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우리가 접하는 극우에 대한 핸드북
제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읽어야 하나를 고민했던 책입니다만, 부제 ‘한국의 극우,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이 꽉 깨물고 한 번 펼쳐보자 마음먹었습니다. 막상 책을 집어 들고 보니 4X6판에 200페이지 남짓의 ‘핸드북’스러운 분량 덕분에 책장을 넘길 결심을 어렵잖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극우에 대한 학술적 검토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12.3 친위쿠데타 이후, ‘지금, 여기, 우리’가 경험하는 극우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아주 쉽게 써내려 간 대중서입니다. 그렇다 보니 일종의 정치서사와 같이 기술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반나절 진득하게 읽다 보면 마지막 책장까지 넘길 수 있다는 건 장점입니다. 그렇다고 극우의 학술적 개념이나 한국적 착종에 대해 허투루 분석한 것도 아닙니다. 학술서에서 보이는 정치한 개념 분석은 일부러 피했을 뿐, 다소 과할 정도로 찬찬히 필요한 논의를 빼먹지 않고 점검합니다. 그래서 핸드북이란 개념을 가져와서 제목을 삼기도 한 겁니다.
핸드북은 말 그대로 한 손에 쥐고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얇은 매뉴얼을 일컫기도 하지만, 학술서(monograph)의 한 종류로 과할 때는 몇 천 페이지에 이르는 한 질(帙)의 출판물을 일컫기도 한다. 특정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담는데, 일반적으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집필하며, 객관적인 사실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론적 배경, 최신 연구 동향, 그리고 향후 연구 방향을 제시한다. 옥스퍼드 핸드북이나 케임브리지 컴패니언(Cambridge Companion) 같은 시리즈가 유명하다고 한다.
[리뷰]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_앵거스 필립스 외: 출판의 미래는 말하지 못하는 ‘출판편람’
책을 읽기 전, 한국 사회의 극우에 대한 ‘좌파적 시각의 서사’를 정리해 봤었습니다. 일종의 편견 같은 것 말입니다.
해방정국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친일세력이 미군정과 결탁하면서 반공세력으로 변신을 꾀했고, 여기에 매판자본세력까지 가세하면서 ‘반공 친미’라는 기득권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더욱 강고하게 착종할 수 있었던 것은 군부독재와 결합해 독점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방정국 이후 1998년까지 50년간 이 땅의 지배 엘리트로 작동해 왔다. 흔히 보수라고 불리던 이 지배 엘리트들은 시작부터 ‘반동’적이었고, 이후 50년간에도 그 ‘반동성’을 담지했다. 그러다가 1997년 대선에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경험하며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이때 ‘한국 보수’는 처음으로 극우 기반의 반동적 행태를 정식으로 드러냈다. 이후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뉴라이트란 사상적 토대에서 변종 극우가 급성장했고, 박근혜 탄핵으로 극단화된 반동세력은 마침내 극우의 형태를 완성했다. 이때 극우세력에는 폭력적 DNA가 각인되었고, 마침내 윤석열 탄핵으로 그 폭력성을 발현하며 어엿한 ‘국제 기준의 극우’로 자리매김했다.
정리를 해놓고 보니, ‘훗, 나란 빨갱이, 편견이 좀 심하네~’란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 서사의 대강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어깨가 조금 으쓱거립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해방정국입니다. 구체제(일본제국)에 복무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그 체제가 전복되면서 축출의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만, 새롭게 성립한 신체제(미군정)는 이들 ‘경험 있는 지배 엘리트’를 중용했습니다.
127쪽
미군정은 미군에 우호적이면서 행정에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을 등용하며 안정을 찾았죠, 문제는 이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중의 반발이 심했죠. 그래도 미군정이 준 동아줄을 잡은 이들은 공직에 복귀했습니다. 이들은 친일 경력을 재포장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일한 게 아니고,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것이라고 말이죠. 반공은 이들에게 단순한 정치 구호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안위뿐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지켜줄 방패인 셈이었죠.
이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주의 통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우적 폭력을 통치수단으로 확립했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서북청년단이나 보도연맹과 같은 파시즘 장치를 활용해 극우 폭력을 일삼았고, 휴전 이후에도 ‘반공’을 활용해서 그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신진욱과 같은 학자는 1987년 체제로 인해 극우의 1단계가 발생했다고 본 것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1997년 대선 이후를 중요 단계로 인식합니다. 정부 수립 이후 50년간 단 한 번도 정권을 빼앗겨본 적 없었던 ‘한국의 극우적 보수’는 몹시 당혹스러운 일을 겪게 된 겁니다.
31쪽
진보 정치의 발전은 곧 보수 정치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그것도 유례없는 위기였죠. 남한 건국 이후 보수세력이 주도권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반격은 단순히 정권을 비판하거나 야당의 정치 공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보수세력은 ‘뉴라이트 New Right’라는 이름으로 정치사상운동을 시작하며, 반격의 방향을 전환했죠.
