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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릴리 출리아라키_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부당취급: 피해자성의 무기화"

by 안철

릴리 출리아라키,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 성원 옮김, 은행나무, 2025년.

Lilie Chouliaraki, Wronged: The Weaponization of Victimhoo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1. 저자는 왜 책을 쓰고, 나는 왜 책을 읽는가?

13쪽
2019~2022년이라는 중요한 3년 동안 쓴 이 책은 북반구에서 불평등과 권력에 관한 시급한 도전 과제들을, 그중에서도 극우 포퓰리즘과 그 세력이 벌이는 문화 전쟁이 우려 속에 고개를 들고, 피해자성 victimhood 서사가 체계적으로 무기화되고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잔인함의 정치에 이바지하는 현상을 조명한다. 또한 미투 Me too와 흑인목숨도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같은 운동에서 나온 목소리, 권리, 자유, 정의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들이 서구뿐만 아니라 서구와 남반구 사에에 존재하는 인종, 젠더, 계급의 역사적인 위계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거의 사회구조와 현재의 사회구조 사이의 균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타난 연속성 역시 조명한다.
이런 것들이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룰 주제의 일부다.

대부분의 책들은 유수한 글쓰기 전통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머리말(서문 또는 preface)을 통해 왜 이 책을 쓰는지, 그리하여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곤 하죠. 그래서 머리말을 읽는 것만으로 그 책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점점 그런 머리말을 보기 어렵고, 대충 구색 맞추기 글이 의미 없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의 머리말은 본연의 기능을 다하고 있더군요.

이 책에서 저자는 “피해자성을 둘러싼 공적 소통의 함정을 파악하는 방법”에 주목합니다. 이를 위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이런 목소리가 등장하게 된 더 넓은 맥락의 교차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고통을 호소할 수 있지만 불평등이 구조화된 서구 사회에서는 “취약성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발언권을 얻기 어렵다”고도 지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리는 곳은 힘 있는 자들의 고통, 그중에서도 대체로 백인 남성의 고통”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피해자성에 관한 소통에서 관건은 취약성이 아니라 특권이 된다”는 점도 주목합니다.

저자는 “이 여정의 이론적 동반자”로 여러 사람을 호명하지만, 주목할 수 있는 이들은 네 명 정도가 될 듯합니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에바 일루즈 Eva Illouz, 웬디 브라운 Wendy Brown,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가 그들입니다. 저자 본인이 페미니즘의 지평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동원되는 이론이나 학자들 자체가 페미니즘과 가까운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웠고, 이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제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담론이라서 그렇습니다. 늘 그랬듯이, 거의 ‘약탈에 가까운 피해자성의 전유’를 경험할 때마다, 이 ‘납작한 논리’들의 민낯을 드러내고 이들을 작동시키는 수사학 rhetoric의 비열함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이 공부할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페니미즘 이론의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만,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부지런히 답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죠.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원하는 답을 찾아내기에는, 저란 아재의 미소지니는 엄청났으니까요. 남근중심주의자 ‘그 잡체’인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어쩌지 못해서, 게으름을 피운 겁니다. 그런 부끄러운 수준의 나태함 끝에 이런 기연이 찾아와 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네요. 사이다 한 잔 시원하게 마신 듯, 청량감이 대단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속 편히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여전히 납작한 논리로 무장한 납작한 말들은 계속될 테니까요. 무논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레토릭, “그래서 뭐 어쩌라고?”가 나오면, 논리로 무장한 지성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말싸움 판에 각목 휘두르며 깽판을 치기 시작하는데, 답은 없으니까요. 그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조금이나마 ‘논리적 우월성’을 느끼는 자기만족이 조금 늘 뿐이겠지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습니다. “응, 너도 뇌피셜~”이란 저 너머 참호에서 들리는 개소리에 조금은 더 당당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2. 무엇이 피해자성 Victimhood인가?

