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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Dec 27. 2021

[북리뷰] 황정은, 일기日記

2021년, (주)창비. "치유의 글쓰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1.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 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 197쪽 작가의 말 中“


 에세이란 이름의 잡문에 지쳐갈 때쯤에 만난 글이라 반가웠는데, 이렇게까지 위트를 잃지 않는 모습까지도 매력적이다.

 표제이기도 한 첫 수필(이자 마지막 편도 동일한 제목이다) <일기>의 첫 두 쪽의 문장들만으로도, 최근 숙제하듯 읽었던 ‘에세이’류가 보여주지 못했던 문학적인 문장으로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수필이란 장르 자체가 작가 자신이 화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그것이 한계이면서도 장르의 정수가 된다. 때론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개인사적 비극을 고백하면서 주체적 전복을 꾀하는데, 그런 행동들이 어쩌면 치유의 글쓰기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황정은의 글은 사회문제를 다룰 때는 객관적 사실과 자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개인사를 다룰 때는 아프지만 절제된 기술로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서도 문장의 문학성은 작가답게 놓치지 않고 있다. 미덕이다.


 사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창비에서 이 책이 출간되자, 동네책방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선 쉴새없이 황정은의 수필집이 노출됐다.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첫 수필집이 호평중이다.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연이 없던 작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의 다른 작품에 눈길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휴대전화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가 전자책으로 대출되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2.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183쪽 <흔痕> 중에서


 <흔痕>과 같은 고백으로 시작하는 고발에는 매번 숨이 막힌다.

 ‘남자아이들의 주도하는 모험에서 여자아이들은 만져지고 꿰뚫린다’는 지적에 이르면, 변변찮았던 내 인격의 밑바닥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경험을 가게 된다. 가해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가해들을 심상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 나의 모자름은 사촌N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오십보백보라면서 ‘한남충’을 자인하고 싶지도 않다. 오십보는 오십보고 백보는 백보다, 일에는 경중이란 게 있다며 그렇게까지 몹쓸 사람은 아니었다고 항변하게 된다. 옆에 서서 피해자를 도닥이고 가해자에게 돌을 던지기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그때는 그랬다’는 비겁한 변명을 해주기엔 아직 마모되지 않고 남은 이성과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도 못하게 될 뿐이다. 적반하장의 딴죽을 걸지 않는 것 정도만 해도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그게 또 ‘침묵의 카르텔’에 발을 담그게 되는 모양새가 된다. 나날이 자기혐오는 늘어날 뿐이다. 


 영화 《굿윌헌팅》에서 “It's not your fault."을 반복해서 읊조리는 로빈 윌리암스와 울면서 포옹하는 맷 데이먼이 등장하는 신은 꽤나 감동적인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와중에도 해당 장면이 살짝 고까웠던 것은 치유의 순간에도 여전히 과거의 피해는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저 앞으로라도, 묵은 상처가 더 곪지 않고, 그 위에 딱지가 앉아 서서히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종국에는 흔痕을 남겨서 두고두고 곱씹을 수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더 끔찍하다. 



3.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 29쪽”


 언제고, 무슨 글을 쓰건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쓸 수밖에 없다. 내 인식의 한계 내에서의 최대한이 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의 글이나 생각에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도, 내심은 ‘나 역시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란 불안함은 남는다. 그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이들에게 ‘그래도 삼천포로 빠지진 말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꼬운 말 한마디 보태는 일을 겁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보통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맨이 되기 어렵다. 그렇게까지 모든 일에 정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입장이 최선이나 당위가 될 수는 없다. 완전하지 못한 지식과 무결하지 못한 판단이라서 말이다. 오로지 누군가의 행동 선택의 준거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뿐이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최고선(最高善)의 지점이 될 수는 없다.



4.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 133쪽”


 136쪽에 책꽂이를 꽂아놓고 글을 쓰고 있다. 

 좋은 문장들이다. 이쯤 되면 이 찜찜한 독서를 끝내도 될, 충분한 이유를 전달받은 느낌이 들었다.

