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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데이비드 그레이버_모든 것의 새벽

‘기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또 벽돌책을 펼치게 하다

by 안철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모든 것의 새벽』, 김병화 옮김, 김영사, 2025.

David Graeber, David Wengrow, 『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 Penguin books, 2022.



1. 또, 벽돌책


저는 벽돌책을 싫어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게으른 사람이라서입니다. 그 두꺼운 책을 정성스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성실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벽돌책을 손에 쥘 때마다, 독서가 고역입니다.

둘째는 문외한이라서입니다. 대부분 벽돌책은 저자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마구 쏟아붓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는 1도 없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당연히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900페이지쯤 되는 벽돌책(이 중에서 뒤에 150페이지 정도는 주석이긴 합니다)을 손에 쥐면, 한 달 내내 붙잡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시간당 30페이지를 겨우 읽을까 말까 하는데, 하루 작정하고 서너 시간 책장을 넘기면 이틀 정도는 방치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자기효능감이 바닥을 기게 됩니다. 악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기에, 저는 벽돌책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돌책을 아예 펼쳐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평소에 궁금해했던 바로 그 주제를 다룬 책이라서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입니다. 막상 그 궁금증은 벽돌책 하나로 풀어내야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독서의 효율’은 극악이 됩니다. 대충 50만 단어 정도로 이루어진 언어의 바다에서 500단어 미만으로 정리될 수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중얼거리며 벽돌책의 책장을 열고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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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언가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


이 책의 첫 챕터는 “이것이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책이 아닌 이유”로 시작합니다만, 끈질기게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탐색합니다. 그 불평등의 기원이 ‘모든 것 everything’의 기원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등의 기원’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의 기원 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에서 시작되고, 루소의 글은 18세기 계몽주의 맥락 안에서 기원 탐색의 프레임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제 우리가 계몽주의라 이름 지은 것, 그리고 인간 역사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개념에 미친 영향은 우리가 대개 인정하려 드는 것보다 더 미묘하면서도 심각하다. 우리가 알아낸 것처럼, 그것들을 다시 검토하는 일은 인간의 과거를 오늘날의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친다. 농경, 재산, 도시, 민주주의, 노예제, 문명 그 자체의 기원 등에 대한 해석도 모두 인간의 과거다. 결국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진화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 반영하게 될 책을 쓰기로 했다. - 43쪽


순간 떠오른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제 인생의 책이라고 꼽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입니다. 근대적 기획에 의해 촉발된 기원에 대한 고민을 다룬 책으로, 이 책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세키가 우선 의심한 것은 영문학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물론 소세키가 영문학을 한문학에 대치시켜 상대화하는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먼저 이 보편성이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역사성[起源] 자체를 은폐시키는 일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

이 책을 번역한 박유하는 “가라타니 고진에게 <역사성>이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라고 부연하면서, 역사성에 ‘기원’이란 한자어를 부기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첫 챕터인 <풍경의 발견>에서는 다음처럼 야릇한 설명을 합니다. “발견할 것도 없이 이미 존재했다고 말해야 옳을” 풍경이지만, “풍경으로서의 풍경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풍경의 발견>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중층적 의미를 띠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때 “<풍경> 이전의 풍경에 대해 말할 때 이미 <풍경>에 근거해서 보고 있다는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여기서 “풍경이란 하나의 인식틀이며, 일단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된다”라고 봅니다. 그렇다 보니 “풍경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지각 양태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역전이 필요”합니다. 바로 계몽주의 시대에 근대적 기획으로 탄생한 “내적 인간 inter man”에 의해 풍경이 발견된다고 봤습니다.


이 책에서도 고진과 같은 방식의 고민이 엿보입니다.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탐색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서 출발하다 보니, 고고학적 탐구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철학적 당위에서 논의가 시작됐다고 비판합니다. “계몽주의는 단순히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 가지 가능성, 사회를 어떤 합리적 이념에 일치하도록 개조하는 자의식에 입각한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따라서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고찰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다룬다고 주장하는 모든 역사적 저작은 실제로는 문명의 기원에 관한 탐구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3. 익숙한 것들에 대한 작별 인사


이 책에서 저자들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자주 인용합니다. 아무래도 대중적 성공을 얻은 책이다 보니, 독자의 이해를 유도할 수 있는 좋은 레퍼런스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저 역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았습니다. 『사피엔스』의 리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꾸어지지 않는 구멍도 참 많았는데요, 특히나 “농업혁명은 덫”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이란 확신이 그랬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 구조가 바꾸면서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됐고, 그 집단은 계급을 만들고, 그 계급은 노동력 착취로 이어지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큰 집단의 인구를 정착지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수단으로 경작을 하게 됐다는 게 하라리의 주장입니다. 얼핏 보면 혁명적인 견해인데요, 이에 대한 구체적 실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괴베클리 테페의 예를 들고 있긴 하지만 취약하기 그지없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주장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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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판단을 유보하지 않아도 좋을 ‘고고학적 증거’를 이 책을 통해 수집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90년대 이후,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에 적용된 새로운 유적 조사 방법에 따라, 놀라운 사실들이 연이어 밝혀졌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역사와, 농업 일반의 기원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01쪽

여기서 더 나아가 신석기 농업혁명이란 존재가 부정됩니다. 되레 ‘아도니스의 정원’이란 개념으로 취미 경작이 농업의 시작으로 제안됩니다.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채집인에서 신석기시대 농부로의 ‘전환’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로 야생 자원으로 먹고살던 단계에서 식량 생산에 근거하는 삶으로의 이행은 약 3,00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업으로 인해 부가 더 불평등하게 집중될 가능성이 생겼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거의 모든 경우에 그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서 1,000년 뒤에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의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사실상 시험 삼아 짓는 농사, ‘취미 농사 play farming’를 시도하고 있었고, 각자의 사회적 구조를 이리저리 전환하면서 생산 양식을 바꾸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처럼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과정을 다룰 때는 ‘농업혁명’ 같은 용어를 쓰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 349쪽

그리하여 이 책의 결론은 “지금까지 제안된 유일한 다른 이론은 불평등의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정”이라고 선언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근거한 모든 철학적 토대는 기원 탐색에 있어서 엄청난 편견을 가져왔고, 이 편견들은 21세기 새롭게 연구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루소에서 시작한 ‘인간 불평등의 기원’, 그러니까 농업혁명으로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은 자유의 억압과 불평등을 낳았다는 지금까지의 상식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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