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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즈키 유스케_세계의 신들

얇지만 얄팍하진 않은 책

by 안철

[리뷰] 스즈키 유스케, 『세계의 신들』, 알에이치코리아, 2025.

鈴木悠介 監修 『眠れなくなるほど面白い 図解 世界の神々』, 日本文芸者, 2021.



1. 역시 일본은 책을 잘 만든다


저는 지난 세기에 출간된 책 중에서 현해탄을 건너와 번역된 책들을 제법 읽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시작해서 일본어 중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된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닐 뿐만 아니라, 1990년대까지도 일본어 서적 그대로 유통될 정도로 일본어 서적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영어 다음으로 많이 번역되는 책이 일본으로부터 옵니다.


진짜 일본에서는 별의별 책이 다 출간됩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좀 말씀드리자면, “이런 걸 좀 정리한 책이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면, 어김없이 일본 번역서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 해적판으로 복제되던 로봇도감을 시작으로, 1990년대 2차 대전을 다룬 아틀라스류를 지나 최근에는 신화를 정리한 책들까지 찾는 족족 일본에서 출간되어 번역된 책뿐이었습니다.

최근 5년 사이, “누가 이 따위를 책이라고 펼쳐보나?”라며 혀를 차며 일본어 번역서의 책장을 펼쳤다가, “나 같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찾는 거로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책장을 덮는 경험을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역시 일본이로구나 하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단히 협소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특정 목적의 책들을 잘도 출간합니다.

일본어 사용 인구를 1억 2천8백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한국어 사용 인구를 7천7백만 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다만 실질적인 도서 시장의 타깃 인구를 따진다면, 한국어 시장에 비에 일본어 시장이 2.4배쯤 되겠지요. 내수 시장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인구 적정선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1 억설’인데요, 일본에서 시작되어 한국 사회의 통일 담론에서 변형되면서 어느샌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출판시장에서도 같은 수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글쎄요, 이를 다룬 연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튼간에, 일본의 인구수가 다양한 출판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이루지만, 우리나라의 인구는 그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단순히 내수시장의 타깃 인구수만으로 일본 출판시장의 강점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별의별 책이 다 출간될 수 있도록 소비를 해내는 그 시장의 별남은 확실히 주목해 볼 만하다고 봅니다.



2. 요약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


요약을 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어떤 것은 과도하게 잘라내고, 어떤 것은 쓸데없이 부연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하임 사피라의 책을 리뷰하면서, 저는 좋은 입문서의 두 가지 자질로 ‘쉽게 읽힐 것’과 ‘얇을 것’을 꼽았었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 입문서일 수가 없으니 얇을 수밖에” 없고, “최대한 쉽게 풀어써야 하니 쉽게 읽힐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임 샤피라는 성공했습니다. 게임이론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무엇을 자르고 버려도 정수를 남길 수 있는지 알 수가 있는데요, 그걸 성공했다는 겁니다.

다만 모두가 입문서적 요약에서 성공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 입문』은 “입문서를 위한 입문서”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성공적인 요약이 이루어지진 못했습니다.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하는 것보다는,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게 더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처음에 이 책을 잡아들었을 때만 해도, “이 분량으로 도대체 무슨 책이 되겠냐?”며 짜증을 냈었습니다. 요시다 아쓰히코의 『처음 시작하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리뷰에서, 저는 원제인 『一冊でまるごとわかる ギリシア神話』대로 “한 권으로 통째로 알 수 있지만, 처음 시작하기엔 부적절하다”라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기원전 9세기 그리스 문자가 발생하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전해질 수 있었고, 기원전 5세기에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시인들에 의해 신화 기반의 희곡들이 남게 됐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로마로 넘어가 기원후 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로 풀어져서, 오늘날 그리스 신화의 표준이 되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학작품으로 정리된 신화는 오늘날까지도 체계를 갖추고 전해질 수 있었고, 요시다와 같은 신화학자에 의해 '한 권'으로 압축될 수 있었던 겁니다.

막상 책장을 덮을 때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요약을 참 잘했다 싶습니다. ‘입문서를 위한 입문서’로서도 좋고, 일종의 서브노트처럼 활용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3. 도해는 언제나 옳다


요약을 잘했다 싶은 평가의 8할은 도해에 있습니다.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시각 정보는 직관성이 높은데요, 잘 정리된 그림이나 잘 찍은 사진은 열 마디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특히나 도해가 힘을 발휘하는 곳이 가계도 family tree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물론이요, 북구신화, 켈트신화, 이집트신화까지, 그 어느 신화에서 빠지지 않고 ‘환장할 근친상간의 개족보’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동족상잔의 쟁투가 신화로 정착하면서, 권력 이양에 따른 부족 간 역학관계가 근친 교배로 묘사되었을 터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 상식 밖의 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쏙쏙 머리에 박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계도로 정리하는 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신화는 도상 icon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숱한 회화작품을 통해서 그 정교함이 더해졌고요. 그렇다 보니, 그리스 신화를 다루는 많은 책들이 유명 화가의 그림과 함께 소개되곤 합니다. 이 직관적인 시각 정보가 도상을 더욱 강화하기도 하지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미 확립된 도상에 기반한 도해라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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