피해자와 피해자성을 논하기에 앞서, 무언가 껄끄러운 것이 머릿속을 맴돌다, 툭 하고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가야트라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논의에서 시작된 그 담론, 사회적 약자들 그 자체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발화할 수 있는 구조 안에 놓여 있느냐의 문제 말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발화’에서 정치적 경합을 통해 우위를 점한 세력에 의해 ‘목소리’를 장악당한다면, 그 “구조적으로 폭력에 취약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남근중심주의에 찌든 아재일지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좌파인 입장에선 가슴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갈등을 드러내고, 그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 정치이기 때문에, 피해자성을 다룰 때도 정치학이 개입할 수밖에 없음 또한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그저 “아닌 건 아닌 것”이란 단순하고도 명확한 윤리적 문제로 동의가 이루어질 수 없고, 더 많은 정치권력을 확보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부당하게 ‘착취’를 일삼는다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정의로서의 정의’가 훼손되고, 작동하지 않는 윤리학을 고치기 위해 정치철학이 개입해야만 합니다. 어질어질해집니다.

그다음으로 또 혼돈을 일으키는 것은 ‘역어의 선택’입니다. victim의 역어로 피해자를 쓰는 것은 보편적입니다. 범죄학 criminology의 반대편에서 형성된 학문으로서의 피해자학 victimology에서도 피해자의 개념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전재민(戰災民, war victim)이나 이재민(罹災民, disaster victim)에서 살펴봐도, 피해자의 개념은 ‘피해를 입은 사실적 존재’라는 개념은 같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등장하는 개념의 역어에서 혼동을 가져옵니다. victimhood나 victim mentality에 대한 역어는 피해자다움, 피해자의식, 피해자성 등으로 여전히 유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으로, 피해자다움, 피해자의식, 피해자성에 대한 영어 선택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 보니, 이 책에서 선택한 역어 피해자성 역시 개념의 이해에 대한 ‘작은 벽’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한국어 역어가 아니라, victimhood라는 영어 그 자체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조금... 엿같습니다. ^^


29쪽
오늘날 피해자성을 둘러싼 논쟁은 진실 공방, 즉 고통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라는 문제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그보다는 사회구조적 취약성을 특권을 가진 자의 고충과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고통의 용법을 어떻게 취약한 자들을 위한 것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진실과 정의는 당연히 항상 뒤얽혀 있고, 진실이 없으면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도 존재한다. 진실의 문제는 법정과 그 진위 검층 규칙, 또는 언론과 그 사실확인 의례 같은 제도적 승인이라는 인식론적 영역에 속한다. 정의의 문제는 누가 목소리 voice라는 특권을 가지는가, 누가 자신의 고통을 지배적인 고통으로, 즉 “진실된 true” 고통으로 확립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을 더 크게 발화했을 때-공적 담론에서든, 집단기억에서든, 정치적 수사에서든-누가 이익을 얻는가를 둘러싼 사회적 경합이라는 정치적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진위에만 관심을 쏟을 경우 권력과 거기에 연결된 특권을 무시하게 되고, 이는 구조적으로 폭력에 취약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저자는 20세기 피해자성의 의미 전환은 “서구의 근대성이 종교적 집단주의에서 세속적 개인주의로 방향을 바꾼 더 넓은 맥락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피해자성은 “나의 고통이라는 지배적인 개인주의 담론과, 공동체 전체의 우려라는 이름으로 발언하는 집단주의 담론 모두에 발을 담그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로런스 그로스버그 Lawrence Grossberg의 주장을 원용하며, 21세기 피해자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부자와 빈자, 특권층과 취약층 사이의 간극을 물질적으로 지탱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계층에게 심각한 감정적 피해를 입혀 자신은 피해자라는 인식을 고착화한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유주의가 “가부장적 폭력을 증언하는 여성을 향한 사악한 남성 쇼비니스트 male chauvinist의 공격”을 통해 억울한 피해자성을 양산한다고 봅니다.


