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심리묘사와 탄탄한 내러티브의 재밌는 소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좀 거창해 보이는데요, 그래봐야 7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1년에 두 차례, 한 권 또는 두 권의 수상 작품이 나오는데요, 2020년 상반기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15 작품이 수상했고, 그 절반이 되지 않는 작품만 번역되었습니다.
번역되는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뉘더군요. 작품 자체가 탄탄해서 매력적인 이야기인지라 재밌게 읽히던가, 작가의 개인적 이력으로 마케팅하기 좋던가 말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도저히 팔아치울 자신이 없는지, 번역이 이루어지진 않더군요.
2024년 상반기에 두 작품이 하반기에 두 작품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중에서 이 책 한 권만이 올해 2월 번역되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2024년 상반기 수상작 중에서 <도롱뇽의 49일> 정도가 번역될 줄 알았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만 보고 전문 산악 등반을 다룬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하반기 작품들은 ‘팔기 힘든 상태’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막상 이 소설을 펼쳐 읽어 보니, 왜 번역되었는지 알겠더군요. 2020년대 수상작품 중에서 투톱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다카세 준코의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과 이 작품을 선택하겠습니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적 심리묘사의 탄탄함과 그로 인해 갖춰지는 서사의 중량감이 탁월하게 드러납니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매체는 ‘이미지’라는 ‘간접적 서술’ 방식을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을, 소설은 대놓고 직접적인 언어로 묘사합니다. 짧고 간결한 몇 문장만으로도, 복잡 미묘한 인물들의 심리를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죠. 그런데 이 두 작품은 그 작업이 무척이나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작품 전체를 꿰뚫는 서사는 기승전결의 뚜렷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몰입감이 높으며, 그 사건의 전개가 핍진하기에 ‘갈고리를 수집’하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겠지요.
무엇보다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게 일본소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시아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형성된 패거리문화 clique culture라는 공통점이 강하게 드러나서 거부감이 덜합니다. 인명과 지명만 한국식으로 바꿔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48쪽
베리에이션 루트(バリエーションルート, variation route). 베리 루트라는 표현도 쓴다고 한다. 평범한 등산로가 아닌 길, 요컨대 파선(破線) 루트라 불리는 고난도의 숙련자용 루트나 폐지된 길을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는 없지 않으려나. 좀 진귀한 루트를 두고 베리에이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또는 정해진 루트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계곡이나 능선을 따라가거나, 지형도를 보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곳 또는 오히려 못 올라갈 법한 곳을 나아가는 등 루트를 완전히 무시하고 산행하는-” 그런 걸 포함해서 베리에이션 루트라고 지칭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설명을 좀 더 보태려고, 작가는 등장인물인 ‘마키 씨’의 입을 빌어 몇 마디 더 보탭니다. “옛날 사람들은 산을 누비며 계곡이나 능선을 따라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냈으니, “베리에이션 루트에 도전하는 게 산행의 근본에 제일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의 등산은 잘 정비된 길이 이끄는 대로 편안히 걸어가는 것“이라서 베리에이션 루트에 도전하는 건 ”확실히 위험하고, 마쓰우라 씨처럼 개념 없다거나 자연을 훼손한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 덧붙입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하타 역시 ”지도에 실린 등산로로만 갈 수 있는 줄 알았고, 또한 지도에 실리지 않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 “고 여겼으니 말입니다.
사실, 베리에이션 루트 산행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상적이지 않으면서, 약간은 위험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취미 활동이면 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 중에 그런 것들이 여러 가지 있겠지요. 스케이트 보드, 스노 보드, BMX 중에 어떤 것으로 하프파이프를 탄다고 해도 괜찮을 터입니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다이빙 또는 프리다이빙이어도 안 될 건 없겠지요. 다만, 돈이 크게 들지 않고, 직장 생활과 병행 가능한 수준이 되어야 하니 앞의 예들이라면 모를까, 뒤쪽의 것들은 좀 힘들 듯합니다.
그저 ”혼자니까 좋은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필요한 도구와 지식을 갖추고 험난한 곳을 헤쳐나간다는 스릴에서 즐거움을 얻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그 고난과 가혹함을 이해해주지도 않으며, 누구에게도 칭찬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일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칫하면 위험한 짓을 멈춰라”라는 타박을 받을 일이면 그만인 것이죠. 그리하여 ’메가 씨‘가 “베리는 길이 맞느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야.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지. 갈 수 있으면 길인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면 적당한 겁니다. “애당초 이런 산행의 뭐가 재미있는 걸까”라는 회의에 빠져들 정도로 힘든 일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크게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을 경험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다가, “베리는 역시 혼자여야지. 혼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어.”와 같은 말에 “위화감, 응어리, 꺼끌꺼끌한 반감을 뱃속 깊이 느끼”게 돼서는, “자신이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니, 알려고 하지 않고 온종일 노”는 일이면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혼자 도전하면서 “신비한 고양감”이나, “깊이 잠드는 듯한 감각”. “쾌락에 가까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일이면 그만이었던 것이겠지요.
1인칭 시점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심리 묘사는 전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서사를 따라갈 때 답답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어서 생기는 긴장감‘을 형성하기 위해 적당한 지점에서는 1인칭 시점의 차단된 시야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서사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집니다. 다음의 묘사들이 그 예가 될 듯합니다.