이 정권 교체는 향후 정국이 ‘민자당계 정당 vs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양당 체제로 재편되는 초석을 제공합니다. 양당제가 고착된 미국이나 영국의 상황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정치 지형도 그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 겁니다. 마이클 샌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노동당과 유럽의 사회민주당은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에게 기울어져 기술관료적 자유주의정당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피터 터친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민주당은 상위 1%를 위한 정당이 돼버렸고, 공화당은 포퓰리스트에게 잠식 돼버렸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그려내고 있는 양당 체제도 그리 다른 그림으로 보이지 않긴 합니다.
‘잃어버린 10년’ 이후, 채 10년도 정권을 지키지 못하고 자파 세력의 대통령을 탄핵으로 상실하게 되자, 극우는 더욱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진화했습니다.
71쪽
한국 극우의 성장은 반동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반발로 뉴라이트가 등장했던 것처럼, 이명박과 박근혜의 보수 정부에 대한 비판이 극우세력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실제로 박근혜의 탄핵 국면에서 한국 극우는 급성장했습니다. 기존의 정치 엘리트나 소수의 운동가 집단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시민들까지 포괄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한정된 공간에만 존재하던 극우가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형성한 것입니다.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점에서 뉴라이트가 태동합니다. “뉴라이트는 기존 이념 모두를 비판하며 대안적 세력으로 자신들을 규정하고자” 했지만, 종국에는 이영훈 등을 필두로 해서 친일 반민족주의적 사관을 기본으로, 기존 반일 민족주의 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점철했을 뿐이었습니다.
34쪽
민족주의를 빼앗긴 우파,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좌파의 묘한 대립이 한국 정치의 큰 흐름이었습니다. 우파로서는 뼈아픈 지점이죠. 탈민족주의가 뉴라이트의 이념적 해결책이었습니다. 대신 ‘국가주의’를 앞세워 보수의 민족주의 결핍을 극복하려 했죠. 민족주의를 “야만적 혈통 기준에서 비롯된 원천”이라고 비판하며, 민족보다 국가를 더 중요한 역사적 주체로 격상시켰습니다. 국가가 민족보다 발전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했죠. 이들은 특히 경제개발과 권위주의 정치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신자유주의 비전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뉴라이트는 “국가를 한국 민족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국가 지도자를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처누기 없는 결과가 오늘날의 ‘리박스쿨’ 같은 형태겠지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같은 장치를 이용해,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뉴라이트가 점잔 빼며 헛소리 bullshit을 만들어냈다면, 그 헛소리를 교조화해서 폭력적인 극우적 행동강령으로 해석해 낸 것은 어버이연합이었습니다.
39쪽
어버이연합의 활동은 종종 폭력적으로 변질됐고, 해방 직후 벌어진 극우 테러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2010년에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와 관련된 법적 판결이 무혐의로 끝나자, 어버이연합은 판사와 기자들의 자택 앞에서 위협적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견을 표현하는 시위를 넘어, 개인을 직접 겨냥한 압박 전술이었죠. 법치가 기본인 민주체제에서 판사에게 위협을 가한 겁니다. 2011년 ‘희망버스’ 사건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한국의 극우는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이 중심에는 태극기부대가 있었고요. “이들에게 사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박근혜 대통령은 결백하다는 결론에 필요한 억지와 선동”을 이어갔을 뿐입니다.
저자는 2016년 11월 19일에 열린 집회로 “극우가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했다”라고 평가합니다. 태극기부대도 이날 집회를 ‘태극기집회’의 시작으로 봅니다. “다양한 극우 조직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 단체들이 1만 명 이상의 참석자를 동원”했는데요, “군복을 입고 가스통을 든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이었고, 이는 “극우의 목소리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가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는 겁니다.
다만,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때쯤이 되자, 태극기부대의 극우적 폭력 성향은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래도 2025년 서부지법 폭동의 논리는 이때 완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80쪽
온라인상에도 극단적인 수사가 늘어났습니다.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탄핵이 확정되면 즉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 “탄핵은 반역 행위이며 군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나는 애국적 순교자로서 궁극적인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확정된 탄핵은 전쟁 상태로 이끌 것이다”라는 글들이 퍼졌습니다. 심지어 ‘청년 암살단’과 같은 이름을 내건 단체에 가입을 권유하는 게시물도 등장했습니다.
84쪽
탄기국 대변인 정광용은 “오늘 사람이 아스팔트에 피를 흘렸다. 저기 경찰차를 넘어가서 헌법재판소를 불태우기라도 합시다”라고 외쳤고, 손상대 대표는 “오늘 저 헌법재판소를 부숴야 됩니다. 오늘 청와대, 헌법재판소 우리가 다 접수합니다. 돌격”이라며 참가자들을 자극했습니다. 이러한 선동에 따라 집회 참가자들은 헌재로 몰려들었고, 일부는 헌재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충돌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경찰 버스에 올라가 태극기를 휘두르기도 했죠. 경찰 버스를 파손하며 경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기자들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날의 폭력적 시위로 3명의 시위자가 목숨을 잃었고, 33명의 경찰이 다쳤습니다.
저자는 “태극기부대의 부상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로, “불만, 고립, 그리고 조직적 동원의 조합이 작동해 성장”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빠르게 결집했고, 효과적으로 힘을 모았”다고 봤습니다.
