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이렇게 막 써도 되나 싶다
트렌드 분석서를 읽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레트로피팅 retrofitting입니다. “거 봐! 내 예언이 맞았지?”라며 의기양양해하는 꼴 말입니다. 바넘 효과 (Barnum effect, 누구에게나 적용될 만한 모호하고 일반적인 진술을 자신에게만 맞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에 의지해서 견강부회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짜증이 솟구칩니다.
두 번째로 짜증 나는 일은 통계 해석의 자의성입니다. 보통 트렌드 분석서들은 자체적인 서베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통계 자료는 누군가가 합목적적으로 설계해서 결론을 노출해 낸 2차 자료가 됩니다. 이런 자료의 해석은 몹시 제한적인데요, 우리 트렌드 분석서들은 이때 몹시 엉터리 해석을 내놓곤 합니다. 거의 ‘소설을 쓴다’고 평가할 만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신경을 긁는 것이 ‘부족한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트렌드 분석이란 마케팅의 하위 분야이고, 마케팅은 경영학의 하위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심리학이나 사회학과 같은 사회과학이 동원되기도 하니, 그 연구방법은 사회과학에 기초를 하게 됩니다. 특히나 통계 해석과 같은 경우는 ‘유사과학’이라 불리는 사회과학에서도 꽤나 엄밀성을 요구하곤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엄밀성을 요구하는 통계 해석이 그 모양인데 여기서 인문학적 소양까지 갖추라 요구하는 건 좀 과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출되는 ‘스토리텔링’이 보여주는 호도를 넘어선 왜곡을 보고 있자면 열불이 터집니다.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 때문에, 억지스럽게 ‘개소리’를 늘어놓게 되는 것이죠.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에 대해 이미 잘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말하기를 요구받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그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 해리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이윤 옮김, 서울: 필로소픽, 2016, 6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같은 시리즈의 책을 계속 읽습니다.
분명 지난해에 “책 정말 거지 같이도 썼다”라고 욕하면서 책장을 덮기까지 했던 건데도 말입니다. 대단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트렌드 분석서를 읽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트렌드 분석을 하는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읽는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40쪽
인간증명 proof of Humanity or Proof of Personhood은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자동화된 봇으로 만들어진 가짜 계정)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정말 장황한 챕터인데요, 그저 장황할 뿐입니다. AI에 대해 이것저것 막 가져다 붙이다 보니 글이 쓸데없이 무거워졌습니다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주워 먹을 정보는 간단합니다.
“소셜미디어에 가입된 계정 중 10~18퍼센트 정도가 가짜 계정 봇 계정으로 추정”하고 있고, 따라서 “개인당 하나의 고유 참여자로 인정받도록 해서 가짜 계정, 중복 계정으로 사기, 스캠, 여론조작 등 악용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온라인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접한 인간증명 방식은 캡챠 CAPCHA(Completely Automated Public Turing Test to tell Computers and Human Apart)”라는 것 정도가 주요 골자입니다.
3년 전쯤에 출간되었던 AI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모두가 언급하는 내용이 바로 AI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였습니다. 이 책에서도 뜬금없이 다루는 내용입니다만, “AI는 창작의 새로운 주체가 되었지만, 순수한 창작이라기보다 복제, 생성, 짜깁기에 가깝다”라고 기술하는 것은 몹시나 부정확합니다. ‘순수한 창작’이란 개념 자체도 성립하기 어렵지만, “복제, 생성, 짜깁기”라고 평가절하한 행동이 15세기 르네상스 이래로 인간의 창작 행위를 관통해 온 주요 개념임을 상기한다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와중에도 사족 중에 하나는 건져 올려서 깊이 고민해 볼 만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71쪽
로봇과 자동화 기술이 확대된다는 건, 사람 직원은 서비스에서 휴먼터치를 강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경험사치 Experimental Luxury란 “희소한 경험·감정·이야기 자체를 소비하며, 그 경험의 독특함과 개인적 의미가 사치의 기준이 되는 소비 형태.” 즉, 물건이 아니라 경험의 미학과 감정적 가치가 사치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현대 소비문화의 중요한 변화 흐름으로 평가됩니다. 이 개념은 제임스 길모어와 조지프 파인 2세에 의해 1998년에 발표된 논문, 「경험경제 The Experience economy」에서 파생됐다고 보기도 하고, 번 슈미트의 『경험 마케팅 Experiential marketing』에서 발달했다고도 봅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 경제와 경험마케팅 그리고 경험소비를 관통하는 개념적 동일성을 어떻게 추출해 내는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 부분에서 실패하고 시작했습니다. 그저 ‘경험’이라는 반복 어휘에 집착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번 장은 산으로 올라가서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 와중에 단 한 번 제대로 된 예시가 나오기도 합니다.
