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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오르 즈미그로드_이데올로기 브레인

이데올로기에 절은 뇌는 답이 없다

by 안철

레오르 즈미그로드, 『이데올로기 브레인』, 김아림 옮김, 어크로스, 2025.

Leor Zmigrod, The Ideological Brain: The Radical Science of Flexible Thinking, Viking. 2025.



1. 이 책은 무엇을 다루나?

10쪽
이 책은 신경과학과 정치학, 철학을 한데 엮어 독단적 신조에 휩싸인 인간이 미친 듯 몰아치는 온갖 교설 사이에서 살아남고자 애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도전적인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데올로기와 경직된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때 생겨나는 위험을 재해석하도록 일깨워주는 새롭고 급진적인 과학을 전한다”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정치가 단지 피상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몸속 세포 차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고도 말합니다.


최근 한 달 사이 세 권의 심리학 책을 읽었습니다. 존 히빙 등의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이어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읽었고, 예상외의 소득이라 할 수 있는 오시오 아쓰시의 『빌런의 심리학』을 읽으면서, 심리학과 정치 성향 사이의 일관된 상관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우연히 도서관 신착도서 서가에서 발견한 이 책에도 눈길이 가더군요.

앞선 책들은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심리학 이외의 생물학적 요소들이 정치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그 상관관계가 인과관계일 수는 없다. 셋째 심지어 유전적인 요인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 하기 나름이다.

재밌는 건 이 책도 이런 결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원문을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번역된 문장만으로도 저자의 문장은 꽤나 조잡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대중서의 작법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부족할 때, 이런 식의 문장들이 나오게 되더군요.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나 『불안 세대』의 번역이 조잡하다고 해도, 그의 원문장이 얼마나 쉽게 쓰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차까지도 탄탄한 이유이기도 하죠. 오시오 아쓰시의 『빌런의 심리학』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책은 번역까지도 조잡합니다. 너무 충실한 직역이 군더더기가 심한 원문만큼이나 난잡합니다.



2.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이데올로기와 사상의 차이는 뭐야?”

언제나처럼 이데올로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지식 착각 illusioin of knowledge’을 깨달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회의가 일어날 쯤에 저자의 너무 친절해서 ‘쓸데없이 고퀄’인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지더군요. 이데올로기 개념의 변천을 드트라시(De Tracy)에서 시작해 나폴레옹, 마르크스와 엥겔스, 만하임, 그리고 그람시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기억하려고 챗GPT에게 따로 정리시켜 봤습니다.

ⓐ 앙토니 데스튀트 드트라시(Antoine Destutt de Tracy, 1754–1836)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용어는 프랑스 계몽주의 후기에 드트라시에 의해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관념의 과학(science of ideas)’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감각 경험에서 기원한 관념들의 체계적 분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험론적 토대 위에서 관념의 발생·구성·작용을 탐구하는 합리적 학문으로,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전통 속에서 인간의 사고와 사회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였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
나폴레옹은 드트라시와 그의 동료들을 ‘이데올로그’라고 비난하며, 이들의 관념학을 현실 정치와 동떨어진 추상적 공상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실천적 정치와 동떨어진 허황된 이론’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했고, 이로써 이 개념은 원래의 과학적 의미에서 벗어나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체계’를 지칭하는 멸칭으로 전유했다.

ⓒ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 전체에 지배적인 사상으로 확산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잘못된 생각이나 공상적 이론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토대(생산관계) 위에서 형성되는 지배적 관념 체계였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유가 사회적 존재 방식, 특히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관념을 사회 전체에 주입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이데올로기를 사회 구조와 계급 지배를 설명하는 도구로 만든 결정적 전환이었다.

ⓓ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심화시켰다. 그는 모든 지적 활동이 사회적 맥락에 의존한다는 ‘사상 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의 틀 안에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했다.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를 두 가지 차원에서 구분했다.
- 특수 이데올로기(particular ideology):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된 관념.
- 총체 이데올로기(total ideology): 한 사회 집단 전체가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나 세계관.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으로 환원하지 않고, 지식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히려 했다. 그는 특히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사고방식 차이를 통해 사회적 변동을 이해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회학적 지식론의 핵심 범주로 확장했다.

ⓔ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데올로기 개념을 더욱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지배가 단순히 강제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도덕적·지적 지도력(헤게모니, hegemony)을 통해 정당화되고 내면화된다고 보았다.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핵심 매개였다. 지배계급은 교육, 종교, 언론, 문화 제도 등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상식(common sense)’으로 자리 잡게 만들고, 피지배계급은 이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람시는 동시에 피지배계급이 ‘대항 헤게모니(counter-hegemony)’를 형성하여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지배의 도구를 넘어, 저항과 변혁의 가능성이 열리는 장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개념 변천사를 훑어본 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83쪽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정의가 비대해진 나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확장되어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였다. 이데올로기는 지배, 권력, 문화의 개념으로 흘러들었다. 어떤 행동이나 생각,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그것이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화를 내며 가리킬 수 있었다.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에서 개념의 정의는 무척 중요합니다. 따라서 연구 대상이 되는 개념은 조작적 정의 operational definition을 정립하기 마련입니다만, 이 책에서 엄밀한 의미의 조작적 정의를 가져오진 않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저자가 이데올로기에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만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23쪽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내러티브이다. 그것도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가 “우리의 질문, 우리가 따를 대본, 우리가 속할 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나 자신도 이해받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해 주는 빠른 지름길”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뇌는 은밀하고도 깊게 이데올로기에 대한 세뇌를 체화하는 법을 배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한번 이데올로기가 각인되면 모래에 그린 그림과는 달리 지우기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우리 뇌는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주변 환경으로부터 무언가를 쉽게 배우는 대단한 기관”이라서 “교조적 체계에 푹 빠지면 그것에 따르는 경직성을 받아들인다”설명합니다. 이렇게 “규칙과 의식을 거듭 반복하다 보면 우리의 정신은 무뎌진다”는 거죠. 그리하여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몰입한 사람은 정치적 의견과 도덕적 취향뿐만 아니라 뇌 전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조각될 위험이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3. 뇌과학,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A Chicken-and-Egg Problem