또한 트라우마와 인권이라는 고통의 두 ‘거대언어 grand language’는 “주장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고 정치 공동체를 집결하는 힘을 가진 개개의 취약성이라는 피해자성에 대한 오늘날의 정의를 빚어냈다”라고 분석합니다.

트라우마를 입은 자아는 “고통받는 사람을 공감받아 마땅한 공적인 인물로 여기는 정신분석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을 근거로 한 고통의 언어는 오늘날 치유문화라는 형태로 서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으나, “고통의 언어는 정신건강과 안녕에 대해서는 정당한 이야기를 할지 몰라도, 인종화되고 상업화된 맥락에서 피해자성을 수행하여 고난의 구조적 조건을 탈정치화하고 미디어의 이익을 위해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든다”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언어인 인권의 언어는 “상해를 입은 자아”와 관련이 있습니다. “혁명의 서사처럼 불의에 대한 의문과 저항을 동원하거나 개혁의 서사처럼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실용적인 개입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권리의 언어는 글로벌 권력의 신식민주의적 관계를 영속시키고, 상업화된 온라인 행동주의 체제 안에서 고통의 정치적 함의를 삭제한다”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저자는 “피해자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고통의 정치’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정치에 참여하는 소통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피해자는 고정된 특정 사람이 아니라, 자아가 고난에 처했다는 주장을 통해 바로 그 순간 취약한 존재로 생성되는 반복적인 발화행위자”이며, “피해자성을 공적 담론에서 일종의 투쟁 현장으로 만드는 것은 트라우마 또는 상해의 주장들이 즐비한 가운데 새로운 자아를 드러냄으로써 그 주위에 있는 다양한 인정의 공동체를 불러내는 수행적인 역량”이라고 재정의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성도 재정의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고통의 주장들은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와 상품화된 행동주의에 장악”되어, “피해자성이라는 반복적인 과정의 핵심에 자리한 ‘피해자’는 어떤 본질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의미의 다양한 체결에 열린 의미론적 범부로 존재하며, 따라서 상해의 감정과 트라우마의 감정을 뒤섞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역전시키고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고통의 플랫폼화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고통의 주장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누구의 주장이 가장 큰 가시성을 획득하며,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가 정당성과 힘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지에 영향을 주어 고통의 의사소통 정치를 깊숙이 재조직”합니다. 이때 “자동화된 익명의 연결성을 가능케 하는 플랫폼의 능력은 고통의 주장들이 그 출현 조건과는 단절된 채 온라인에서 경쟁적으로 확산하고, 나아가 고통을 받는 사람과 가해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교란되는 상황을 초래”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이럴리티 virality를 추구하는 플랫폼의 성향은 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 주장들이 어떤 폭력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는지는 묻지 않은 채 이미 인기 있는 고난의 주장들은 계속 증폭”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리하여 태미 어맨다 저코비 Tami Amanda Jacoby의 지적처럼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은 상해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일이 아니라 권리이고, 심지어는 특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라고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피해자성이 기존 권력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이런 사례들은 인종과 젠더가 실제 고통의 경험에서는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하고 가부장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고통의 소통에서는 여전히 은폐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신체와 고통 사이의 불연속성 또는 탈구”로, “가장 고통받는 신체가 자신의 고난을 발화할 능력을 필연적으로 갖추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고통의 언어는 항상 더 많은 상징자본을 가진 다른 신체에 의해 전유될 수 있는데, 가장 고통받는 이들이 고통의 언어에 접근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저자는 젠더, 계급, 인종에서 ‘프로라이프’ 판결로 이를 예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피해자성은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과는 무관한 특정 형태의 정치 행위, 바로 고통의 정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게 “일부 신체에 자신의 고통을 발화할 능력을 선택적으로 부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정당화, 구원, 비판 등 다양한 서사를 사용하여 그 신체에 더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 ‘가해자의 신체’에는 인간으로서의 권위와 감정의 대상이 될 자격을 부여하고, ‘피해자의 시체’로부터는 인간의 자격을 박탈하고 삭제한다는 것이죠.

