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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박상진, 『궁궐의 고목나무』, 눌와, 2024

‘나무 전문가’가 반복 심화해서 쓴 나무 이야기

by 안철

1. 전문가는 책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문가를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직역에서 기술이 뛰어나 학문적 성취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해, “현장에서 오래 구르다가 학위 따서 교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잦습니다. 학문적 성취를 기반으로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저명한 학자들이 뛰어난 대중서를 통해 시민적 교감을 이루는 경우가 되겠지요.

둘 중 어떤 경우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저술 활동’이 매개가 된다는 겁니다. 저명(著名), 그러니까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학자가 이름을 드러내는 방법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드러내는 일인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논문이나 저작물을 내놓게 됩니다. 반대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의 경우는 잡지나 신문의 기고 그리고 저작물을 통해 검증을 받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가의 전문성은 숱한 숙고와 그 실행의 축적이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로 정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실적을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전문가들은 책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은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기술과 지식 습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노력들은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로 정제된 정보’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클라이언트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됐건, 후임을 위한 OJT자료가 됐건, 어딘가에서 들어온 특강의 강의 자료가 됐건, 학교에서 어렵게 한 타임 잡은 강의의 자료가 됐건, ‘체계를 갖춘 문서’는 늘 나오기 마련입니다. ‘반복된 숙고와 그 실행’은 종종 토대가 되었던 ‘체계를 갖춘 문서’의 발전을 가져오기 마련이고요. 그렇게 전문가들의 책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 저명(著名)한 학술서들이 ‘교과서’적인 지위를 갖게 되기도 합니다만,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난 뒤에는 저술활동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경우도 없진 않습니다.

이렇게 책을 낸 전문가 specialist가 전문 지식을 토대로 일반인과 소통하다 보면, 박식가 generalist로 진화하기 마련입니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깊이를 조절하고 정수를 짚어낼 수 있는 혜안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오는 책들이 이른바 ‘대중서’라고 불리는 책들입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더라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된 책을 말하며, 학술서나 전문서와는 구별됩니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활발한 저술활동을 보여주곤 합니다. 늘 고민하며 자기 갱신이 가능할 정도로 지적이며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경북대 명예교수인 박상진 선생이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합니다. 나무와 관련된 숱한 대중서를 써왔는데요, 특히나 서울의 고궁과 관련된 책들이 그렇습니다. 2001년 출간된 『궁궐의 우리 나무』는 2014년 개정판으로 보강했고, 2024년에는 국보 동궐도와 연계한 이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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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궁궐의 나무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무심결에 지나치던 나무들에 새삼스런 관심을 가지게 된 건 2021년 식물학자 신혜우의 작업 덕분이었습니다.

최초의 의도와는 달리, 1920년대부터 도시공원으로 변모해 온 조선의 궁궐은 녹지가 부족한 서울 시내에서 자연공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궁궐의 조경 원칙을 벗어나 시대에 따라 제멋대로 심어온 목본들이 꽤 됩니다. 그래서 『궁궐의 우리 나무』와 같은 책은 4대 궁을 돌아볼 때마다 “도대체 이 나무는 무엇인가?”란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나 그 밖에도 쉽게 접하게 되는 노거수들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습니다.



2. 전문가는 일반인이 뭘 원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박상진 선생은 국가유산청과 함께 4대 궁 안의 노거수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제공한다던가, ‘나무 탐방’ 같은 프로그램에서 해설자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궁을 찾은 일반인들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어떤 정보가 제공되길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쪽
고목나무를 만나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첫 번째는 ‘몇 살이냐?’다.

4대 궁을 찾는 사람들은 보통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는 잘못된 전제로 관람을 시작합니다. 4대 궁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하는 창덕궁 돈화문이나 창경궁 명정전 정도가 광해군 연간인 1609년과 1616년에 중수된 것으로 봅니다. 국사 시간에 배웠듯이, 완전 폐허였던 경복궁을 중수한 것이 1867년이었고, ‘시정 5년 조선물산공진회’로 또다시 훼철된 이후에 살아남은 전각도 소수란 점은 쉽사리 잊게 됩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의 전각들 역시 순조 연간인 1804년에 중수했거나 20세기 초반에 연이은 화재로 중수가 불가피했음을 좀체 떠올리질 못합니다.

그렇다 보니 4대 궁 안의 목본들, 특히 고목나무에 대해서도 쉽게 편견을 드러내곤 합니다. 저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 이 책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웃자란 나무를 보면, ‘몇 살이나 먹은 나무일까?’를 궁금해하곤 합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나무들에 이름표조차 달리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그 곁을 지나면서 무슨 나무인지, 그래서 몇 살이나 먹었는지를 꽤나 궁금해했습니다. 박상진의 책 두 권이면 거의 모든 종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기적이 벌어지는데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일반인들이 무엇에 갈증을 느끼는지를 전문가적 식견으로 제대로 포착했기 때문이겠지요.


궁궐에서 노거수(老巨樹, 보통 수령 100년 이상의 커다란 나무)나 고목(古木, 수령이 수백 년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자란 노거수) 나무를 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음과 같은 조경원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보 동궐도>를 통해 순조 연간인 19세기 초반의 상황을 짐작해 보는 것 정도가 가능한 일입니다.

23쪽
몇 가지 이유로 주요 전각 건물의 안마당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첫째,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둘째, 궁궐 건물 담장 안의 나무는 문밖에서 볼 때 한자로는 門에 木이 더해져 閑이 된다. 나라의 번성을 가로막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셋째, 담 안쪽의 가운데에 나무가 있으면 역시 한자로 口의 가운데 木이 들어 있는 형국이니 괴롭고 곤란하다는 듯의 困이 되므로, 그 또한 왕조의 앞날을 암담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한편 전각 안에 혹시 나무를 심더라도 지붕 높이보다 더 자라는 것을 꺼렸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 보니, 막상 노거수에 들 수가 없는 나무들이 종종 보이는데요, 장미나무과의 유실수 중에서도 벚나무속에 들어가는 살구나무나 매화나무의 잘못된 기원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덕궁 성정매의 실제 추정 수령이 70년 정도이고, 덕수궁 석어당 살구나무 역시 70년 정도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창경궁 환경전 살구나무는 60년 정도로 보고 있으니, 창덕궁 성정각의 살구나무도 그쯤으로 봐야하겠지요. 무엇보다 장미나무과의 유실수들이 빨리 자라는 속성수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풀이하고 있기도 합니다.

000011.JPG 성정매와 함께 창덕궁의 봄을 대표하는 칠분서 만첩홍매. 박상진은 이 나무의 수령을 70년으로 보고 있다.
000007.JPG 덕수궁의 봄을 상징하는 석어당 살구나무. 수세에 비해 수령은 70년으로 많지 않다.
DSC09510.jpg 창경궁 환경전 살구나무의 수령은 60년 정도로 보고 있다.
20230313_kodakportra160_28.JPG 창덕궁 성정각의 살구나무. 이 역시 수령은 60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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