89쪽
같은 공연을 봐도 관객석에서 보기만 하고 끝나는 사람과 가장 좋은 좌석에서 보고, 공연 후 무대 뒤에서 인사를 나누고, 애프터 파티에도 가는 사람은 다르다. 같은 전시를 봐도 그냥 보기만 하고 끝내는 사람과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서 작가와 인사와 담소를 나누는 사람은 다르다.
여기에 인용도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잘못한 인용은 안 하니만 못한 것이 되고 말죠.
87쪽
돈이 별로 없는 사람도 비싼 차를 사서 자신의 경제력 여력을 과대포장하기도 한다. 이런 소비 심리가 베블런 효과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는 ‘과시적 소비 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을 도출합니다. “타인의 인정을 얻거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소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로, 값비싼 신호 보내기 costly signaling의 일종으로 봅니다. 이 개념에 근거해서 경제학에서 도출해 낸 수요이론 중에 하나가 베블런 효과입니다. 사치재에서 보이는 역수요곡선을 설명하는 개념이죠. 그러니 ‘과시적 소비’의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인용해야 할 때, 거기에서 파생한 경제학 개념을 잘못 가져온 겁니다.
이런 식의 오용은 계속 이어집니다.
101쪽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가 정의한 파노플리 효과 effet de panoplie는 ‘특정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그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이론이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천명한 파노플리의 개념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지 않고, 그저 표피적인 개념으로서의 ‘파노플리 효과’만 아주 자의적으로 인용하고 맙니다. 이 빌어먹을 불란서 철학자가 제안하는 ‘사물의 체계’는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 편인지라, 이런 깔끔한 인용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108쪽
취향 계급의 이론적 배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1930~2002년)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문화와 취향이 현대인의 계층 구분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했다. 돈이 계층의 기준이 이나라, 어떤 문화, 어떤 예술을 누리고, 어떤 취향을 가지는가가 계층의 기준이다.
이 인용의 주요 내용은 부르디외가 『재생산』과 같은 저서에서 도입한 ‘문화자본’ 개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이 가진 특정한 문화적 취향이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이라 설명되는 문화자본은 아비투스 개념과 함께 부르디외 철학의 대간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문화자본의 개념을 오용 왜곡하는 수준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돈이 계층의 기준이 이나라, 어떤 문화, 어떤 예술을 누리고, 어떤 취향을 가지는가가 계층의 기준”이란 발언은 인과를 뒤집는 심각한 오류를 보여줍니다. 그렇다 보니 다음과 같이 자가당착적 진술을 아무런 회의 없이 가져올 수 있게 됩니다.
110쪽
원래 취향은 귀족이나 전통적 부자인 올드 머니의 언어였다. 취향은 누구나 누릴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취향을 가지려면 풍부한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지적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소비의 경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요.
107쪽
어떤 것을 먹느냐도 중요한 경험사치 요소인데, 아무리 새벽 배송이 편하다고 해도 백화점 식품관에서 장을 보는 이들은 ‘더 좋은’ 먹거리를 원한다.
115쪽
불교는 종교이면서도, 때론 철학적이고, 문화적이고, 인간적이다.
20세기를 관통하며 불교가 오리엔탈리즘의 시뮬라크르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몹시 벗어나는 분석이 자주 보입니다만, 대체로 ‘마인드풀니스’로 수렴하면 그만인 설명들인지라 그냥 무시해도 될 듯합니다.\
141쪽
AI 기술이 중간관리자가 하던 업무 보고, 업무 조율, 의사 결정 지원 등 반복적이고 관리적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AI가 데이터 처리와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를 가능하게 하면서, 중간관리자 없이도 일이 되고 관리가 된다. 이로써 조직은 더 수평화되고, 더 슬림화된다. 의사결정도 더 빨라지고 효율성도 높아진다.