133쪽
정치에 대한 신경과학에서 이 닭과 달걀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정치적인 사고를 평가할 때 그 순간의 스냅사진을 단 한 장만 얻는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앞서 언급한 세 권의 심리학 책에서도 줄기차게 언급했던 것이, 인간의 심리는 하나의 연속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공명영상(MRI)처럼, 하나의 단층 사진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 영상의 상호 관계 속에서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Nature vs Nurture’의 논란은 종국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하나마나하면서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로 돌아갑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기술로 집약됩니다.

149쪽
가족은 생물학적,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의식, 세계관은 세대를 넘나들며 반복되고, 복제되고, 재활용된다. 이데올로기에 정통해지는 것은 끊임없는 학습과 선택의 결과물이다. 대물림은 종종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대물림받는 쪽이 내용을 수정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 보니 “유전자는 서로 얽혀 상호 작용한다”라고 주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은 특정한 습관에 대한 훈련을 받는 것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습관을 반복해서 수행하면 모종의 결과가 발생”하는데, “반복하면 할수록 습관은 더욱 고착화”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열정적으로 의식을 반복할수록 우리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한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리하여 “후성유전학에 따라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이 출현하는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변할 수 있게 됩니다. “극단주의의 후성유전학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기본 전제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북돋는다”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은 독단주의가 생물학적 취약성의 산물이거나 세뇌의 결과라는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라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 배타적인 인과관계를 고려하는 대신 역학과 상호작용을 살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4. 이데올로기적 브레인

가. 이데올로기적 브레인은 어떻게 생기나

저자는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은 엄격한 교리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교리를 엄격하게 고수하고, 되도록 새로운 증거에 비추어 신념을 업데이트하지 않으려 저항하며, 내집단과 외집단 구성원의 정체성에 철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측에 능한 우리의 뇌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삶을 알아낼 규칙이나 논리, 습관을 찾는다”라고 합니다만, 이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그 사이의 온갖 회색 지대를 살피려면 끊임없는 고군분투가 필요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은 엄청나게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답을 쉽게 정해주니까요.

이렇게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뇌는 사고방식이 경직되고, 감정도 잘 조절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생리적으로 불공정과 손상에 덜 민감하며 신경생물학적으로 습관에 중독되고, 모든 대상을 이분법으로 분류하려 든다”고도 설명합니다.


나. 이데올로기적 브레인의 위험성

① 수단의 정당화

저자는 “사람들의 삶이 집단 간의 싸움이라고 여기는 게 이데올로기의 전제라면, 모든 것은 희소한 자원을 얻기 위한 실존적 투쟁이자 지배력과 자기 결정권을 위한 투쟁으로 인식된다”면서, 따라서 “승리로 이어지는 모든 행동은 합법적으로 용인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열광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어째서 행동이 필요한지 설명하고 그에 따르는 불쾌한 결과를 변명”하는 긴급한 논리에 따르다 보면, 승리로 이어지는 모든 행동이 용인된다는 거죠.

특히나 “이데올로기는 해석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에,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려 들면 모든 지각 경험은 그 교리에 맞아떨어지는 의미에 종속”됩니다. “세계를 직접 경험하기보다는, 미리 정해진 의미에 맞게 모호함을 피하며 진정성 없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② 배타적 정체성

저자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이 제공하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칼같이 구분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내집단과 외집단의 차이가 생기면, 내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배타적 정체성 exclusive identity이라는 범주를 통해, “비순응자는 거부되거나 외면당하고, 적대와 편견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집단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얻고자 구성원들이 일회성 의식뿐 아니라 되풀이되는 의식에도 참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거의 모든 이데올로기 집단이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험하도록 피를 흘리거나 스스로 고통을 가하는 의식을 치르게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깃발이나 상징, 노래, 국가, 의상, 의식 같은 독특한 정체성의 표식을 만드는 과정”이 이루어지는데요, “이러한 표식을 공유하고 겉으로 드러내다 보면 이데올로기 집단에 대해 더 열성으로 몰입하게 되고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이 한층 짙어진다”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깃발이 찢어지거나 상징물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더 나아가 누군가를 살해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특히나 인지적 경직성이 강할수록, 그러니까 융통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집단일수록 타인에게 쉽게 해를 끼치고, 기꺼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도 봤습니다.

또한 “인종, 불평등, 사회적 계층 질서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정치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사람 얼굴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뇌의 가장 근본적인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스며들”어서, 차별과 비인간화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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