“이들의 목소리와 분노를 대변할 제도권 정치세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태극기부대는 “제도권 테두리에서 답을 찾아야” 했고, 자연스레 거리로 나갔다는 겁니다. 다만 이 상황에서 ‘에스더기도운동’, 박사모, 대한애국당 등의 지도자 네트워크가 작동하면서 ‘조직된 활동’이 가능했습니다.
무엇보다 “촛불 시위 참가자들이 사용했던 전략을 받아 들”임으로써 더욱 성공적일 수 있었습니다.
179쪽
태극기집회도 이런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축제적인 요소가 강조됐죠. 음악은 집회의 중요한 요소가 됐습니다. 대규모 행사에서는 전문공연자들이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띄웠고, 소규모 집회에서는 개별 공연자가 노래 몇 곡을 부르며 참가자들이 호응을 유도했습니다. 심지어 연설자들까지 가끔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달궜죠.
한 참석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와요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거든요. 이렇게 친구들도 만나고 자주 볼 수 있어 좋죠.”
여기에 상징 동원도 성공적이었습니다. 2016년 11월 19일, 첫 번째 시위에서 이들은 촛불시위 참가자들과 차별을 두려고 태극기를 내세웠습니다. 태극기는 “이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강화하는 역할”을 확실히 수행하며, “자긍심을 높여주고, 대오를 유지하는 기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성조기가 보태졌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했고,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반향실 효과를 가져온 “카카오톡과 유튜브는 태극기부대의 정치적 관점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보수 정치인의 콘텐츠를 공유하고, 민주당을 비판하는 내용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전파”했습니다.
저자는 태극기부대를 결속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정치적 신념은 “박씨 가문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이라고 말합니다. 태극기부대는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시기를 살아낸 자신들이 “가난과 긴 노동시간을 견뎌내며 나라를 변화시켰다는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헤겔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인정 투쟁’이 되는 셈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태극기부대는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입니다. “권위주의란 자신이 가진 권위를 내세워 통솔 대상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약화했습니다만, 태극기부대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권위주의를 옹호한다는 겁니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권위/전복이라고 말합니다. 권위는 질서유지와 혼란 방지를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이미 형성된 질서를 지탱하고 나아가 중요한 직위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 도덕 기반에 민감한 것이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태극기부대는 법치주의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행태는 “권력자가 자기 뜻과 입맛에 맞게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필요할 경우 이를 고치거나 심지어 무시하는 것”입니다. 태극기부대의 법치주의 경시는 그들의 활동 초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반공주의는 한국 보수층의 흔한 정서입니다만 여기에 친미가 더해집니다. “미국 덕에 살았다,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보호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들에게 한미 군사동맹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등식이 극우의 멘탈리티에 존재합니다.
그렇다 보니, 작년에 왔던 휴거론이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것처럼, 미국개입론은 반복 재생됐습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맏형이니 빨갱이와 싸우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박근혜를 버리겠냐”던 믿음은 윤석열에 이르러서는 막가(MKMA)를 외치며 미국 항모 타령으로 이어진 것이겠지요. 이런 헛된 믿음이 들어선 것은 “평생 미국을 이상적인 나라로 배워왔고, 자유와 번영을 보장하는 절대적 후원자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극우란 극단주의 우파를 이르기에, 극단주의와 우파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말이지요. 저자는 “배타적 민족주의, 반엘리트, 반국제화주의, 그리고 권위주의”를 극우의 특성으로 파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술적 개념에 대해서 보다 정치한 접근을 한 신진욱의 글을 먼저 살펴봤었기에, 큰 도움을 얻기도 했습니다.
145쪽
극우는 먼저 ‘우리’(기독교 유럽인)를 정의합니다. 자연히 ‘그들’(무슬림 침입자)은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내부의 적, 즉 ‘배신자’(정부, 유럽연합)도 등장합니다. 반대로, 이 모든 혼란을 해결할 영웅(오르반)도 필요하죠.
하지만 한국 극우 세력은 민족주의를 좌파에게 빼앗겼기에,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국제주의적 태도가 덜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극우는 ‘새로운 민족 개념’을 정립합니다.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성장해 온 반공세력이 곧 민족”이라서. “우리 편은 반공세력이고, 반대편은 공산주의세력”으로 우리와 그들이 나뉩니다. 당연히 미국은 ‘우리’에 포섭하기에, 반공과 친미를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개념이 됩니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좌우, 진보/보수할 것 없이 모두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가 강한 한국의 보수는 개인의 자유도 그리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반공과 친미는 “한국 우파의 핵심 가치이자 극우의 가치”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한국의 극우가 12.3 쿠데타 이후 확실히 변했습니다. “인종차별과 청년의 참여”로 어엿한 국제적 극우의 양태를 완성합니다. “혐오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며, 청년층의 불만과 소외감을 정치화”합니다. “‘외국인 혐오’는 단지 낙오한 중장년층의 정서가 아니라, 청년들 사이에서도 ‘공정’과 ‘역차별’이라는 말로 포장되며 퍼지고 있”습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인지를 분명히 나눈 뒤, 사실보다는 감정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