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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피터 터친_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종말의 시대: 엘리트, 반엘리트 그리고 정치적 붕괴

by 안철

피터 터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유강은 옮김, 생각의힘, 2025년

Peter Turchin, End Times: Elites, Counter-Elites and the Path of Political Disintegration. Penguin Books, 2023.



1. 나는 왜 이 책을 읽었는가?


제가 이 책에서 답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은 “왜 국가로 조직된 모든 사회는 결국 ‘종말 end times’, 즉 고조된 사회적 격동과 정치적 폭력 그리고 때로는 붕괴의 시기로 접어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 한국어판 서문


제가 굳이 신간 서적을 찾아 읽는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밑바닥에 깔린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그 책이 ‘평소 궁금해하던 것을 다루었다’고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걸 다루었다는 판단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건, 책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번역서의 제목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제를 아득히 넘어서는 경우가 잦기 때문입니다. 이 책만 봐도 그렇습니다. “종말의 시대: 엘리트, 반엘리트 그리고 정치적 붕괴”란 제목이 어떻게 하면,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가 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책이 아니라, ‘왜’에 집중한 책입니다. 무엇보다 그 이유를 탐구한 최종 목적지는 ‘종말의 시대’입니다. 도대체 ‘왜 때문에’ 종말의 시대가 반복되는지를 역사동역학 cliodynamics의 시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번역서들의 제목 장난질에 지쳐서, 무조건 원서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들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 책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그래서 그 책을 읽으면 무엇을 주워들을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윤석열 정부 3년을 겪으며, 이 정권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러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제목의 책을 꼽자면, 『How Democracies Die(번역서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와 『How Civil Wars Start And How to Stop Them(번역서명은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이었습니다. 여기에 번역서명 때문에 더 펼쳐든 책을 꼽자면, 『Tyranny of the Minority: How to Reverse an Authoritarian Turn, and Forge a Democracy for All(번역서명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과 이 책입니다. 보시다시피, 노골적인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은 책도 있는 반면, 번역서 제목에 낚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례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떻게’라는 양태를 분석하다 보면, 공통적인 ‘왜’가 도출됩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사례에서 양태를 분석하다 보니, 종말의 시대가 도래하는 4가지의 이유를 도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50쪽
우리의 분석은 불안정을 낳은 네 가지 구조적 추동 요인을 가리킨다. 대중의 동원 잠재력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궁핍화, 엘리트 내부 충돌로 귀결되는 엘리트 과잉생산, 쇠약한 재정 건전성과 국가의 정당성 약화, 지정학적 요인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추동 요인은 엘리트 내부의 경쟁과 갈등인데, 이는 위기가 다가옴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예측 지표다.

원인을 파악하고 나면, 그 원인에 개입해서 이어지는 사건들을 개변하는 작업이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활동들을 ‘개혁’이라고 하죠.

그렇다 보니, 이 책에서도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다루고는 있습니다. 중세시대부터 근대까지는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를, 현대는 미국의 사례를, 최근에는 이집트,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종말의 시대에도 붕괴를 면할 수 있었는지, 또 어떤 경우에는 종말의 시대에 이전 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게 됐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래서 정권이나 국가가 붕괴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고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2. 역사란 이야기다.


이 책은 재밌습니다.

다론 아제모을루 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 James A.Robinson의 공저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의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는 이야기 histoire가 늘 그렇듯이, '잘 끼워 맞춘' 역사적 사실들은 제법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경제사적 차원에서 풍부한 예증이 덧붙여지니 더할 나위 없이 재밌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histoire는 이야기 récit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연원한 영어의 히스토리 또는 프랑스어의 이스투아르라는 단어는 ‘쓰인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을 갖춘 ‘이야기’는 예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왔고, 즐길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선생님께서는 매 시간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해줄게”로 수업을 시작하시곤 했습니다. 마치 아를레키노 arlecchino처럼, 즉흥 연기까지 해가면서 세계사적 주요 장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 내주시곤 했었죠. 그래서 역사는 잘만 풀어내면 재미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은 역사적 사례에서 예증이 일어납니다.

그렇다 보니,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모든 것의 새벽』이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그리고 조지프 헨릭의 『호모 사피엔스』 같은 책들을 재밌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통시적 고찰을 통해 각각의 주제를 다룬 책들인, 헬레나 로젠블랫의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에드먼드 포셋의 『보수주의』, 로스 킹의 『피렌체 서점 이야기』, 강명관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뤼시앵 페브르의 『책의 탄생』, 얀 뤼카선의 『인간은 어떻게 노동자가 되었나』와 같은 책들도 꾸역꾸역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죄다 벽돌책이군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벽돌책이 아니라, 더 재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종말의 시대는 어떻게 오는가?


종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4가지 이유는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대중의 궁핍화 popular immiseration와 엘리트 과잉생산 elite overproduction입니다. “우리에게 트럼프 대통령을 안겨준” 그리하여 “미국을 국가 와해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회적 힘으로 꼽고 있기도 합니다. 그 맥락에서 나타나게 되는 종말의 시대는 어떤 양태인가를 이 책에선 계속해서 예증합니다.

