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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이토 가쓰히로_세계사를 바꾼 12가지 물질

12가지 소재가 인류사를 바꾼 두 가지 방식

by 안철

[리뷰] 사이토 가쓰히로,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물질』, 김정환 옮김, 북라이프, 2025.

齋藤勝裕, 『歷史は化學が動かした 人類史を大きく變えた12の素材』, 明日香出版社, 2024.



1. 물질과 소재의 차이

번역서의 제목 때문에 이 책에 손을 댔는데요, 막상 책을 펼쳐 보고 나니 원서명은 조금 달랐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소재’였기에, 꽤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차이라고 유난을 떠나고 타박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로써는 무척 민감한 일입니다.

“인류사를 크게 바꾼 12가지 소재”를 좀 더 친숙한 우리말로 바꾸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엄밀한 개념에서 다루면, 건널 수 없는 강이 물질과 소재 사이에 흐릅니다.

다음은 사전의 뜻풀이를 가져와 봤습니다.

영어사전은 Merriam-Webster, 일어사전은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국어사전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입니다. 언어는 다르지만 뜻풀이가 비슷합니다. 19세기 후반 니시 아마네,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에 조민 등에 의해 근대적 개념어들이 한자 역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어 ‘사전’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100여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어사전의 뜻풀이와 국어사전의 뜻풀이가 비슷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거죠.

matter
material substance that occupies space, has mass, and is composed predominantly of atoms consisting of protons, neutrons, and electrons, that constitutes the observable universe, and that is interconvertible with energy

ぶっ‐しつ【物質】
自然界を構成する要素の一つで、空間の一部を占め、質量をもつもの。分子、原子、さらには素粒子から成るものとされ、エネルギーとは厳密に区別されてきたが、アインシュタインの特殊相対性理論ではエネルギーの存在形態の一つにすぎないともされる。

물질(物質)
『물리』 자연계의 구성 요소의 하나. 다양한 자연 현상을 일으키는 실체로,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질량을 갖는다.


material
the elements, constituents, or substances of which something is composed or can be made

そ‐ざい【素材】
もととなる材料。原料。

소재(素材)
어떤 것을 만드는 데 바탕이 되는 재료


과학적 개념으로 물질(物質, matter)이란 “부피와 질량을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소재(素材, material)는 “특정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물질 또는 물질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소재가 갖는 산업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으로는 ‘소재, 부품, 장비’로 묶어내는 ‘소부장’이란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은 소재가 되고, 소재는 제품이 됩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의 한 구절에서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무래도 소재를 ‘물질’로 번역한 탓에 원래 전달해야 할 의미가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뜨고 다시 들여다보면 저자의 의도는 쉽게 파악됩니다.

참고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물질 중에는 엄밀히 말하면 ‘제품’이라고 불러야 할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백신, 플라스틱, 원자핵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런 물질들이 오늘날 새로운 제품의 원료로 사용됨을 고려해 넓은 의미에서 ‘물질’로 다루기로 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2개의 소재들 중에는 물질이라 말할 수 있는 전분, 약, 금속, 독, 셀룰로스 등 5가지와 소재라고 부를 수 있는 세라믹, 암모니아, 자석 등 3가지, 그리고 제품이라 불러야 할 화석연료, 백신, 플라스틱, 원자핵 등 3가지가 다뤄집니다.

이 중에서도 화학식으로 드러낼 수 있는 ‘물질’은 전분이나 셀룰로스 그리고 암모니아뿐입니다. 물론 이들 중 그 무엇도 자연 상태에서 단일 물질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공 과정을 통해서야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물질’이 아니라 ‘소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번역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번역되는 언어와 번역한 언어 사이에는 그 언중(言衆)의 언어생활 차이가 깊숙이 자리 잡습니다. 특히 한자문화권인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는 한자의 일반적 용례가 사뭇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18세기말에 만들어진 ‘역어’가 틈입하면서, 혼란은 가중됩니다. 그렇다 보니 ‘초월번역’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요, 이번이 그런 것 같습니다. 물질과 소재의 차이를 간과하고, 한국어 언중의 이해 편의를 위해서 그 차이를 무시한 ‘친절한 번역’이 독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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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2가지물질.jpg



2. 소재가 인류사를 바꾼 두 가지 방식

이 책에서 다룬 12가지 소재의 상호 작용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가. 생물인 인류의 생존을 유지한 소재의 역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소재가 바로 ‘전분’입니다. 전분은 주로 곡물에서 취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해서 인류는 농경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기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러한 변화를 인류사에서는 농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분의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 것은 질소비료의 탄생 덕이었고, 그 질소비료를 상업성을 갖추고 만들어낼 수 있게 해 준 것이 ‘암모니아’의 합성이었습니다. 질소비료를 통한 농업생산량의 획기적인 증가를 녹색혁명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입니다.

인간이 모여 살다 보면, 생로병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전염병과 같은 극단적인 병을 경험하게 되면 파멸적인 사로 치닫기도 하죠. 이때 필요한 것이 ‘약’입니다. 경험이나 우연을 통해서 얻게 된 ‘약’은 ‘독’에서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약은 병을 예방하는 ‘백신’으로까지 외연을 확장했습니다.


나. 불로 시작한, 에너지의 변천사에서 소재의 역할

불의 힘은 대단합니다. 불의 열에너지는 ‘금속’을 녹이고, ‘세라믹’을 완성하며, ‘플라스틱’을 성형합니다. 실로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태초의 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다룰 수 있었던 불은 ‘셀룰로스’에서 시작합니다. 셀룰로스로 이루어진 목재를 이용해 불을 사용하다가, 더 나아가 화력이 훨씬 높아지는 목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요, 비로소 이 목탄의 열에너지로 세라믹을 굽고,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산업혁명은 열에너지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기 기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운동에너지는 ‘화석연료’를 태워서 만들어 낸 열에너지를 고작 10%의 효율로 변환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낭비가 큰 열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화석연료였던 겁니다.

19세기말 전기가 상용화됐습니다. ‘자석’을 이용하면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만들어서 다시 전기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발전소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1882년이었습니다.

발전(發電)의 발전(發展)은 20세기 중반으로 이어집니다. 핵분열의 거대한 열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해서 인류는 그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고 다시 전기를 발생시키는 '원자력' 발전을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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