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의 횡포: 공동선은 어쩌란 말인가?
마이클 샌델의 책, “능력 merit의 횡포: 공동선은 어쩌란 말인가?”의 번역서 제목이 아주 지엽적인 결론에 불과한 ‘불공정’으로 흐른 이유는 2020년에 벌어진 ‘인국공 사태’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학력주의 credentialism에 기반한 능력주의 meritocracy적 담론이 지배한 ‘인국공 사태’는 이 책이 다루는 고민을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다만, 진영 담론의 당위성을 담보하기 위해 언술적 분식이 이루어지는데요, 그게 ‘공정과 상식’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샌델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던 측의 공정은 ‘공정하다는 착각’에 불과하고, 상식은 ‘능력주의에 근거한 윤리적 전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당대의 사회적 화두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으로 제목을 뒤집었을 터입니다. 조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짜증이 솟구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그게 무슨 메리트가 있냐?”는 빈정거림이 있습니다. 캐임브리지 영어사전의 첫 번째 뜻풀이, “the quality of being good and deserving praise”에 조응하는 의미로 활용됩니다. 유의어로 볼 수 있는 value와는 ‘개인의 내재적 가치’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virtue와는 도덕적 판단(morally good)을 배제한 ‘good’이란 점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credit과는 이룩한 업적에 대한 반대급부인지 있는 그대로의 상찬인지의 차이가 있으며, qualification은 증명의 유무로 차이가 발생합니다. 메리트의 뜻풀이에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단어 두 개, ‘good’과 ‘deserve’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존 롤스는 ‘옳음 right’과 ‘좋음 good’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공동선 common good’과도 꽤 큰 격차를 드러내게 되겠지요. 또한 샌델은 ‘deserve’로 표현되는 일부 자격 담론 역시 능력주의 논리에 깊숙이 닿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봤을 때, 메리트의 역어로서의 ‘능력’은 타인에게 상찬 받을 만하며 선천적으로 주어진 좋은 자질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업적에 대한 보상일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증명한 것이라고도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런 의미의 ‘메리트’에 대한 분석이 정치철학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이 책이기도 합니다.
56쪽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 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처럼 유덕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공직을 맡기를 바랐다.
The founders of the American republic called themselves “Men of Merit,” and hoped virtuous, knowledgeable people like themselves would be elected to office.
첫째, 왜 입시 비리가 일어나는가?
둘째, 왜 능력을 ‘좋음’을 넘어서 ‘옳음’으로 보는가?
그렇게 시작된 질문은 종국적으로 두 가지 관념의 윤리적 토대를 검토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점 무엇인지 고찰합니다. 입시 비리는 학력의 세습을 위한 노력이며, 학력의 세습은 학력주의에 의해 강화됐으며, 학력주의는 능력주의 윤리에 의해 정당화됐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오늘날 미국 사회가 대학 입시에 목매는 현상이 불평등 심화에서 기원한다고 지적합니다. 50년 전에는 대학 서열이 중요하지 않았고,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미국인은 다섯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어디에 발을 들이느냐에 따라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 됐다는 거죠.
현대 사회에서 대학, 특히 명문대 진학은 계층 상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버드 등 명문대의 학생 중 상당수는 상류층 출신이며, 저소득층 출신의 비율은 극히 낮습니다. 교육은 더 이상 ‘기회의 사다리’가 아니라 기득권을 재생산하는 장치, 즉 '인재 선별기 sorting machine'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합니다. “SAT는 수학능력이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타고난 지능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닌 것으로”.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 점수는 올라간다”는 겁니다.
물론 “상류층 기숙학교 졸업생들을 우대”하고, “졸업생의 자녀라면 학업 능력이 떨어져도 붙여 주던”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과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관행이 사라졌고, 블라인드 입학제와 후한 장학금 정책을 도입해서 “가난하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이 넘지 못하던 재정적 장벽이 어물어졌다”고는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에서의 능력주의 혁명은 그 초기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그리고 교육계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지금도 계속 약속하고 있는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았다”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에서 저소득층 출신자의 비율은 2000년 이후 그대로이며 일부 경우에는 오히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기” 마련이라,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 준다”라고 통열하게 비판합니다.
이 과정에서 “최후의 면책적 편견으로서의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적 윤리에 기반해, 다음과 같은 윤리적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150쪽
첫째,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대졸자의 임금 수준을 한껏 높이는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해 준다.
둘째,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이쯤에서 학력주의에 도사린 ”능력주의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출생에 따른 세습적 불평등을 대신한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에도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지고”,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라고 비판합니다.
샌델은 마침내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을 시궁창에 빠뜨렸다”라고 봅니다.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닫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스스로의 눈으로도 자신의 일이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저 “봉급 수준의 정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샌델은 이 상처를 인식하고 일의 존업성을 복구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분배적 정의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를 포함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을 결부시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인정투쟁’이란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던 헤겔의 생각이라고도 덧붙입니다.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성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는 것이죠.
불평등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하며, 능력주의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라고 믿게 합니다. 따라서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의 탓”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은 오만 hubris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는 겁니다.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는 “은총과 능력, 무력함과 자기 구제 사이의 치열한 변증법에서 시작”되었는데, “자수성가의 윤리는 감사와 겸손의 윤리를 압도”하는 것으로 결착됐습니다. 이로써 세속적 성공과 도덕적 자격이 결합되어, 능력주의적 윤리가 태동하게 됩니다.
여기에 섭리론적 윤리관이 더해집니다. 선한 것과 위대한 것이 꼭 연결되지는 않지만, “강대국은 선해서 위대하다는 도덕론적이고 섭리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내면서 동시에 부유한 개인은 자신의 미덕으로 부유해진 거”라는 도덕론적, 능력주의적 아이디어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최근 40년간 능력과 타당한 자격에 대한 담론은 “하면 된다”는 자기 책임의 담론 형태로 공적 담론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만, 샌델은 그와 같은 “아메리칸드림은 고귀한 거짓말 noble lie이 될 것”이라 비판합니다. “세계 전역의 민주국가에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하지만,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에 불과하다며 강하게 비판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샌델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하라고 지적합니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노력과 선도적 시도, 재능에 후하게 보상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의 기여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보상하는 체제나 정실주의로 정해진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체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에 샌델은 하이에크를 시작으로 존 롤스를 지나 여러 학파의 견해를 분석해 봅니다. 그중에서 눈여겨볼 만한 몇몇 견해들을 정리해 봅니다.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부유해지거나 명예로운 지위에 오른 사람은 그런 성공의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데, 이는 “탁월한 능력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런 혜택이 모든 이에게 공정한 시스템의 일환”이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능력을 정의의 제일조건으로 배제하고 있지만, 둘 다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기운다”라고 설명합니다. “개인 책임을 분해 관찰해야 하며, 재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라고 봤습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천부적 재능 차이를 소득 불평등의 주원인으로 놓음으로써 그 역할을 과장하며 부지불식간 그 명예까지 과장하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348쪽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Breaking down barriers is a good thing. No one should be held back by poverty or prejudice. But a good society cannot be premised only on the promise of escape.
결론적으로 샌델은 능력주의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을 보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도덕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다고 비판합니다. 진정한 공동선을 위해서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극복하고, 사회적 인정과 연대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며,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고 지적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