의 역설(paradox of choice)이라고 말합니다.
잼 연구를 발표한 뒤, 나와 다른 연구자들은 선택의 가짓수가 미치는 효과에 대한 실험을 더 진행했다. 실제 선택 상황을 재현하도록 설계된 이들 연구에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수의 선택지(20~30가지)를 줄 때보다 적당한 수의 선택지(4~6가지)를 줄 때 실제로 선택을 하고, 자신의 결정에 더 큰 확신을 갖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더 만족해한다는 결과가 상당히 일관되게 나타났다.
- 쉬나 아이엔가 著/ 오혜경 譯. 쉬나의 선택 실험실. 21세기북스. 2010. 31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AI의 발달은 빅데이터 분석과 개인의 선택들을 결합한 개인화(customizing) 기술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골라야 하는 '선택이라는 숙고'의 과정을 아주 단순화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사실은 "둘 중에 하나만 골라 Yes or Yes"의 싱글옵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이 트렌드의 세 가지 물줄기를 언급한 부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토핑경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꾸안꾸보다는 꾸꾸꾸'다. 둘째, ’ 최고보다 최적‘이다. 마지막은 ’ 완성보다 변형‘이다.-181쪽
"소유보다 체험"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2001년 제러미 리프킨의 책, 『소유의 종말 Age of Access』의 출간 이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체로 경험이란 것은 소비를 통해서 축적되게 되는데요, 그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성을 갖춘 소비재의 소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그 물성을 갖춘 소비재의 소유관계가 확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정당한 소비행위가 가능했던 시대를 살아왔기에, 체험 이전에 소유가 선행해야만 했던 겁니다.
다만 값비싼 신호 보내기(costly signaling) 게임이 반드시 소유에 의해서만 가능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금송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이 값비싼 신호가 아니라, '금송아지 가지고 장난치면 다리가 쉽게 부러지더라'와 같은 경험적 사실을 내비치는 것이 값비싼 신호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와는 또 반대로, 아날로그 시대의 물성을 추구하는 '럭셔리 경향'도 존재합니다. 아날로그 신호였던 음반의 데이터를 CD에 담을 때, wav파일은 몹시 용량이 컸습니다. 20년 전 MP3플레이어가 유행할 때, wav파일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었던 mp3 압축 파일은 큰 힘을 발휘했었죠. 작은 용량으로도 괜찮은 품질의 음향을 재생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wav파일 자체를 담고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휴대용 재생장치들의 저장능력이 높아졌습니다만, 심지어 FLAC파일이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작은 용량의 디지털 파일로도 뛰어난 음질의 음악을 재생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턴테이블과 LP판이란 물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사양산업이었던 LP시장이 주문제작방식으로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필름사진과 같은 사양산업이 되레 럭셔리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겁니다. 데이비드 색스(David Sax)의 책, <아날로그의 반격 The Revenge of Analog>과 같은 책이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합니다.
자기 계발의 담론들은 매번 갱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한우물을 파라'며 전문성을 중시했던 인재상이 언제부턴가 T자형 인간이라며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의 결합된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이형(또는 ㅠ자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제너럴리스트의 폭넓은 시야는 물론이요, 탁월한 제1전공에 덧붙여 소매 속 히든카드와 같은 제2전공의 전문성까지 갖춰야 진정한 21세기형 인재라고 말입니다. 이 책에서 2025년 트렌드로 맨 처음 꼽았던 omnivore가 박이부정의 제너널리스트적인 면모를 강조했다면, 이 원포인트업은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전문성을 말한 것이겠지요. 그 와중에도 #아보하의 개념에서 느껴지는 다소 소박한 면이 있습니다.
요즘의 자기 계발 코드는 다르다. 첫째, 성공의 기준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롤모델의 성공 공식을 일률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 나다운 ‘ 성공이 따로 있다. 둘째, 실천 가능한 한 가지에 집중한다. 예전에는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목표로 했지만 요즘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노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주변 사람과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 나의 성취를 올려 과시하고 '좋아요'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실천한 작은 노력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나누며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