가장 흔한 양상은 “약 100년 동안 통합 단계와 해체 단계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기준연도에 새로운 국가가 성립했다고 칩니다. 초기의 엘리트들은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익을 자제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평화시대가 50년쯤 지나고 나면, 전란의 시대를 완전히 망각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손자 세대의 엘리트들로 교체된다는 거죠. 그래서 엘리트들에 의해 대중에게 돌아가야 할 부가 엘리트에게 몰리는 ‘부의 펌프’가 작동하게 되고, 그 결과 비엘리트 계층의 생활 조건이 악화되고 권력에서 배제되면서 ‘대중의 궁핍화’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50년쯤 흐르면 대중의 궁핍화는 한계에 도달하고, 권력에서 배제되어 엘리트가 되지 못한 반엘리트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는 거죠.


대체로 100년 주기는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100년쯤 됐을 때 위기를 뭉개버리는 전쟁이나 전염병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괴멸적 붕괴를 벗어나 존속을 가능케 합니다. 프랑스를 1450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이전 한 세기는 그토록 황량하고 그 이후의 한 세기는 그렇게 찬란했는지”에 대해서는 “대중의 궁핍화는 기근과 감염병 그리고 내전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이후로도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을 시작으로 전란의 시대를 경험한 뒤에, 1660년대부터 계몽주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안정됩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다시 혁명의 시대에 돌입하죠.


이집트에 찾아온 ‘아랍의 봄’ 또한 엘리트 과잉생산의 여파로 봅니다. 주로 밀가루값 폭등으로 인한 대중의 궁핍화를 원인으로 꼽더라도 말입니다. 199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청년층 인구와 대학교육의 증가는 엘리트 지망생들을 증가시켰지만,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보니, “대규모 반체제 시위에 혁명군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런 일자리 없는 대졸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러시아의 경우,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발생한 올리가르히의 금권 정치와 옐친에 의한 정치 엘리트의 퇴조 때문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2000년 푸틴의 등장으로 파국적 종말을 회피할 수 있게 됩니다. “러시아 지배계급에게 도둑정치적 측면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영은 이전의 올리가르히들보다는 그래도 기능장애가 심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하면서, 푸틴 정권 1기에서 체첸 내전을 끝내고, 국가 재정을 건전화하며, 마침내 경제 성장을 이룩해 종말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좀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봅니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된 우크라이나는 올리가르히에 의해 동서로 나뉜 양극화가 이루어지고, 이들의 상호 쟁탈의 결과가 2014년 유로마이단을 불러왔으며, 그 이후로 내전으로 격화되어, 종국에는 2022년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올리가르히들에게 집중된 부의 펌프로 대중의 궁핍화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권정치에 의해 지배 계급에서 소외된 엘리트들이 반엘리트로 돌아서기도 했다고 봅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만큼은 지정학적 특성도 가미됩니다. “미국의 이익권 sphere of interest(사실상 나토)과 러시아의 이익권(러시아어로 흔히 말하는 ‘가까운 해외’) 사이의 지정학적 단층선에 자리”했다는 겁니다.



4. 미국에 닥친 종말의 시대


피터 터친은 “미국의 ‘대압착 Great Compression’은 이례적이고 희망찬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진보의 시대와 뉴딜 시기의 친사회적 정책은 비용을 치러야 했고, 그 비용은 미국의 지배계급이 부담했다”라고 전하며, 이는 “대다수의 엘리트들이 사회 협력을 장려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은 “대압착이 뒤집어졌다”라고 봅니다. “왜곡된 ‘부의 펌프’가 나타나서 저소득층에게서 뽑아간 부를 부유층에게 주고” 있어, ‘제2의 도금시대’로 들어섰다고 평가합니다. “앞선 다툼의 시대의 격동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엘리트들은 그 교훈을 잊은 채 전후 번영의 시대의 토대가 된 기둥을 점차 해체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또한 “미국 지배계급은 여전히 자신의 협소하고 단기적이며 편협한 이익을 증진하는 데 매우 유능하다”라고 평가합니다.

여기에 2000년대에 이르면, 미국사회는 학위 보유자 수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지위를 크게 앞지르고 있어서, 엘리트 과잉생산이 이루어진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에 우려스러운 상황은 정치에서 나타납니다. 대압착시대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수준에 가까웠던 민주당은 “상위 10퍼센트와 1퍼센트의 당”으로 변모해 버렸고, 원래는 상위 1퍼센트의 정당이었던 공화당은 “포퓰리즘 분파가 장악”하고 말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피터 터친은 이와 같은 상황, 그러니까 “서구 민주주의가 '계급에 기반한 정당 체계‘에서 '다수의 엘리트 정당 체계‘로 이행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금권정치와 과두제에 취약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더 나아가서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사회적 격동과 정치적 폭력 그리고 때로는 붕괴의 시기로 접어들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걸까요? 피터 터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90쪽
영구적인 해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의 펌프가 차단된 균형 잡힌 사회 체계는-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끊임없이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불안정한 평형 상태다.

“이기적인 지배계급이 사회를 망가뜨린다면 다른 대안을 찾는 게 좋”으며, “우리의 통치자들에게 우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단언합니다. 복잡한 인간 사회가 순조롭게 작동하려면 엘리트들이 필요하며, 따라서 엘리트들을 타도하고 반엘리트들로 대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엘리트들이 만인을 위해 행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압착'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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