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끝나고 난 뒤: 이제 문집을 내야 한다
대부분 축제가 끝나고 난 뒤에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白書라는 이름이 되었건, 보고서란 이름이 됐건 말입니다. 다만, 그런 본격적인 분석 작업이 불가능할 때는, 되는 대로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곤 합니다. 이 책이 딱 그런 의미로 보입니다.
19쪽
이 책의 구상은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가 <광장 안과 밖의 시민-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나?>라는 제목의 시민 강좌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2025년 3월에 양승훈, 이승윤, 신진욱이 각각 ‘광장 속 시민’ ‘사회 속 시민’ ‘정치 속 시민’을 주제로 연속 강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문학동네가 이 강좌들을 발전시킨 공저서 작업을 제안하여 저자들이 흔쾌히 동의하였고, 여기에 이재정이 결합해 더 풍성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서론에서는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글은 앞에서 서술한 민주주의 위기, 극우, 혐오, 양극화, 세대론 등 첨예한 쟁점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루었다”라고 선언합니만, 잔뜩 기대했던 입장에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13쪽
비상계엄에서 극우 파시즘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짚어보고(신진욱) 탄핵 광장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한 뒤에(이재정), 보다 심층적으로 ‘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뜨거운 논쟁에 대한 팩트체크와 더불어(양승훈), 한국사회 구성원들, 특히 청년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의식세계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이승윤).
연속 강연의 원고를 추려서 책을 엮는 경우는 잦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았고, 그중에서 성공 사례와 실패 사례를 나누자면 다음 두 권 정도가 될 듯합니다.
꽤나 좋은 글들이 많았고 다룬 주제들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광장의 정치나 랜드마크 정치를 다룬 정치 분야의 주제는 꽤나 마음에 들었고, 남촌을 다룬 도시사학 분야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노인, 청년, 외국인, 교육, 상권과 주거를 아우르는 부동산 문제를 다룬 사회 분야의 주제 의식만큼은 충분히 공유해 볼 수 있는 방향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울학이란 학제 간 연구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분야를 두루 섭렵한 것으로 보입니다.
[리뷰] 류보선 외_서울의 인문학: 옴니버스 앨범식 편집을 고민하다 중에서
특히나 이 책의 첫 번째로 수록된 류보선의 글은 광장에 대한 글을 쓸 때 자주 인용하기도 하고, 이 책을 집어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딱 이 책 정도만 되었으면 하고 바라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과했던 듯합니다. 펼쳐진 책은 다음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선 편집자의 역할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행사기획' 단계에서 더 손을 쓸 수 없게 이야기가 끝났을 터라서 말이다. 그래서 강연 의뢰 당시의 조정을 넘어서서 책의 원고를 수정하기 어렵다 보니, 각각의 글들은 읽을 만하게 퇴고되었지만, 하나의 맥락에서 보자면 당최 어우러지지가 않는다. 심각하게 각개전투를 하게 된다.
'서울의 재발견이 불가능한 책'이 됐고, 더 나아가서 '시민이 행복해지려면 도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1도 고민되지 않은 책이 돼버렸다. 그런 점은 꽤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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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나친 복잡화와 지나친 단순화라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의 중간 항로를 헤쳐 나가야 한다.
-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중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짜증이 나는 부분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실증 연구가 부재하므로 기존의 가설들은 무의미하다는 억지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도출된 기존의 가설들은 ‘단순화할 수 없으며 복잡한 맥락 안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억지를 부린다는 점입니다. 그저 어깃장을 놓기 좋은 핑계를 남에게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죠.
짜증이 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세대는 없다”라고 공언하는 신진욱과 “이런 세대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이승윤의 ‘집안싸움’은 나름 재미있긴 합니다.
몹시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었던 두 권의 책에서 단순화한 이론과 복잡한 현실의 불일치에 대한 혜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피터 터친의 짧고 굵은 발언은 인용해 먹기 좋지만, 좀 더 심도 깊은 조언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에 의해서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 이론은 언제나 약간은 단순화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거의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정치적 면모, 경제적 면모, 심리적-성적 면모 등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 이론은 대체로 우리가 오로지 논쟁을 위한 논쟁을 하면서 단 한 가지 일만 진행되고 있는 듯이 구는 허구의 게임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을 패턴들을 탐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만화로 환원한다. 그리하여 사회과학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모든 진전은 다 끝나고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말할 용기에 근거한다.
