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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찬호_납작한 말들

'납작한 말들'에 지쳐서 타성에 젖었나 보다

by 안철

오찬호, 『납작한 말들』, 어크로스, 2025.


1. 책을 찾아 읽는 이유: ‘납작한 말들’이 싫었다.


작년 여름 저는 파리올림픽 여자 복싱의 성차별 문제를 고민하며 블로그에 포스트를 하나 작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의 <멋진 신세계는, 없다>란 글에서 다루었던 주제이기도 하죠. 그때 처음으로 ‘납작한 논리’라는 표현을 마주하게 됐었습니다. 누군가(그 누군가를 다시 찾아내질 못했습니다)의 글에서 처음 접하고, 대략적인 의미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비평용어로써의 의미가 확립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형용사 ‘flat’의 역어로 ‘납작한’이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문학비평에서 ‘납작한 언어 flat language’로 활용되던 것으로, “감정, 도덕성, 역사성, 은유, 가치 판단 등을 제거한,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언어”를 비평할 때 쓰인 듯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납작한 논리 flat logic’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사회 현실을 단선적·선형적 인과관계로 환원하는 방식의 사고”를 비판할 때 사용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누가 언제 처음 활용하기 시작(coin)했는지가 궁금했지만, 그 기원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찬호의 “납작한 말들”이란 제목에 꽂혔던 것이겠지요. 물론 그 개념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찬호 역시 ‘자명한 비평 용어로써의 납작한’이란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납작한 말들》은 생각과 언어의 간편함이,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납작하게 찌그러트려 버리는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고민한 책이다. 무엇이, 이를 성찰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는지를 따져본 책이다. - 11쪽
납작이라는 단어는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지만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 그런 표현을 하는 나는 얼마나 두터운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타인의 입체적 인생을 작은 상자에 폭력적으로 눌러 담아 납작하게 찌그러트리는 말과 행동이 당당한 시대, 이 무례한 반지성주의를 어찌 납작하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 <빈약한 사고의 시대, 납작한 논쟁의 나라>, 118쪽

위의 글에서 저자는 “빈약한 사고가 넘쳐나는 시대”라고 한탄합니다. “비판이 차단되면 원래의 고정관념이 강해지니 그걸 뒤틀 생각 자체가 사라”지고, 그 토대에서 “논쟁이 기계적인 찬반 토론 위에서 공허하게 흘러간다”는 겁니다. “상식과 비상식을 구분해야 하는 안건이 의견은 다 다른 거라는 정해져 있는 결론 안에서 날카로움을 상실”하며, 마침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꼰대 논리라고 쉽사리 폄훼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논쟁은 납작하다”며 한탄한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납작한 말들’을 갈무리하며 책을 끝마칩니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저 언어가 넘실거릴수록 종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단어만이 존재하면 무슨 소용일까. 자유가 살던 대로 생각하겠다는 당당한 무기가 되고, 인권이 상대적으로 해석되어 혐오를 정당화하고, 공정이 차별의 근거로 활용되고, 연대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매도해 약자의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걸 막는다면 폭력은 더 교묘히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 287쪽

이 책에서 부유하고 있는 ‘납작한 말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를 꼽아서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경중을 따지기도 쉽지 않거니와, 짧은 글 속에 녹여내느라 너무 압축된 탓에 추출이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민낯들』이 더 편했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불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책 쓰기 방식 문제: 기고문을 모은 책의 문제점


오랜 기간 써온 여러 칼럼을 모으고 다듬는 방식으로는 좋은 책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로 다음의 두 권의 책 리뷰를 참고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글들을 합치고 잘라내면서 많은 수정을 했고, 압축했던 덩어리를 풀면서 여러 사례를 더하며 많은 내용을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써놓은 글들이 아까워서 재활용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애저녁에 완결성을 갖춘 글들이라서 사고의 외연을 확장하는 걸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책이란 관통하는 생각의 줄기란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차’를 짜게 되는데요, 일주일 단위, 한 달 단위로 써내는 기고문을 모아서 만든 책들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때그때 하나하나가 시의성을 갖추면서도 글로서 완결성을 갖추어야 해서, 전체를 이루는 한 조각이 되기 어렵습니다. 단편소설을 모아서 소설집을 만들 수는 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장편소설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책이 딱 그렇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계가 명확한 책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앞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루어졌지만, 부족했습니다. 전작인 『민낯들』이 그 한계를 벗어나 탄탄한 목차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1년간 연재하면서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미리 정해놓았던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언제나처럼 기고문을 모아서 엮어낸 책들은 그런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의 목차는 한눈에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얼개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글과 글 사이의 느슨한 연관성에 근거해서 범주화할 때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추상성’에 있습니다. 크게 5부로 나눈 중제목이 하나의 개념어로 수렴하지 못하고 문장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심지어 소제목들은 무슨 내용을 다룰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해당 글을 다 읽고 나서야, ‘그리 부당한 제목은 아니다’는 사후 정당화가 가능해집니다. 대중서로서는 상당한 취약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업작가’로서 짧은 기고문을 엮어서 책을 내는 방식에 익숙해진 작가의 타성에 기인한다고 봤습니다. 아쉬움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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