이때 감정자본주의는 “고난에 처한 자아에게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도덕적 주체의 자격을 부여하는 고통·트라우마·권리의 언어를 통해 출현한 정동적인 소통의 정치라는 토대 위에 성립”합니다. 이 도덕적 주체는 “자신을 위해 성공적으로 피해자성을 주장함으로써 상징자본을 축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피해자 정의에 맞지 않는 사람을 지우고 자체적인 배제를 생성”합니다.



3. 누가 피해자였고, 이제는 누가 피해자인가?

리뷰를 정리하다가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왜 피해자성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중에 피해자를 이야기하는지 말입니다. 피해자성이 부정되면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고, 피해자성이 날조될 수 있다면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제인 “부당취급: 피해자성의 무기화”가 “가해자는 모두 피해자라 말한다”로 바뀐 이유 역시 설명됩니다.


오랜 기간 피해자 개념의 중심에는 ‘전쟁에 참여했던 백인 남성’이 존재해 왔다고 분석합니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적 사고에 근간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논의가 시작됐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18세기 공감문화와 19세기 문학적 낭만주의 전통에서 변화가 일어나, 자아는 처음으로 언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피해자 분석이 19세기 남북전쟁이나 20세기 초 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그 맥락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요.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양상이 변화한 “산업화된 전쟁 industrialized war에서 남성의 정신적 붕괴는 경악스러운 사건이었고, 재남성화 remasculinization가 시급히 요구하는 사태였음”을 강조합니다. “취약성이 인류의 보편적인 속성이 아니라 20세기 근대성의 전형적 피해자로서 백인 남성에게 특별하게 주어진 자격”으로, “백인 남성은 싸우다가 고통받고, 살해하다가 고통받고, 보호하다가 살해하고, 보호를 위해 고통받는다”는 사고 위에 개념을 축조했다는 겁니다. 그 토대 위에서 “서구 남성 자아가 근본적으로 선하고 오직 우발적으로만 나쁘며 자신이 저지른 모든 폭력 때문에 전문적인 의학적 처치와 공감을 받아 마땅한 유일한 행위자”라는 개념을 유지·온존 시킨다는 겁니다. 이렇게 “증언의 자격”을 부여받은 백인 남성 중심의 피해자 담론이 여성, 백인 이외의 인종에 대한 인종화된 피해자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여기에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저자는 “고난에 처한 존재로서의 ‘국민’에 의지하는 포퓰리즘은 트라우마와 상해의 언어를 상징적 촉매로 동원하여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고통의 의사소통 정치가 역사적으로 특정하게 발현된 모습”이라고 비판합니다. 그 예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 하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보리스 존슨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고통을 소통하는 세 가지 전략을 채택했고, 이 전략들이 힘을 모아 국민들의 고난을 무시하고 일부 특권층에게 피해자성을 귀착시키고자 했다고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역전된 피해자성 reverse vicimhood”이 나타났고, 이로써 공동체는 더 큰 위험에 노출됐다고 말합니다.

이때 동원된 포퓰리즘의 세 가지 전략은 정상상태화, 군사작전화, 혼란초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상상태화의 접근법에 따르면, “세상이 ‘정상’인 상태로 유지되는 한, 사람들에게 방역조치를 취하고 목숨을 지키도록 독려하는 일체의 시도는 불필요하거나 공포를 유발할 뿐”입니다. 정상상태화의 렌즈 아래에서는 되레 “바이러스가 아니라 방역조치들이 고통의 한 형태이자 정상적인 삶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겁니다.