세계에 대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면 세계를 단순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발견이 이루어지고 한참 뒤에도 사람들이 계속 단순화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모든 것의 새벽』, 김병화 옮김, 김영사, 2025, 37쪽
두 사회학자의 글은 사회과학의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인문학적 분석에 의지하다 보니 공허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이 글들이 사회학 논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니 대중서의 문법에 따라, 쉽고 간단하게 쓰일 필요는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합목적적으로 설계된 조사와 그 통계자료를 토대로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때때로 동원하는 통계자료(시사 in과 한국갤럽의 정기조사)에서는 추출해 낼 수 없는 결론을 가져다가 아전인수 하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이게 진정 사회학자의 글인지, 선동가의 프로파간다인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이 둘의 언술들을 조금만 변형하면, 민주당 강성 지지자(개인적으로는 찢천지라는 멸칭을 선호하는 편입니다)에 그대로 대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여기에 이재정의 “찬탄집회 후기 썰 푼다” 수준의 글이 들어가면서, 아쉬움은 절망으로 바뀝니다. 원래 강연 원고로 준비됐던 다른 3인의 원고에 비교하면 그 수준이 현격히 떨어질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는 통계자료로 쓸 수 없는 황당한 조사 자료를 가지고 ‘핑크빛 후기’를 그려냅니다. 참담합니다.
이게 다, 문학동네 탓입니다. 문학동네가 책으로 엮어냈으니, 적어도 ‘유수의 출판사’가 보유하고 있는 우수한 인적 자원을 동원해 근사한 ‘편집’이 이루어졌으리라 기대했던 거죠. 그런데 문학동네의 편집력이랄 것을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잔뜩 기대했던 이 책의 거품이 걷히고 나니, 아득바득 깔 수밖에 없는 분노만 남게 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 개똥 같은 책은 주워 먹을 게 없으니 그냥 책장을 덮어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강연에서 선 뵈었던 세 글은 주목해 볼 만한 지적도 많습니다.
애초에 신진욱의 글에서 기대했던 것은 ① 극우의 학술적 개념, ② 한국의 극우세력의 영역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기대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들로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극우 문제를 고민하려면 어떤 ‘레퍼런스’를 찾아야 할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46쪽
에크하르트 에세는 극단주의 extremism란 민주적 헌법국가의 민주적·헌법적 요소, 즉 다원주의, 다당 경쟁, 정치적 반대의 권리, 권력 분립, 보편적 기본권 등을 거부하거나 제한하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47쪽
빌헬름 하이트마이어는 극단주의의 본질을 폭력성에서 찾는 피상적 이해 때문에 물리적 폭력을 행한 범법자들에게만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면서, 극우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찾으려면 ‘사회의 중심부’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단주의 폭력과 혐오를 발생시키는 진정한 원천은 사회의 권력층과 엘리트 집단이라는 것이다.
48쪽
크리스토프 부터베게는 “‘극우’란 많은 경우 폭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통해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하거나 또는 폐지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표준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소수자들을 배제하거나 추방하고, 심지어는 절멸하며, 사회적 해방과 민주적 참여의 목적을 추구하는 세력들을 약화하거나 제거하려는 행위나 인물, 조직을 지칭한다”라고 말했다.
카스 무데는 극우에 대한 수십 개의 학술적 정의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요소로 반민주주의, 권위주의 국가관, 외국인혐오, 인종주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추출했으며, 그중에서도 반민주주의가 극우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임을 밝혀냈다.
67쪽
마이클 맨은 파시즘의 가치, 행동, 권력 조직의 특성으로 △위협으로 여기는 외부 존재들이 제거된 동질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배타적 내셔널리즘, △전체주의국가를 통해 모든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발전을 달성하려는 국가주의, △사회에 어떠한 계급적·문화적 갈등도 없는 초월적 사회질서의 추구,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기는 내·외부의 적을 절멸하려는 ‘청소’의 개념, △집단주의적 열광을 강조하고 파괴 행위를 고무하는 준구사주의 등 다섯 가지 요소를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탄핵 정국 넉 달 동안 망상적 믿음을 공유하는 대중에서 폭력적 행동으로, 다음엔 정부·여당 권력층과 협력한 헌정 파괴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두 번째 기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극우는 “정치적 회합을 거듭 개최하면서 거기서 공유하는 세계관과 정체성이 많은 참여자의 내면에 습성화” 됐고, “‘우파’를 자처하고, ‘좌파’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대한민국의 ‘적’ 추방해야 하는 ‘非 국민’, 제거해도 되는 ‘비인간’으로 대상화하는 데 익숙해졌다”라고 봤습니다. 비단 신진욱이 분류한 ‘극우’에만 해당하는 특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 세력이 가진 특질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12·3 이전에 윤석열 정부의 파워엘리트를 통해 극우가 권력을 가지게 됐다면, 12·3 이후에는 극우세력이 보수정치의 주류로 부상하고, 보수정당을 표방하던 국민의힘이 전면적으로 극우화됐다”라고 봤습니다. 이로써 “극우 개신교 집단과 사회 주변부의 ‘아스팔트 우파’ 집단들은 정치권력 외곽에서 갑자기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정치 무대 중심에 서게 됐다”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글 전체가 동의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주장을 논증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이것만큼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싶은 점이 없진 않았습니다.
첫째는 “왜 자꾸 2030 남성에 대해서 보수화의 혐의를 덧씌우려는 시도가 반복되는 것일까?”에 3가지 정도의 이유를 정리해 냈습니다.