이번에도 확증편향에서 시작한 엉터리 분석이 나옵니다. 인사관리의 상식선에서만 생각해 봐도 당최 동의하기 어려운 이런 분석은 ‘그 반대의 결과를 입증하는 자료’를 하나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쉽게 부정할 수 있게 됩니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저자의 주장을 못 믿을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선, 반대 증거 하나만 나와도 ‘이 새끼 이거 구라 쳤다!’고 나발을 불게 됩니다. 똑같이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책을 쓰는 입장이 아니므로 이 정도의 반증으로 충분하다고 우기렵니다.
물론 이번 장에서도 흥미롭게 들여다볼 만한 내용이 없진 않습니다. “상위층이 중산층, 중산층이 하위층으로 체감”한다는 것,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소비 여력 또한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 또한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음 챕터를 시작하는 진술이 딱 맞는 설명이 될 듯합니다.
157쪽
한국에서 집은 재산이다. 개인 공간으로서의 욕망보다 투자 가치, 재산으로서의 욕망이 훨씬 크다. 그래서 아파트를 선호한다. 가지고 있는 집값이 수십억 원이어도 소비 여력은 별로 없는 사람도 있다. 수십 년째 계속 살던 집이 운 좋게 재개발되어 수십억 원짜리가 되었을 뿐, 그 외 자산도 소득도 별로 없는 이들도 있다. 최대한 대출받고 모든 걸 끌어모아서 집을 산 뒤 대출이자 갚기도 빠듯한 사람도 있다.
158쪽
“view 병‘은 집을 선택할 때 산이나 숲, 강 등 탁 트인 전망에 대한 강박적인 욕망을 뜻하는 신조어다. 전망이 좋다면 돈을 더 내고서라도 집을 사겠다는 것이고, 좋은 전망만 확보되면 다른 불편한 요소는 감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뷰는 주거용 부동산의 환가 가치를 높이는 요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가 가지는 의미야 이미 앞에서 써먹은 이 장을 시작하는 157쪽의 인용문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지하철을 이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역세권은 의미 없는 요소“가 되거나 ”아이가 없거나, 이미 다 커버린 사람에겐 학군도 의미 없는 요소“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게 다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소가 작동하지 못할 때는 다른 가치 요소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게 뷰일 뿐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분당에서 여주로 밭일을 좀 다녔었습니다. 분당-수지-광주-이천-여주로 이어지는 도로를 지나면서 밭주인인 친구 녀석과 광주와 이천 그리고 여주의 아파트들을 가지고 ”뷰는 좋은데 여기서 살 수는 없겠다 “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뷰만 좋았기 때문입니다. 서울 신림동에서 사는 저 같은 '차가운 도시 남자‘에게는 도시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는 아파트 단지에서 그저 '뷰'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살긴 어렵겠더군요. 심지어 제가 살고 있는 신림동의 아파트의 뷰도 엄청 좋은 편이라서 말입니다. 케이윌의 노래 가사처럼, ”못생긴 애들 중에 내가 제일 잘 생긴 것 같아"라고 항변하는 것이 뷰가 아닌가 싶어서 읽는 내내 씁쓸했습니다.
181쪽
세상은 블루칼라의 시대에서 화이트갈라의 시대를 거쳐, 다시 블루칼라가 주목받는 시대가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배관공이라는 직업이 요즘 자주 언급되고 주목받는다.
이 엉터리 분석 역시 이코노미스트의 ’blue-collar bonanza‘에 대한 비판글 하나로 반증이 가능합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09959
'배관공'과 같이 skilled trades 직업군을 블루칼라로 치환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들과 같은 '고숙련 기술자‘는 되레 화이트컬러 중에서도 전문직이라 불리는 변호사나 의사 수준과 같습니다. AI로 대체 가능한 저숙련 화이트 컬러 직종과 마찬가지로 저숙련 블루컬러는 이미 로봇과 키오스크로 대체된 바 있습니다. 제대로 된 개념 확립을 선행하지 않고, 말장난하듯이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이런 개소리 bullshit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재밌게도 저자의 주장은 금세 스스로의 인용으로 ’또‘ 박살 나기도 하고요.
183쪽
제프리 힌턴 교수가 강조한 건 창의적이고, 손을 쓰며, 복잡한 판단이 필요한 업무를 할 수 있는 역량이다. 적어도 이런 업무를 하는 일자리는 AI와 로봇으로 대체되기 어렵다. 이것이 미래 인재상의 핵심 조건이다.
199쪽
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은 뇌신경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전형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신경적 특성을 의미한다. 이런 ‘다름’도 생물적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관점이 신경다양성이다.