군사작전화 담론에서는 “사람들의 고난을 탈감정화 de-emotionalizing 했고 이로써 공적 소통에서 위한 구원의 서사들이 설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이때 우리/그들로 전선을 나누는 포퓰리즘의 전략은 “‘우리’와 ‘대중을 억압하는 공중보건 전문가 및 조치들’ 사이에 새로운 적대감을 조장하여 팬데믹의 경험을 재감정화 re-emotionalizing”했습니다. 이런 전략을 통해, “구원의 서사는 고통의 언어를 억압하고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소수인종, 이민자, 최전방 노동자-과 임상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비방하기까지 하는 편협한 국가주의적 서사가 되었다”라고 분석합니다.

혼란초래 전략은 “단순히 정부의 실책이라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고 진실의 자리를 선언적인 서사에 대한 감정적 몰입으로 대체하기 위해 거짓, 반쪽자리 진실, 조작된 사실을 의도적으로 활용”합니다. “팬데믹 시기의 제한조치들을 자유의 회복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고통의 한 형태로 파악했다. 이렇게 권리의 언어를 전유함으로써 제한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팬데믹의 진정한 피해자로 그렸”습니다. 이렇게 “가짜 이야기가 갖는 감정적 호소력에 중점을 두는 것은 ‘감정-진실 emo-truths’을 확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레오르 즈미그로드가 지적했듯이, 이데올로지컬 브레인은 사실이 아니어도, ‘원하는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합니다.



4. 피해자성은 어떻게 빼앗기는가?

엘리트들이 고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는 “반피해자주의 antivictimism”라고 부릅니다. 앨리슨 콜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 정치를 연구하면서 극우 세력이 피해자성을 무기화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극우 세력이 인종의 정치, 페미니즘, 그 외 저항적인 정치들을 계속해서 흠집 내기 위해, 새로운 피해자 집단을 고안하고 선전함으로써 자기 고유의 피해자성 브랜드를 내세운다”라고 말입니다.

이 반피해자주의의 뿌리는 1960년대 중반의 미국 민권운동과 페미니즘 투쟁 이후 그때까지 배제되었던 집단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진 법적·사회적 개혁에 대한 반동적인 불만에서 찾는다고 합니다. “보수적이고 백인우월주의적인 일부 중간계급들은 이런 운동들 덕에 흑인과 여성을 민주적으로 포용하는 방향으로 사회구조가 확장된 것에 억울함을 느끼고, 피억압집단들이 ‘피해자성 카드놀이’를 한다고 공격하면서 대신 자신들을 시스템의 ‘진정한 피해자’로 내세웠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극우 세력의 반피해자주의는 “권리의 언어를 강탈함으로써 취약집단의 생존권을 도외시한 채 고통의 주장을 자신들의 구원의 서사에 갖다 붙인다”라고 분석합니다. 트럼프와 존슨의 코로나 팬데믹 하에서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역시 “국민을 피해자라고 부르면서도 수많은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네크로포퓰리즘적 정서를 부추겼다”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잔인함의 정치’입니다.

잔임함의 정치는 “고통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을 통해서든, 현실을 왜곡하고 울분을 토로하는 백인 공동체를 자극하는 방식을 통해서든 신자유주의적인 고통의 플랫폼화를 이용하여 새로운 방식의 피해를 양산”합니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 Félix Guattari가 언급한 미시파시즘 microfascim을 원용하건, 엔조 트라베르소 Enzo Traverso가 언급한 포스트파시즘 postfascism을 활용하건, 이런 방식의 이데올로기는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상에서 핵심적으로 활용되는 ‘잔인함의 정치’가 취하는 화법 몇 가지를 정리하면, 바로 ⓐ기득권 중심의 공감, ⓑ이상화, ⓒ언어적 역전, ⓓ의미의 탈맥락화, ⓔ완곡어법, ⓕ일시적 투사, ⓖ보편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번 독서에서 제가 거둔 가장 큰 성취라면, 이 ‘잔인함의 상징적 화법’에 대한 분석이라고 봅니다.