①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정확하지 않은 ‘리트머스 종이’ 때문”으로,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면 진보, 정의당·녹색당·진보당 지지는 좌파, 국민의힘이나 개혁신당 지지는 보수”라는 현실적 분류가 이념 스펙트럼의 불일치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② “미디어가 강화하는 프레이밍과 SNS의 필터 버블 및 에코 체임버 효과”도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로써 “유사한 의견만을 반복 청취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종족주의(혹은 부족주의)’를 강화하는 기제로 기능”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기제는 단지 2030 남성에만 작동하는 건 아닙니다.
③ “성별 정체성에 기반한 동원 기제가 2030 남성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는 건데요, 결국 사람은 복잡한 존재인데 단순화하면 제대로 된 답이 나올 수 없다는 쉰소리이기도 합니다.
“게임이나 하고, 코인이나 하며, 펨코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여자 욕이나 하고, 공정 타령만 하며, 2찍이나 하고, 내란 옹호세력을 지지하는 청년이라는 이미지”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정착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정 정치 고관여층이나 미디어가 ‘창조’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젠더 전쟁’의 치열한 논쟁,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징, 여성과 남성의 상이한 정치적 조직화 방식, 그리고 보수정치세력이 2030 남성을 포섭하려는 전략적 기획 속에서 점차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젠더 전쟁으로 형성된 남성의 반페미니즘적인 성향, 한한령 이후 중국의 여러 ‘공정’ 사례를 목격하면서 확산된 온라인 반중주의 정서, 그리고 인국공 문제, 부동산 폭등, 조국 사태, 광역 단체장 세 명의 성폭력 폭로 및 낙마 등의 국면에서 우파는 2030 남성 조직화에 성공”했다는 점은 곱씹어볼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양승훈의 글은 전반적으로 “우리 애가 원래 착한데, 기회가 없어서 삐뚤어진 겁니다. 잘 타이르면 원래대로 착해질 겁니다”란 참 역겨운 이야기를 합니다.
“탄핵 찬성 집회에 참여하는 않은 이유를 ‘우리에게 응원봉을 안 주는데 왜 나오나?’라는 말로 설명”했다며, 공론장에서의 토론이 필요하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깃발 만들어 나간 새끼들은 중국 놈이냐?”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실제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어서, 무척 쪽팔렸더랬죠.
“보수화된 2030 남성은 없다”라고 단언하며, “내란 사태 해소 지연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서부지법 사태와 같은 망동을 보며 성급하게 화풀이할 대상을 찾고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과도한 공격을 했을 뿐”이라고 포장합니다. 하지만 그 단언 역시 반증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승훈의 글은 신진욱의 글에 비해 더 짜증이 납니다.
이승윤의 글은 꽤나 ‘중립기어를 박고’ 있어서, 읽을 만합니다. “오늘날 청년세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청년들의 실존적 삶의 모습과 정치의식에 대한 더욱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며 글을 시작하기 때문이죠. 물론, 그만큼 돈이 들어가는 ‘실증 연구’를 누가 하겠느냐의 문제는 1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연구가 필요하다’고 열심히 나발을 불면, 정부부처, 국회, 국책기관 어디쯤에서는 수천만 원의 연구 용역을 줄지도 모릅니다. 아주 의미 없는 일은 아닐 테죠.
이승윤은 “한국의 청년 프레카리아트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글을 씁니다. 앞의 두 사회학자와 달리, 노동 문제 연구에 집중한 이 사회학자는 자신의 기존 연구에서 실증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르는 집단이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다”는 사실은 “불안정노동에 오랜 기간 머무르는 특정 집단이 실질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주목합니다. 게다가 이 청년 집단 내에서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관찰되며, 이로써 청년세대의 불평등 심화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청년 세대는 능력주의적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계층 상승이 어렵다고 본 비율은 2005년에 41.7%였다가 2022년에 55.7%로 크게 증가”했다는 겁니다. “매우 불안정 집단 내에서는 약 3분의 2가 계층 상승이 어렵다고 응답”했고 “비관적 응답자 전체로 보면 43%가 매우 불안정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는 “객관적 노동 불안정성이 주관적 미래 전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력해도 희망이 없다’라는 집단적 체념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 ‘각자도생’과 같은 개인주의적 태도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불안정노동에 처한 모든 청년층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체제 변화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며, “제도에 대한 환멸감으로 극우 성향을 보이거나 포퓰리즘 정당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피터 터친의 역사동력학적 관점에서나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적 관점에서만 봐도, 미국 사회에서는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입니다. 이승윤은 중립기어를 박았지만, 이들의 정치적 극단화 political extremism 과정은 “구조적 개혁과 집합적 권리 확장을 지향해 나갈 가능성”보다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집단 간 적대를 기반으로 한 반제도적 정치운동으로 표출된 가능성”이 오히려 더 커 보입니다.
이승윤은 “이 현상이 청년 남성 전체의 보수화 내지 극우화를 의미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청년 노동시장의 복잡성과 불안정성 속에서 다양한 ‘갈라 치기’가 가능함”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이 그나마 속 편한 독서를 이어가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