이번에도 다양성 diversity란 용어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다양한 용례를 혼용함으로써 분석은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신경다양성의 개념은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정상성’ 개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지라, ESG의 E 필라에서 다루는 생물다양성 biodiversity개념이나 G 필라에서 다루는 이사회 다양성 diversity 그리고 S 필라에서 다루는 다양성/평등/포용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와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이 와중에 신경다양성을 굳이 끼워 넣겠다면 S 필라의 DEI겠지요. 그런데 이 장에선 이 모든 개념을 그냥 막 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진술까지 섞여 들어오면,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수정해 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어 집니다.
201쪽
왜 5년 전부터 갑자기 ADHD를 가진 사람이 크게 늘어난 걸까? 왜 ADHD에 대한 관심이 급등한 걸까? 이건 분명 ADHD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진단이 늘어난 이유는 별 거 없습니다. ADHD는 늘 있어왔던 겁니다만, 이제 우리 사회가 ‘진단’을 할 수 있게 됐을 뿐입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DSM’에 ADD가 등재된 것이 DSM-3부터였고, 이를 보편적인 진단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5년 전부터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분명 ADHD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억측은 ‘내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아낼 뿐입니다.
217쪽
어시 플레져 earthy pleasure는 친환경도 이제 욕망에 포함되었다는 증거다. 친환경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진화이자 소비 욕망이 친환경을 흡수한 것이다. 텀블러는 일회용 컵을 쓰지 않기 위해서 들고 다니지만 처음엔 번거롭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편을 감수한 이유는 환경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흙을 밟고, 땅에서 농작물이나 꽃을 키우는 것을 자랑하고 과시한다. 지금 시대의 여유는 오히려 흙에서 나온다. 자기 땅이 있고, 그 땅에서 뭔가를 키우고, 자연 그대로를 누릴 수 있다는 건 중요한 과시이자 욕망이다.
팔자에 없던 밭농사를 며칠 동안 했던 이유가 친구 녀석의 사업 아이템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언급하는 ‘흙을 통한 기쁨’을 추구하는 ‘도시 농장’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장은 꽤나 유심히 들여다봤는데요, 다음과 같은 지적은 ‘써먹을 만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225쪽
어시 트렌드는 ‘자연 친화’나 ‘에코 라이프’와는 수준이 다르다. 어시 트렌드는 친환경이 주인공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다.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원하고,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만족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유연해지고 내부와 외부와 조화로운 연결이 강화된다. 이것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이다. 어시 플레저는 삶의 태도다. 이 태도는 의식주를 비롯해, 공간, 소비, 예술, 쾌락, 취미 등 모든 분야로 확장된다. 지구를 위해서 불편하더라도 친환경을 하자는 접근에서, 우리의 행복과 안정 편안함을 위해 어시 플레저를 누리겠다는 접근이 된 것이다.
여기에 지오스민 Geosmin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꽤 큰 소득이었습니다.
콘라드 로렌츠 Konrad Lorenz의 ‘Baby Schema’에 대해 알게 됐다는 것 정도가 이번 장에서 건진 유일한 소득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언급된 2가지 조사 내용은 직접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피앰아이 PMI가 진행한 전국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청년의 연애와 결혼 그리고 성 인식 조사》입니다.
287쪽
사실 실용주의는 미국의 가치다. 實用主義 pragmatism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찰스 샌더스 피어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어원은 행동, 실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라그마 pragma’다. 그만큼 행동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다. 얼마나 유용한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실용주의와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실용주의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실용주의의 개념은 사뭇 다릅니다. 그렇다 보니 실용주의란 용어를 또 멋대로 사용하는 건 곤란한데요, 이번 장이라고 다를 리는 없습니다. ”무엇이 실용인가"를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 말이나 막 가져다 붙이면 담론은 산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소비자학 차원에서 ‘실용주의’란 ”소비자가 제품의 기능성과 효용을 중심으로 합리적·목적 지향적 판단을 내리는 소비 태도 또는 가치 기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가 자신의 책, 『넛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모 에코노미쿠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실용적 소비’란 개념 역시 그저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언제나 존재해 왔다고 믿고 있지만 언제나 존재한 적 없는, 17세기 이래로 관념철학에 의해 기초된 근대적 제도들의 존재 양식 그대로 말입니다. 인간의 합리성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심리학자 쉬나 아이엔가가 ‘잼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듯, 너덧 개의 선택권 중에서 대충 선택하고 마는 게 인간의 한계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