ⓐ 기득권 중심의 공감

191쪽
이 용어는 이미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취약한 “타자”에게 폭력과 위해를 가한 상황에서 특권층에게 동정 여론이 쏠리는 상황을 일컫는다.
케이트 만이 말한 “힘퍼시 himpathy의 사례라 할 수 있는 기득권 중심의 공감은 고통의 정치에 내재한 남성중심적 편향을 부각한다. 이 편향은 ”특권적 지위를 가진 (주로 백인인) 남성이 자신은 여성의 거짓된 성폭력/성적 괴롭힘 고발에 당한 피해자라고(또는 그것에 취약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피해자성의 망토를 뒤집어쓰면서 동원하는 수사학적 견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아가 이런 피해상의 서사들은 남성의 감정 하나하나에는 관심을 보내면서 그의 문제와 연관된 여성들에게는 연민을 거둬들임으로써 여성이 굴욕이나 후환이 두려워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용기를 앗아간다.


ⓑ 이상화

193쪽
최대치의 기대를 담고 있는 화법인 이상화는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 기준을 설정하고 고난에 처한 여자들을 향해 정당한 고난인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이 기준에 맞춰 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감정적이거나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산만하고 모순적인 자아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여주지 않을뿐더러, 외려 가해자로 고발당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여성의 증언은 대체로 ”거짓말“이라는 신화는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레이 길모어 Leigh Gilmore는 근대 이후 여성을 ”오염된 증인“으로 구성하는 작업은 모든 진실된 증언의 이상적 요소가 남성주의적 맥락에 의거한 판단과 거기서 파생된 객관성과 품위라는 진실 규범들이라는 가치 평가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니 뎁- 앰버 허드 재판이 그 예이다.


ⓒ 언어적 역전

195쪽
앞의 두 화법이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작동한다면 이 화법은 어휘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집음으로써 이와 유사한 서사적 효과를 내고자 한다. 이는 공감의 중심을 피해자에게서 가해자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 의미의 탈맥락화

196쪽
이 화법은 고통의 언어들을 정의를 요구하는 투쟁과 관련된 역사적 함의에서 분리시킨 뒤 폭력과 압제의 경멸적인 서사에 위치시키는 방식을 일컫는다. 혐오발언의 넓은 레퍼토리 중 일부인 페미나치 feminazi, 인권전사 human rights warrior, 깨어 있는 폭도 wokemob, 정치적 올바름 감시원 PC Police 같은 표현들은 인종, 젠더, 또는 성폭력 문제를 고발하는 사람들은 너무 교조적이어서 관심, 공감, 연대를 표할 가치가 없다며 그들의 정당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된다. 피해자의 증언을 ”쉽게 상처받고 “ 그러므로 관심이나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여성적 과민함으로 폄하하는 눈송이들 snowflakes과 울보들 crybabies 같은 단어도 이와 유사한 효과를 위해 사용된다.


ⓔ 완곡어법

197쪽
의미의 탈맥락화에서 별도의 범주에 해당하는 완곡어법 역시 언어를 그 맥락과 단절시키는데, 완곡어법은 저하보다는 폭력의 맥락에서 유발된 고통을 지우거나 순화하거나 언급조차 되지 않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다.


ⓕ 일시적 투사

199쪽
피해도착증 victimcould은 가설적인 상황에 입각해 ”상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과 ”이미 상해를 입은 사람“의 구분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고, 사회구조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실제로 겪은, 혹은 겪는 중인 고난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이 취약한 사람들을 상상 속 피해의 가해자로 몰아가고 백인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적 현실만이 정당한 피해자성 주장인 것처럼 다룬다.


ⓖ 보편화

201쪽
니키타 카니 Nikita Carney가 말하듯 ”모든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 #모든 이라는 해시태그는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경찰의 잔혹성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에서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같은 복잡한 문제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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