 독서의 순간순간마다 완독 포기의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보이는 정치적 견해의 편향성과 그 편향성을 도출하는 일천한 상황인식에 대해, “병신아, 그게 본질이 아니야~ 너무 나이브하게 상황을 인식하니까 근거 없는 뇌피셜에 빠지는 거야”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다. 머리 굵어질 대로 굵어진 성인에게는 아무리 사실을 말해줘 봐야 별 의미가 없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발언이 하나의 밈이 되어 재생산되는 이유와도 맞닿는다.

 모든 가치 판단은 개인의 인식의 한게를 뛰어넘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는, 복잡하거나 관련 지식이 부족한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은 ‘신념’ 또는 ‘믿음’ 그리하여 ‘신앙’이라 불리는 인식의 도구를 통해 승인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신념, 믿음, 신앙들은 일련이 구조를 갖추고 타인으로부터 이식되거나 자신의 내부에서 유보된 판단을 임의적으로 선택해서 체계화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도그마가 된다. 그렇게 주체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외되고, 시뮬라시옹이 주체를 장악한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이성적으로 합리를 논쟁하다가, 종국엔 “아몰랑~ 인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냉혈한”쯤으로 몰고 가는 감성적 비난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 우이독경의 상황을 몇 차례 겪고 나면, 누군가의 설익은 정치적 스탠스에 참견하기 보다는 짐짓 썩은 미소를 날리며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로 충돌을 회피하는 삶의 지혜가 생기게 마련이다. 


“서울로 진입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 대전차방호벽은 유사시 폭파되어 서울과 서울 북쪽을 가를 것이다.
 -107쪽”


 더 많은 정보와 더 깊은 고민 그리하여 사고의 기저 지점이 달라지면, 시야도 시각도 달라지게 된다.  

 이런 뇌피셜이 가능한 이유도 일종의 도그마에서 비롯된다. 틀딱 할배들이 “빨갱이한테 나라를 내주겠다는 게냐”며 대전차방호벽 철거를 반대하는 도그마와 닮아 있다.

 80년대까지 만들어진 대전차 방호벽은 안전문제로 상당수가 철거됐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철거를 계획하고 있다. 그저 ‘누가 철거하나’의 문제가 남았을 뿐이다. 만들 때는 국방부 산하의 국군이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철거해야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교통 불편 등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국도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보다는 지자체의 사정이 크다. 서로들 ‘철거하고 싶으면 너네 예산으로’ 하라는 입장들이다. 실제로 철거 비용은 주로 경기도와 해당지자체들이 내고 있다.

 우리 군의 교리 상에서도 우리가 설치한 대전차방호벽이 골칫거리가 됐다. 우리 기갑전력의 북진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기갑전력이 이북에 비해 열세였지만, 2021년의 대한민국 국군의 기갑전력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미국,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정도가 앞설 뿐이다. 수적으로만 따질 수 없는 3.5세대 전차(K-2)는 말할 것도 없고, 3세대 전차(K-1) 보유량에 K-9이라는 명품 자주포의 괴랄한 숫자까지 더하면, 서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강력한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군사력 때문에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에 그렇게 민감하다. 과거 팀스피리트 훈련부터 현재의 키리졸브 훈련은 북진연합훈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전계획5027(OPLAN5027)과 그 후속계획 작계5015의 과감하고 담대한 북진통일계획은 이승만정부의 허장성세와는 격을 달리한다.

 결국 대전차방호벽은 ‘유사시 폭파될 분단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누가 치울지 서로 미루는 분단시대가 싸지른 똥’에 가깝다.


 간혹 단순하고 명쾌한 주장들은 매력적이게 보인다. 그 단순명쾌함이 내포하는 이율배반을 우리는 꽤나 심상하게 무시한다. 집행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사형을 법원에게 언도하라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빅브라더에 가까워진 비대한 경찰조직에게는 시민 사회에 대한 더 폭넓은 간섭을 요구하기도 한다. 법률가가 아닌 이들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는 특검 아닌 특검범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는가 하면, 검찰에게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할 것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기소와 공소유지마저도 분리하라고 주장한다. 순간적인 공분에 부회뇌동해서, 그간 시민사회가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를 파시즘으로 도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찔하다.

 나같은 보수주의자가 때때로 ‘빨갱이’로 몰리곤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작용할 테다. 심지어는 ‘현실과 유리된 진보주의자들의 이상론’으로 매도되는 경우들도 있다. 아연실색하게 된다. 