65쪽
“요즘, 늦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있으니 아내가 침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담당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회사의 영업 방침과 함께 업무 내용이 달라졌다는 건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직장의 급격한 방침 전환이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찜찜하고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하타는 “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건축 사무소에 취직했다가 대형 리모델링 회사로 자리를 옮긴 지 약 10년”된 회사에서 “여러모로 만만치 않은 직장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했지만, “정리 해고 대상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로 옮겨온 것이죠. 직장 동료들과 교류가 없었던 것을 패인으로 분석한 터라, “최소한의 교류는 ‘매너’로 요구된다”는 생각으로 “마쓰우라 씨의 산행 계획에 참여”합니다.
하타의 사장은 지금까지의 영업 방식은 “이제 낡았다”라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전환합니다. 하지만 원도급사에 “당연히 써먹어야 할 자원처럼” 여겨지면서도 수주는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먹구구식의 지시”가 늘어나고 회사 방침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늘어납니다.
그런 전후 사정 속에서 위의 묘사가 이루어집니다. 하타가 겪어야 했던 재취업 시기의 불안이 현재의 불안과 겹치면서, 앞으로 반복될 수 있는 해고의 불안이 중첩되는 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봅니다.
131쪽
핸드폰을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하얗게 더러워진 가슴께를 털었다. 하지만 하얀 자국은 털어지지 않았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질러보았지만 역시 지워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외투 겉감이 쓸려서 거스러미처럼 일어났다. 내 옷 중에 제일 좋고 마음에 쏙 드는 진청색 외투, 어쩐지 기분이 축 처졌다.
“업무의 연장선” 상이라고 생각했던 산행 모임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취미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하타 역시 ‘장비병’에 걸립니다. “관련 지식이 쌓이자 아웃도어 브랜드에 관심이 생겼”고, “퇴근길에는 고베의 구 거류지에 늘어선 등산용품점에 들러 등산복과 장비를 구경”했으며, “그러자 일단 저렴한 가격으로 대충 구입한 등산복과 장비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종국에는 “용돈을 절약해 한 푼 두 푼 모으고, 등산용품 마니아인 마키 씨의 가르침을 받으며 옷과 장비를 조금씩 새롭게 갖췄”던 겁니다. 그렇게 장만한 “옷 중에 제일 좋고 마음에 쏙 드는” 것에 스크래치가 발생한 겁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복선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안 좋은 일을 겪고 난 뒤에, 그 일에 앞서 일어났던 사소하지만 깨름찍했던 일들을 반추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거스러미’가 거스러미로 끝나지 않을 복선이란 생각이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타는 다음과 같은 몹시 위험한 상황에 처합니다.
159쪽
설마 지금 메가 씨가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나는 나무줄기에 달라붙어 떨면서 어리석은 행동에 나섰던 나 자신을 새삼 원망했다.
이건, 이런 짓은 결국 여가 생활이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산에 놀러 왔다. 그런데 자청해서 위험한 곳에 들어왔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핫토리 과장은 위로는 고사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하고 불호령을 내릴 것이다. 아니,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눈앞에 닥친 위기가 문제다. 이 위기, 왜 이렇게 된 걸까. 짜증이 났다. 반발심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던 죽을 뻔한 위험에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자신이 죽는다면, “아내는 혼자 딸을 키우고, 딸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랄 뿐만 아니라, “사택에서도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직하느냐 마느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긴 산행 끝에, 하타는 폐렴이 걸립니다. 그래서 과장에게 “조심성 없는 내 태도와 투철하지 못한 직업의식을 실컷 비판”당하고, 욕을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봅니다. “또 처음부터 구직 활동에 나서야 한다”면 “약 4년의 짧은 근속 연수가 직무 경력에 새로이 추가되긴 하겠지만, 동시에 그만큼 나이를 먹었”고, “다음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사택에서도 나가야 하니, 그건 가족들에게도 못 할 짓”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 같은 초조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초조함과 불안도 생존 본능일 텐데, 그걸 느끼려고 노력하기를 몸이 거부하는 걸까” 자문하면서도 말입니다.
아무래도 메가 씨에게 퍼부었던 폭언이 하타 안의 자아를 바꾸어버린 것이겠지요. “말을 모조리 토해내고 나자 구토 후의 개운함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생각해 보면 메가 씨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다는 죄책감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산행 후반부에 나는 공포와 피로로 거의 착란을 일으킨 상태”였다며 자기 합리화를 해보지만, 그렇다고 하타가 폐렴으로 결근하는 동안 회사를 떠나버린 메가 씨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해소될 리는 없습니다. 그 ‘고구마 같은 감정’은 독자에게도 먹먹하게 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메가 씨가 ‘바리 산행’에 들고 다니던 ‘파란색 타탄 무늬 마스킹 테이프“를 발견하게 되면서, 여전히 베리에이션 루트를 개척하는 메가 씨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주인공 하타와 메가 씨 사이에 존재했던 불화, 그리하여 하타 내부에서 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자아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자아 사이의 불화가 해소됩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를 중얼거리며, 고구마를 꿀꺽 삼킬 수 있게 됩니다.
207쪽
골짜기를 둘러산 퍼진철쭉의 보랏빛이, 눈이 시릴 만큼 눈부셨다. 그중 가지 끝에 파란 꽃이 달린 퍼진철쭉 한 그루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아직 새것 같아 보이는 파란색 타탄 무늬 마스킹 테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