5.

  요즘 내가 주목하는 주제가 그래서인지, <민요상 책꽂이>의 여러 문장들이 눈에 띄였다.무엇보다 독서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소소한 습관들과 취향의 문제가 굿즈라는 BM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황정은 작가도 40대 중반답게, 꽤나 꼰대스러운 자잘한 습관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면은 나와 통하기도 하고, 어떤 면은 반대가 되기도 한다. 동시대인들의 어쩔 수 없는 동질감이 재밌긴 하다.


"도톰한 집게 모양의 책갈피나 복잡한 형태로 종이를 깨무는 클립 책갈피는 도대체 뭐하자는 사물인지 모르겠다. 그걸 종이에 끼우고, 끼우는 단계에서 이미 종이가 구겨지거나 하는데, 책을 덮으면 책 무게에 눌려 책갈피에 물린 종이가 꼬집힌 것처럼 구겨지고 앞뒤 종이에도 집게나 클립 모양으로 자국이 남는다.
-  82쪽"


 나 역시 클립형태의 책갈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 우리 동네의 '그날이오면'에서 준 클립형 책갈피를 쓰고 있긴 하지만 자주 쓰진 않는다. 책이 물려서 자국이 남을 정도의 두께가 아니라서 부담없이 쓸 수는 있지만, 이게 또 한 페이지만 끼우는 것이 여간 섬세한 작업이 아니라서 '걸거친' 일이 되기도 한다.

 편지칼로도 쓸 수 있는 형태의 책갈피에는 기겁을 한다. 책의 제본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책갈피는 그래서 가급적 종이로 된 것을 사용한다. 선택지가 많지는 않다. 비닐 코팅된 종이 책갈피는 질겨서 싫고 시시때때로 빛을 반사해 사용하지 않는다. 귀여운 그림이나 풍경이나 얼굴이나 문장이 인쇄된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두껍거나 구멍 뚫린 금속, 나무, 가죽으로 만든 것은 사용하지 않고 가름끈이 달린 것도 사용하지 않는다.
- 83쪽"


 국립현대미술관을 자주 가는 편이다. 집이 관악구이다 보니 과천관도 그리 멀지 않거니와, 덕수궁관의 기획은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라서 일부러라도 자주 찾는다. 서울관은 가끔씩 공부하듯이 찾는다. 그렇다 보니 국립현대미술관의 티켓을 쉽게 책갈피로 쓰곤 한다. 너무 얇아서 책갈피가 되지 않을 지경도 아니고, 너무 두꺼워서 책이 제본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준의 부피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서 꽤 좋아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플래그를 붙여서 다니기가 좋다.

 황정은 선생과는 달리, 서울식물원 주제원 입장권도 꽤나 오랫동안 책갈피로 쓰고 있다. 으아리속의 꽃이 프린트된 게 너무 예뻐서 말이다.

 지난 11월 서울서점주간에 줏어온 책갈피는 집에서 사용하고 있다. 누워서 책을 보다가 잠깐 덮어야 할 때 사용한다. 두께감이 느껴지고 이물감이 커서 평상시엔 잘 쓰지 않는데, 잠깐씩 쓰기엔 좋다. 보던 면을 펼친 채로 바닥에 내려놓는 게 꽤나 꺼림칙하다 보니 잠깐씩 사용하게 된다.

 가름끈이 있는 형태는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거치적거려서 그렇다.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일에 익숙해지는 경우가 하나 더 있다. 나는 연필로 책에 줄을 긋는다. 줄을 많이 긋고 싶은 문단에는 차라리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재작년까지는 이런 일에 질색하며 포스트잇 플래그 필름을 사용했다. 그걸 많이 가지고 있었다.
- 87쪽"

 스테들러 흑연심 홀더를 20년째 애용하고 있을 정도로, 연필의 촉감을 좋아한다. 하지만 30대 중반부터는 책에 줄을 긋지 않는다. 책에 줄이 그어지는 게 너무 싫어졌다. 그래도 눈에 띄는 표시는 해 놓고 싶었는데, 플래그만큼 좋은 게 없더란 말이다. 황정은 선생과는 좀 반대의 길을 걷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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